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일 정확히는 어떤 목표를 위한 기획이나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때에는 여러 사람 정확히는 기능과 역할이 필요하다.
이전 장의 소하가 운영자(Administrator)였다면, 이번 장의 진평 陳平, ?-.B.C.178 은 전략가(Strategist)에 가까워 보인다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흔히 초한쟁패기의 전략가라고 하면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량 張良을 많이 떠올린다.
사료를 보면 장량과 진평은 비슷한 스탠스 같지만 차이도 분명해 보인다.
장량이 자신에 대해 한 언급 중에 ‘제자사(帝者師)’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임금된 자의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장량은 초한쟁패기의 중요한 순간에 유방에게 조언을 하거나 한에 이로운 선택과 행동을 많이 해 주었지만 구체적인 군무(軍務)나 행정을 깊이 맡아 본 일은 거의 없다. (대체로 사료에선 장량이 몸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고 언급한다)
한편 진평은 전형적인 책략가, 전술가, 공작가이다.
항우의 명을 받아 은을 토벌하거나 유방의 명으로 장수들을 지휘하고 군주 곁에서 구체적인 정략(政略)을 내놓는 역할을 많이 맡아보았으며 통일 후에는 재상으로서 행정가의 역할도 했다.
후술하겠지만, 행정가로서의 진평은 또한 행정가가 메인 역할이었던 소하와도 약간 차이점이 보인다.
개인으로서 진평의 삶은 낮은 곳에서 시작해 자신의 역량을 살리고 생존하기 위해 나아가 국가를 위해 계속 책략을 내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진평은 가난한 집안 배경에서 형의 부양을 받으며 독서를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미 범상치 않은 책략가의 기질이 엿보인다.
진평은 출세하기 위해 몇 가지의 중요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지역의 부자였던 장씨 가문에서 여러 번 남편을 잃은 여성에게 장가를 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형에게 부양받는 그의 평판이 좋지는 못했고 그러자 그는 이미지 개선을 위해 동네의 장례에서 상가의 일을 열심히 돕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를 장씨 가문의 당주인 장부가 눈여겨보았다. (사료에서는 진평이 ‘일부러’ 그랬다고 기록했다)
또 장부가 진평을 따라가 보니 그의 집에 장로(長老)들이 많이 드나든 흔적을 수레바퀴 자국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장로란 지역의 유지나 현인, 선비 등을 이르는 말로서 비록 진평이 평판이 좋지 않을지는 몰라도 지적 역량만큼은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평의 인격적 특징은 평생 그를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따라다녔다.
말하자면 ‘평판은 그닥인데 능력이 좋은 사람을 쓸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반대로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된다.
진평이 혼인하고자 한 여성의 할아버지였던 장부는 진평을 눈여겨보아 아들이자 여성의 아버지가 되는 장중이 다소 회의감을 표했음에도 결국 혼인을 밀어붙인다.
지역 유지이자 부자인 장씨 가문에 장가들자 진평의 인맥과 경제적 지반은 자연히 넓어졌고 출세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처음에 출세할 때 진평은 위왕 구를 섬겼는데 그가 진평의 계책을 듣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모함을 받자 결국 진평은 그를 떠났다.
그 후 진평은 항우에게 귀순했는데 항우는 그의 도움으로 진秦을 완전히 멸하였고 또한 그로 하여금 장수들을 지휘하게 하여 은(제후국)을 토벌하게 하였다.
은 토벌이 성공하자 항우는 진평에게 포상했는데 그 후에 한이 은을 침공하자 항우가 노하여 진평을 비롯한 은 토벌전 책임자들을 벌하려 했고 이를 두려워한 진평은 결국 잠행으로 도주한다.
이때 생명이 위험한 순간이 한 번 있었는데 이때에도 진평의 기지와 책략가적 기질이 발동한다.
진평은 키가 크고 잘생긴 외모를 지녔는데, 도망칠 때 강을 건너려 하자 뱃사공이 이를 보고는 그가 장수일 것이고 재물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탈취하려고 했다.
