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權臣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권세 있는 신하’를 의미한다.
기본적으로는 군주에게 권한이 있는 군주정에서는 권신은 다소 이례적인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는 설령 예컨대 어린아이가 군주가 되더라도 대개의 경우 이전 군주의 황후 등이 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게 되는 등의 수순을 밟게 되기 때문이다.
외척 가문이 발호하는 것도 원칙상 당연히 금지된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주제가 강하고 정교하게 자리 잡은 중국의 경우에도 이러한 원칙들이 쉽게 적용되기 어려웠다.
특히 고대와 중세의 경우 구품중정제(구품관인법) 시행 전까지 대개 지방관이 지역의 인재를 추천하는 등의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들을 충원했는데 이는 문벌귀족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문벌귀족들은 인적 연결망만이 아니라 당연하게도 황후를 배출하여 권세를 강화하였다.
여성이 통상적으로 정치에 나서는 일이 없었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할 때 아무리 정치적 야심이 강한 이라도 결국엔 자기 친정의 도움을 받는 일이 상당히 많았고 외척들은 그렇게 권력을 키워나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전근대 중국은 상당 기간을 국(國)과 가(家)의 공존과 공치(共治)로 운영되었다.
그중 맨 처음에 놓을만한 인물이 바로 곽광 霍光, ?-B.C.68이다.
곽광은 온전히 혈연에만 기대 성공한 경우가 아니며,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였으며 동시에 대체로 거기에는 항상 명분이 있었다.
곽광은 전한 세종 무제 때의 명장 곽거병의 아우인데, 두 사람은 이복형제였다.
두 사람의 아버지 곽중유는 처음에 경제(景帝, B.C.188-B.C.141, 재위 B.C.157-B.C.141)의 딸인 평양공주의 집안에서 일하던 시녀 위소아와 곽거병을 낳았고, 그 후에 부인을 맞아 곽광을 낳았다.
위소아의 동생 위자부는 무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었는데(무사황후), 곽거병은 황후의 조카로서 역시 총애를 얻었다.
곽거병은 출세한 후 뒤늦게 아버지와 재회하면서 장안으로 귀환할 때 곽광을 데리고 갔다.
10대였던 곽광의 출세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곽광은 대개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는 곧 그가 내조(內朝)에 속함을 의미하였다.
통상 조정이라 하면 승상 등 삼공구경으로 알려진 외조(外朝)를 떠올리고 황제의 비서실과 같은 위상과 기능을 하는 내조는 단지 보조기관 같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재상이나 외조 주요 고위관료들의 소속 문벌 가문을 견제하려는 등의 목적 그 외 기본적인 친위/측근 세력 형성 등을 위하여 힘을 실어주며 내조의 힘은 점점 커져 갔다.
곽광은 매우 조심스럽고 실수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사람됨이 신중하고 침착하여 매번 전각의 아랫문을 드나들 때 멈추고 나아가는 자리가 늘 정해져 있었고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무제가 신하들을 대하는 태도에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러우며 가혹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무제의 곁에서 이렇다 할 실수 없이 계속 있으면서 동시에 황제의 신임까지 얻어냈던 것을 보면 곽광의 처세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제는 곽광을 매우 신임하였고 주공이 성왕을 업고 제후들을 만나보는 그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하필 역사적으로 큰 칭송을 받은 섭정을 다룬 그림을 곽광에게 하사한 것은 이미 무제의 내심에 곽광에게 후사를 부탁하려는 의미가 일찍부터 있었음을 시사한다.
무제가 위중해지니 곽광이 곁에서 후사를 어찌할지를 묻자 무제는 그림을 하사한 일을 언급하며 그대가 주공과 같이 하라고 말하였다.
곽광은 사양하며 자신이 김일제만 못하다 하였고 군공이 많고 역시 무제의 신임을 얻었던 김일제는 자신이 외국인이어서 곽광만 못하다고 하였다.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김일제를 거기장군으로, 상관걸을 좌장군으로, 상홍양을 어사대부로 삼아 고명대신이 되어 어린 후계자를 보필토록 하였고 그 명이 내린 다음 날에 무제가 붕어하고 8세의 태자 유불릉(소제 昭帝)이 즉위하였다.
또 무제 생전에 곽광, 김일제, 상관걸은 함께 마하라와 마통의 반역을 진압하였는데 이 공적이 정식으로 기록되지 않았다가 무제의 유조를 통해 공개되면서 동시에 곽광을 박륙후博陸侯로, 김일제를 도후, 상관걸을 안양후에 봉하였다.
