1.
내 생각에 젠더사회학이나 가족사회학의 기본적 의의는 사회학 자체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것'이다. (마치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질까에 대해 생각했던 어떤 물리학자처럼 당신 주변의 젠더, 연애, 결혼, 가족 등을 한 번 바라보라는 의미이다. 과학적으로 보면 '그냥'인 것은 대개 용납되지 않으니까.)
예컨대 사람들은 정치나 경제의 제도나 현상은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사회문화 현상들에 대해서는 변화(처럼 느껴지는 것. 이유는 후술한다.)에 거부한다.
사실 당연한 일이긴 하다.
왜냐하면 예컨대 남성/여성, 핵가족 구성 등은 너무 공기처럼 당연하고 각인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바로 곁에 존재하는 것이니, 그것과 다른 무언가 - 트랜스젠더나 동성커플 같은 - 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풀어 보면, 사실은 그 '당연함', '이질감'의 구분은 전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사회학의 기본 전제 중 하나는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회적이다.'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페미니즘 토론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아 토론의 전제와 차원이 엇갈려 엉망이 된다. 한 쪽은 3차원에서 다른 쪽은 1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이 전제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문화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와는 별도의 문제이거나 양립 가능한 부분이다.
어차피 사회 자체도 생물인 인간이 구성하는 것이고, 사회학에서 구태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사회성이 태아일 때부터 존재하는지에 관한 과학적 실험도 생물학이나 심리학과 연계해 진행되어 온 실정이니, 사실 선천성-후천성 논쟁은 크게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어떻든 사회학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가진다.
모든 것이 그렇듯 사회성이나 사회화도 양면성을 가진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만 동시에 사회가 개인을 옥죄어 오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젠더나 가족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적 정체성 정확히는 (섹스(생물학적 성)가 아닌) 젠더(사회적 성)는 사회화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 구조화된 것이기에 사람들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일치시켜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가족의 경우에도, 남성과 여성의 혼인이라는 형태는 항상 존재해 왔지만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 또 대가족이냐 핵가족이냐 등 이성애 안에서도 여러 가족제도가 존재해 왔다.
결국 젠더나 가족도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다.
사회가 좀 더 개방화되면서 이러한 점들에 관한 이해와 통찰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사실은 변화가 아니라 본래에도 그들 주위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성소수자 인권이나 다양한 가족의 인정 문제는 새삼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그냥 원래도 있었으나 없는 존재들처럼 취급 받았던 것의 존재를 인정 내지 수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학은 과학이기 때문에 대상의 정체에 대해 해명하고 설명하는 것이지 그 다음에 무엇을 할 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이러한 설명들은 어디까지나 설명들일 뿐,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는 인간과 사회의 몫이며 그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새로운 사회현상은 다시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성소수자 문제가 주목 받고 있지만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조손가정, 1인가구 등 본래부터 다양한 가족의 형태는 존재해 왔다.
이것들은 성소수자와 달리 종래의 이성애 중심 가족 구조가 이혼, 사별, 미혼의 장기화 등 여러 이유로 변이된 것이어서 성소수자의 경우보다는 비교적 덜 충격적이거나 덜 이질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포괄적으로 보면, 결국 우리는 그러한 상황들이 온전히 개인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이혼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사람은 없고, 처음부터 세상의 시선을 각오하고 마치 사탕의 맛을 고르듯 젠더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문화의 힘이란 일단 실감하면 참으로 막강한 것이다.
이건 정치체제와 별개로 어느 사회건 사회라면 존재하는 과학적 진실이라고 본다.
인간은 사회가 있어 생존하지만 동시에 사회가 있어 고통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이치와 진실을 알고 좀 더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개인적 관점이다.
2.
솔직히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마거릿 대처와 마찬가지로 약간 골 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이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 편견을 극복하면서 그 자리에까지 갔으면서도 자신과 결이 다른 사회적 약자 정확히는 성소수자에 대해 혐오한다.
물론 다카이치 총리가 계층과 젠더의 벽을 넘은 건 사실이다.
이 점에서 더 납득하기 어렵다.
마거릿 대처의 경우에도 이 점은 마찬기지인데, 비록 지역 유지였긴 하지만 중산층 출신의 여성 보수당 대표는 영국에서 그전까지 없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대처의 경우 1960년대의 ‘관대한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그런데 1980년대면 아직 20세기니까 그럴 수 있다 쳐다 지금은 그보다 한참 지나 새천년이 시작되고도 무려 25년이 지난 후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는 꽤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아무리 자민당이라고 하더라도, 다카이치의 입장은 세습 정치인인 이시바 시게루나 기시다 후미오보다 더 보수적이다.
물론 계층이라는 것이 반드시 성소수자에 관한 입장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계층이 아니더라도, 다카이치는 헤비메탈이라던가 오토바이 등 젠더적 편견을 깨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상당히 ‘터프’한 리더십을 구사하는 측면도 있어 남성적인 면모도 있다.
그런 점이 일본 국민들의 매력을 끌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본인이 여성 질환 관련해서 수차의 수술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불임이 되었다고 하는데, 불임 여성을 포용하는 사회를 희망한다고도 했었다.
분명한 건 이 여성이 일본의 전통적 여성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게 살아 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어쩌면 일본이 개인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을 가로질러 한편으로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에의 통합을 강조하는 와(和)가 국민 정신이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다시 말해,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건 거기에 간섭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건 다른 차원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다카이치 총리가 마음을 열기를 바란다.
적어도 기시다나 이시바 내각 정도만 되더라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