진평이 이를 눈치채고 알몸으로 뱃일을 돕는 모습을 보이니 사공이 진평에게 재물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위왕이나 항우의 막하에 있을 때의 진평의 시련은 앞서 언급한 진평의 인격적 특징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재능은 뛰어난데 평판이 좋지 못한(그것이 꼭 자신의 탓은 아닌 경우(가난)도 있었고 본인이 능력이 너무 뛰어나 남들의 시기를 산 탓도 있었다) 인재의 불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진평은 결국 최종적으로 한왕 유방에게 귀순한다.
유방은 진평과 대화해보고 그의 역량을 높이 사 즉시 그가 초에 있을 때와 같이 장수들을 지휘하게 했는데 이에 대해 무장들이 ‘귀순한 지 하루 만에 원로 장수들을 지휘하는 일을 맡기다니’라는 취지로 투덜거렸다.
결국 주발과 관영이 진평에 대해 비난하는 취지로 한왕에게 아뢰면서 진평은 또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들의 요지는 진평이 고향에 있을 때 형수의 물건을 훔치고, 여러 번 주인을 바꾸어 섬겼으며, 한에 귀순해 장수들을 지휘할 때 금을 받고 그 양에 따라 좋은 보직과 나쁜 보직으로 인사를 했으니 진평은 겉은 잘 생겼지만 속 빈 강정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유방이 처음에 진평을 유방에게 연결해 준 위무지를 불러 질책하면서 그 말들이 사실인지를 묻자 위무지가 답하기를 사실이라 하였다.
그러자 다시 유방이 그런데도 어찌 진평을 어진 인물이라며 추천했느냐 하니 위무지가 자신이 말한 것은 ‘능력’이고 대왕이 물은 것은 ‘행실’이라고 답했다.
초한 대치 상황에서 만약 행실이 좋더라도 무능하다면 무의미하지만 유능하다면 행실이 다소 나쁘더라도 써야 한다는 취지로 위무지는 변론하였다.
계책이 나라에 이롭다면 쓸 뿐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 형수의 물건을 훔쳤다느니 뇌물을 받고 인사를 했다느니 하는 것은 의심할 근거가 없다는 취지로 말하였다.
유방은 진평을 불러 묻기를 그대가 주인을 여러 번 바꾸어 섬겼는데 신의라는 것이 그리 변덕스러우냐 하고 따져 물었다.
진평의 변론 취지는 자신이 아닌 자신이 모신 주인들을 보라는 것이었다.
위왕과 항우는 모두 자신을 제대로 쓰지 않고 도리어 의심했고 한왕(유방)이 인재를 알아보고 잘 쓴다기에 단신으로 왔다고 진평은 아뢰었다.
그러면서 작전과 공작 등을 위해서는 활동비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금을 받은 것이며 계책 가운데 쓸만한 것이 없다면 금을 모두 몰수하고 자신을 해임하라 아뢰니 유방이 사과하고 진평을 본 직무로 복귀시켰으며 장수들도 더는 말하지 못했다.
진평의 책략은 초한쟁패라는 보다 거시적 차원으로 옮겨 가는데, 유방이 위기 상황에 있을 때 구원해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초를 붕괴시키는데 진평의 계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양성 포위전 때 성에 갇힌 유방은 땅을 나누는 대가로 타협을 할 것까지 생각을 하면서 진평에게 천하의 혼란이 언제 종식될 지를 물었다.
이때 반간계(反間計)를 제안한 진평의 답변은 책략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그 정수라는 것은, 책략을 고안하려면 인간의 본성과 성격, 역학 관계 등에 대한 통찰이 깊어야 한다는 점이다.
행위 주체들과 관계적 맥락 및 상황 등에 대한 사실판단이 정확하지 않으면 그에 전제한 전략적 판단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추어 보면 진평의 전략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진평이 답하기를, 항우는 선비들을 아끼지만 동시에 포상이 박하므로 곁에 사람이 별로 없고 대왕(유방)은 사람이 거만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든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믿을 만한 측근이 별로 없는 항우의 약점을 이용하여 군신 간을 서로 틈을 벌려 놓아 내분시켜 무너뜨리자는 계책 즉 반간계를 제안하게 된다.
유방은 이를 위한 비용 금 4만 근을 내놓고 진평이 재량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진평은 이를 이용해 다음 두 가지 작전을 시행한다.
초군이 황금을 뿌리면서 종리매 등 항우의 측근들은 끝내 제후에 봉해지지 못할 것이어서 그들은 차라리 한과 합해 초를 멸하고 땅을 나누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항우는 의심을 품었다.
또 초군의 핵심 브레인인 범증을 제거하기 위해 초의 사자가 왔을 때 처음에는 융숭하게 대접하다가 초의 사자라는 말을 듣고는 범증의 사자인 줄 알았다며 놀라는 척을 하고는 곧 초라하게 대접하였다.
초의 사자의 보고를 받은 항우는 범증이 한과 내통하는 것인지에 대해 더 깊이 의심을 품었고 영양성을 들이쳐야 한다는 범증의 조언을 무시했으며 범증은 분노하여 결국 사직하고 귀향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범증은 귀향길에서 등창이 터져 사망했는데, 사실 인과의 연쇄를 따진다면 진평이 항우의 손을 빌려 간접적으로 범증을 죽인 것과 매한가지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앞서 진평이 처음 반간계를 제안할 때 진단한 한의 상황은 의미심장하다.
어떻게 보면 한의 신하들과 군신 관계의 미묘한 긴장의 근원을 설명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의 주요 공신들을 보면 인품이 순수하게 고결하면서 능력까지 뛰어난 사람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굳이 찾자면 왕릉王陵 정도가 있기는 한데, 인품과 능력을 모두 갖추었지만 결국 현실 내지 정무 감각의 부족으로 끝이 좋지 못했고 사실 독자에 따라서는(정확히 말하면 나는) 답답하다고 느꼈다.
한신이나 진평은 세간의 평이 그렇게 좋은 인물이 못 되었다.
그들의 주군인 고제는 앞서 진평의 언급도 그렇고 대체로 대놓고 신하들에게 ‘인망과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며 거만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용인술이 뛰어나긴 했지만 인격이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흔히 좋은 인격과 용인술이 연결되는 촉한의 창건자 유비와 유방의 차이를 보여준다고도 생각한다)
또 소하, 진평, 번쾌, 심지어 장량 등 대개의 공신들은 통일 전후 내내 고제와 미묘하게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유지했다.
고제가 상시적으로 신하들을 의심한 탓이었으며 또한 다수 공신들은 겉으로의 생각과 속으로 품은 마음이 다른 경우들이 매우 많이 보인다.
고제가 ‘인격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면 대업을 성취할 최종 승자가 되지 못할 것 같은데, 세상사는 사실 인격이 아닌 군신 간 상호 필요와 능력만으로도 성취될 수도 있다는 점을 한의 통일과 건국 과정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아가 제국을 계속 지속하게도 했다.
순수한 신뢰보다 필요나 능력에 대한 인정에 기초한 합리적(?) 신뢰가 더 오래 간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다.
진평은 이후에도 계속 여러 계책을 낸다.
개중에는 밖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일들도 많아 사료에선 그가 낸 계책의 상당수가 세상에는 비밀로 부쳐졌다고 언급된다.
예컨대 유방이 영양성에서 탈출할 때 진평이 낸 계책은 한쪽 성문으로 미녀 2,000명을 내보내 초군의 시선을 끈 다음 반대쪽 문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또 통일 후 백등산에서 흉노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에는 흉노 선우의 왕비를 구슬려 포위를 풀고 빠져나오는 계책을 냈다.
통일 후에 진평의 활약은 군략에선 여러 반란을 토벌할 때, 그리고 더 부각되는 것은 정략이다.
이 측면에 있어 진평은 매우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단기적 선택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의심받지 않도록 계속 겸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체적인 예들은 통일 후 진평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신이 제를 멸하고 제왕을 칭한 후 유방에게 추인을 요청했을 때 유방은 진노했다.
한신의 사자가 왔을 때 유방은 열이 뻗쳐 그에게 한바탕 퍼부으려고 했으나 진평은 재빨리 유방의 발을 밟아 진정시켰고 유방은 사자를 후하게 대접하고 나아가 장량을 파견해 정식으로 한신을 제왕에 봉한다.
통일 후에 이미 초로 봉지를 옮긴(멸망한 초로 봉지를 옮겼다는 것은 이미 한신에 대한 박대의 시작이었다) 한신의 모반이 고발되었다.
장수들은 서둘러 한신을 치자고 하였으나 진평은 우선 사태 분석을 했다.
한신의 반역 소문을 아는 자가 있는가? 없다.
한신 본인은 아는가? 모른다.
우리의 병력 정예도가 한신의 초에 미치는가? 아니다.
우리에게 한신을 이길 지휘관이 있는가? 없다.
결국 명분이 애매하고 한신과 전면전을 펼쳤을 때의 승산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신을 토벌하겠다며 섣불리 군사를 일으키면 결국 한신의 자립만 돕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진평은 더 미시적이고 정략적인 계책을 내놓았는데, 천자가 남방을 순시한다는 명목으로 초의 서쪽 경계인 진에 제후들을 모으면 한신이 의전상 나오지 않을 수 없으니 그때 바로 체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공하여 한신은 나오자마자 바로 체포된다. (후에 죽을 때에는 소하의 계책에 당했는데, 한신은 군략에는 능하면서도 정략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영포의 난을 토벌하면서 고제가 부상을 입어 병이 악화된 상태에서 장안으로 귀환하는 중에 연왕 노관의 반역 소식이 들려왔다.
고제는 번쾌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게 했는데 번쾌에 대한 참소가 들어왔다.
고제가 노하여 진평으로 하여금 주발과 더불어 가서 바로 군권을 회수하고 번쾌를 참수하라 명하였다.
이를 받들어 주발과 진평이 함께 가는데, 번쾌는 황제의 오랜 친구이며 전공이 많고 그의 부인인 여수가 바로 여후의 동생이니 황제가 당장은 성이 나서 그를 죽이라 했지만 곧 후회할 수도 있으니, 일단 체포하여 장안으로 압송해 황제 스스로 죄를 다스리게 하자고 합의한다.
이는 실현되었고 번쾌는 곧바로 압송되었으며 주발이 노관의 난을 평정했다.
고제의 명을 받든 것이었지만 진평은 번쾌에게 망신과 불이익을 안긴 셈이었고 이에 번쾌의 부인이자 여후의 동생인 여수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 여수는 계속해서 여후에게 진평을 모함하고 참소했다.
이것이 진평에게는 계속되는 정치적 리스크이자 인생의 시련으로 작용했다.
진평이 돌아오는 길에 고제의 붕어 소식을 들었는데 여후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까 염려했는데 관영과 더불어 영양성에 주둔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진평은 곧바로 궁으로 달려가 곡을 하고 상여 앞에서 처리한 일에 관하여 아뢴다.
그러자 여태후는 별말 없이 진평에게 물러가 쉬라고 명하였고 진평은 나아가 참소가 미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아예 궁에서 당직을 서고 황제를 호종하는 업무를 자임한다.
여태후는 다음 황제인 혜제 유영을 가르치는 업무를 진평에게 맡겼고 여수와 진평을 함께 불러 진평을 의심할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소하의 뒤를 이은 조참이 사망한 후에 여태후는 왕릉을 우승상, 진평을 좌승상에 봉하였다.
혜제에 이어 전소제와 후소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여태후는 아예 본인이 사실상의 군주로 거듭나는데 결정적으로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왕으로 봉하고자 하여 재상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왕릉은 곧이곧대로 이미 고제가 유씨 이외에는 왕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맹약을 했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언급했고 진평과 주발은 문제없다고 답한다.
조정에서 나오며 왕릉이 두 사람을 책망했지만 진평은 자신의 행보의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조정에서 시비를 따지는 일에서는 내가 그대만 못하나, 유씨 사직과 국가를 온전히 보존하는 일에서는 그대가 나만 못하다고 답하였다.
사료에서도 대놓고 진평이 여씨를 왕으로 세우는 일을 단지 ‘따르는 체하였다.’라고 언급한다.
여씨를 왕으로 세우는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여태후의 눈 밖에 난 왕릉은 결국 한직으로 밀려나고, 여후의 측근이자 실세인 심이기와 진평이 각각 좌승상과 우승상이 되었다.
여태후 사후에 태후의 조카들인 여산과 여록이 각각 상국과 상장군이 되어 정권과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대신들과 제후왕들이 자신들을 꺼림을 알고 그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고제의 손자인 유장이 여록의 사위로서 이를 미리 알고 형 유양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유장은 주발, 진평과 합세하여 여씨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여산과 여록은 대장군 관영을 파견해 유양을 치게 하였는데 관영은 도리어 유양과 연합을 도모해 여씨에게 변고가 생기면 함께 토벌하자고 결의했다.
당시 주발이 맡고 있던 태위는 본래 군권을 담당하는 재상이나 실질적으로는 상장군인 여록이 이를 틀어쥐고 있어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주발과 진평은 모의하여 여록의 친구인 역기의 아버지 역상을 협박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여록에게 태후가 붕어하고 황제가 어린데 그대가 중앙에서 병권을 쥐고 있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속히 태위에게 병권을 반납하고 수도를 나가 번국을 지키는 것이 옳으며 상국 여산도 마찬가지로 하도록 함이 타당하다고 말하도록 하였다.
여록은 이 말이 타당하다 생각해 여씨 가문에 알렸으나 의견이 갈려 결론을 내지 못했다.
조참의 아들인 조굴이 제(제후국)에서 온 가수라는 사람이 여산을 꾸짖는 말을 들었는데 내용인즉 여산이 진즉에 자신의 제후국으로 귀환했어야 했는데 이제 늦었으며 이미 관영이 제, 초와 합종하려 한다는 정황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조굴은 그 말을 진평과 주발에게 고하였고, 상황이 급해지자 주발은 북군(수도방위군)을 지휘하려 했으나 권한이 없어서 결국 거짓 전령을 보내 주발을 북군에 들도록 하였댜.
주발은 다시 역기 등을 보내 여록에게 이미 황명으로 북군의 군권이 주발에게로 옮겨졌으며 떠나아 한다고 압박했다.
결국 여록은 병권을 주발에게 넘기게 되었는데, 아직 남군(황궁수비군)이 남아 있어 승상이었던 진평이 유장을 호출해 주발을 보좌토록 하였다.
주발은 여산을 미앙궁으로 들이지 못하도록 하였고, 여산은 북군을 동원해 공신 등을 제거하려 했으나 궁문이 열리지 않아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주발은 주살을 명하진 못하고 유장에게 다만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호위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유장은 결국 궁문 앞에 있던 여산을 보고 공격하고 추격해 살해했다.
다음 날에 여록, 여수 등을 비롯한 여씨 일문을 멸족하였고 후소제와 제천왕, 회양왕, 항산왕은 모두 혜제의 친자가 아니라고 하여 그들도 모두 살해한 후에 고제의 아들인 대왕 유항을 옹립하였다.
기본적으로 여씨 일족의 권세는 여태후 한 사람의 권위에 의지하는 면이 컸고 여태후가 이를 구조화 또는 제도화하기 위해 즉 자기 사후에도 쉽게 이를 뒤집을 수 없도록 하지 못했고 하지 않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결국 공신 세력이 상당한 명분과 지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여씨 가문의 권세가 여태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여태후가 없으면 여씨 가문이 기댈 곳도 없어져 권력의 기반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평은 일찍부터 언젠가 분명히 그 틈이 생길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결국 이는 들어맞았다.
진평의 입장에선 왕릉처럼 당장의 의(義)를 주장하다 결국 실질적으로 밀려나 유씨 사직이 기댈 곳이 더욱 없어지게 하기보다는, 우선 여씨 정권을 인정해주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공신들의 지분을 확보한 후에 나중에 기회를 보아 여씨들을 토벌한다는 장기 전략을 세워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평의 이미지는 흔히 소하(‘행정가’)나 장량(‘멘토’, ‘전략가(거시적 책략가)’)과 구분해 ‘책략가(미시적 책략가)’이다. (장량이 천하의 판세를 읽는 ‘거시적’ 전략가라면 진평은 구체적 상황에서 군략과 정략을 내는 ‘미시적’ 전략가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물론 양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기의 진평은 재상 즉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두드러져 보이며, 그 새싹은 이미 그의 젊은 시절부터 뚜렷하게 드러났다.
진평이 젊은 시절에 마을에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사 음식 분배를 맡은 관리가 되어(宰) 고기를 고르게 나누니 마을 노인들이 그를 칭찬했는데 이에 진평이 ‘내가 천하를 재(宰)한다면 고기 나누듯 이렇게 고르게 하겠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황로학(삼황오제 중 황제와 제자백가 중 노자의 사상)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대개 도가정치사상의 요체는 ‘무위지치(無爲之治)’에 있으니, 그 스스로가 옹립한 문제 앞에서 주발과 더불어 재상의 직분에 대해 논하는 장면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문제는 맨 처음에는 국정을 잘 몰랐으나 점점 능숙해져 가며 재상들을 평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에 주발에게 천하에서 1년에 판결이 나 종결되는 형사사건이 얼마냐 물었는데 주발이 모른다고 하였고 다시 천하에서 전곡(세입)의 1년 출납이 얼마냐 물으니 역시 모른다고 하였는데 이때 그는 땀이 등을 적실 정도로 부끄러워하였다.
문제가 마찬가지 질문을 진평에게 하니, 진평이 답하기를 각기 맡은 담당 관서와 관직이 있다 하였다.
이에 문제가 묻기를 그렇다면 그대가 맡은 바는 무엇인가 하니 진평이 사양하며 답하기를 ‘신이 그 주신(主臣)으로서 재상이란 위로 천자를 도와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 만물의 마땅함을 이루게 하고 밖으로 사방 오랑캐와 제후를 어루만져 다스리며 안으로는 백성을 친애하여 아울러 경대부로 하여금 각기 그 직분을 다하게 하는 자’라고 답하니 문제가 칭찬하였다.
진평의 재상에 관한 철학은 관자(管子)에 나타난 재상에 관한 철학과도 유사성을 띠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사상은 현대의 정무직 리더십(대통령, 국무총리 등)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다른 무엇보다 국정감사나 대정부질문 등에서 국회의원들이 국무총리나 국무위원들을 다그칠 때 구체적 지표의 알고 모름의 여부를 유용하게 써먹는데, 실은 이것이 그렇게 타당하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진평이라는 ‘구체적 수치나 지표를 모르는 명재상’의 존재 자체가 ‘(최소한 일반적인 경우) 유능한 정무직 리더십을 지니고 발휘하는 자는 구체적 수치나 지표를 잘 알고 있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헌법 제86조 제2항에 따르면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統轄)’한다고 되어 있다.
통할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거느려 다스린다’라는 것이다.
이는 진평의 ‘위로 천자를 돕고 아래로 만인을 조화롭게 한다’라는 사상과 현대적 차원에서 일맥상통한다.
정무직의 리더십이란 관료제의 위계 구조에서 맨 위에 있는데, 이 구조는 아래로 갈수록 구체적인 직무가 정해져 있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위로 갈수록 그 직무는 점점 추상적으로 되어 가며, 행정은 점점 정치와 구분이 모호해지고 동시에 과학(Science)보다 기술(Art)의 영역이 된다.
여러 구체적 전문 분야를 한 사람이 전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리고 개별적인 기술적 분야 예컨대 경영이나 의학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규제하거나 지원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관련 행정과 정책에 대해서도 잘 운영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 꼭대기로 올라가면, 과학적 지식이나 구체적 수치를 많이 안다고 해서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와 같은 정무 고위직을 잘 수행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과 거시적 흐름과 추세를 잘 파악하여, 그러한 맥락 하에 현재 정부와 공공리더십의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아는 유연성과 판단력이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리더십이 대개 1인 기관으로서 개인의 성격이나 인격과 불가분이라는 점과도 조응한다.
어떤 사람은 리더십을 잘 발휘하고 유지하지만, 어떤 사람은 발휘는 하지만 유지는 못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발휘를 잘 못함에도 희한하게도 유지는 잘 하기도 한다.
이는 개인의 인격과 기질이 구체적인 맥락과 흐름과 합쳐져 만들어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진평의 책략가적 기질은 그 자신의 세심하며 눈치가 빠른 성격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는 몇 가지 장면에서 확인된다.
예컨대 앞선 주발, 진평과 문제와의 문답 후에 나오면서 주발은 어찌 그것을 내게 알려주지 않았느냐 진평에게 따졌지만 진평은 웃으며 ‘그대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그 임무를 몰랐는가? 만약 폐하께서 장안의 도적 수를 물었다면 억지로라도 대답하려 하셨겠는가?’ 하였다.
본래 여씨 토벌과 문제 옹립의 거시적인 전략(기회를 보다가 일거에 제압한다)은 진평이 수립한 것이지만 병력의 동원 등 구체적 실행은 대개 주발이 주도했던 것이었기에, 진평은 처음에 주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자 칭병하였다.
이에 문제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진평이 ‘고제 때에는 주발의 공이 신만 못하였으나 여씨 주벌 때에는 신의 공이 또한 주발만큼 못하였으니, 이에 재상직을 주발에게 양보하려 한다’하니 문제가 주발을 우승상으로 봉하며 1위로 두고 진평을 좌승상으로 봉하며 2위로 두었다.
후에 앞서 언급한 문답과 대화가 있은 후에 주발은 자신의 역량이 진평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칭병하며 사직하였고 진평은 최종적으로 전권을 지닌 승상이 되었다.
조참 사후 여태후 집권기부터 문제 초에 이르기까지 진평은 대개 계속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여태후 집권기 때에는 심이기의, 문제 초에는 주발의 뒤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그것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처신과 안배가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이에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고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결정적으로 공헌한 유씨 왕조와 자신의 보신을 모두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한계와 업보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에는 여러 번 그의 계책들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예컨대 백등산 포위전 때 선우의 왕비에게 환심을 사 탈출한 일이 그러했다.
그러나 한족 왕조가 이민족에게 패배도 모자라 굴욕을 감내해가며 탈출해야 했던 일은 세간에 전해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한동안 고제의 후손들은 여전히 그 창업자와 같이 흉노의 자부심을 그냥 방관해야 했다)
또 본질적으로 모사(謀事)란 순리를 거스르거나 뒤트는 측면도 많이 존재한다.
이를 의식한 듯 진평은 ‘나는 음모가 많으니 이는 도가가 금하는 바다. 우리 집안이 장차 쇠미해져도 그뿐이지 끝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니 이는 내가 음흉한 꾀를 많이 부린 탓이다.’ 하였다.
그의 증손자 때 남의 아내를 탈취한 죄로 봉작이 박탈되었으며 결국 이는 진평의 후손들에게 영영 이어지지 못했다.
자손이 끊어지더라도 계속 찾아가며 봉작을 이어주었던 소하와는 다른 결인데, 소하와 진평이 서로 다른 역량(행정과 책략)을 가지고 성공했음을 생각하면 묘하다.
반고는 찬하기를 진평의 뜻은 이미 일찍부터 마을 사당에서 드러났으며, 여러 주군들을 거쳐 종국에는 한에 귀의하여 책략의 신하가 되었고 일이 뒤얽혔으나 마침내 스스로 화를 면하게 생을 마쳤다고 하였다.
사료) <사기> 진승상세가, <한서> 장진왕주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