김일제는 무제 사후 이듬해에 사망했기 때문에, 곽광이 제일의 반열에서 단독으로 사실상의 섭정이 되어 국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대사마는 군권을 총괄하는 재상으로서 태위와 비슷했는데 대장군보다 위에 있었다.
무제 때 위청과 곽거병이 대사마를 장군직에 더하여 붙여주면서 탄생한 직위이다.
이로써 곽광은 기존에 장악한 내조 + 무제의 고명대신 + 대사마 대장군으로서 군권을 총괄하며 외조를 사실상 통제하는 막대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때 시중 왕홀이라는 사람이 떠들어 말하기를 자신이 늘 황제의 곁에 있었는데 어떻게 세 사람을 봉작하라는 유조가 있었겠느냐, 어린 것들이 서로 끌어올려 귀해진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러자 곽광이 노하여 왕홀의 아비 왕망(뒤의 신 황제 왕망과는 다른 인물)을 크게 꾸짖었고 결국 왕망은 아들 왕홀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곽광의 권세가 이와 같았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를 전횡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만약 왕홀이 보다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일단 그 조서의 효력은 유지되는 것이고 그 원천은 황제권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왕홀이 떠들고 다닌 일은 실은 무제를 모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형식적으로 위조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어린 것들’이라는 표현을 보면 세 사람이 작호를 받을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무제는 별것도 아닌 신하들을 공신으로 삼을 정도로 어리석은 군주가 되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보면 곽광에게도 명분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떠들고 다닌 것만을 가지고 곽광이 직접 벌하면 명분상으로나 모양새로나 좋지 못하므로 결국 아비에게 협박해 자식을 독살하게 만든 데 이른 것 같다.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곽광의 냉혹한 일면을 보여준다.
권력의 정점에 올랐지만 곽광은 아직 상대해야 할 적들이 많았다.
상관씨 가문은 상당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곽광과 충돌했다.
앞서 언급된 좌장군 상관걸은 소제의 누이를 통하여 아들 상관안의 딸 즉 자신의 손녀를 후궁으로 들이도록 하였고 그는 몇 달 뒤 황후가 되었다(효소황후).
이에 아버지 상관안은 표기장군으로 임명되고 상악후로 봉해졌다.
황후의 조부인 상관걸은 자연히 권세가 더욱 커져 곽광이 휴가로 궁을 비울 때 상관걸이 곽광 대신 입궁해 정무를 결재하였다.
곽광과 상관걸은 사돈 지간이었다.
곽광의 장녀가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상관걸과 곽광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곽광은 단독 고명대신/섭정이라는 점에 더불어 황후의 외조부가 되면서 더욱 권력이 강해졌다.
상관걸 부자는 무제의 딸이며 소제를 양육한 개장공주의 총애를 받았는데 개장공주는 정외인이라는 외간 남성을 사실상의 첩으로 두었다.
상관걸 부자는 개장공주에게 더욱 아부하여 권세를 강화할 생각이었는지, 제후가 공주와 결혼하던 관례를 염두에 두고 정외인에게 봉작을 내리려 했는데 곽광이 이를 거부했다.
또 정외인에게 광록대부(조정의 고문)를 제수하여 소제를 알현토록 하려고 했는데 곽광은 이 역시 불허했다.
이에 공주가 곽광을 원망하고 상관걸 부자는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사실 상관걸은 본래 무제 때부터 고위 장군으로서 지위가 곽광보다 높았다.
그런데도 곽광이 국사를 전결하니 불만이 많았다.
일찍이 무제는 무고의 화(巫蠱-禍)로 여태자 유거를 죽게 하는 등 자식들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못하다가 최종적으로는 그 어미 구익부인 조씨를 죽이고 어린 유불릉에게 제위를 잇도록 하였다.
이전 여태후의 일도 있고 했으니 외척의 발호에 대한 강한 경계였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외조에 있으면서 군권도 쥐고 있는 상관씨 가문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으며 내조의 최측근인 곽광에게 섭정을 맡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소제의 형 중 연왕 유단은 유불릉으로의 제위 계승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개장공주, 상관걸, 상관안, 유단, 그리고 상홍양은 모의하여 곽광에 대한 사실상의 탄핵 상주문을 올리게 된다.
참고로 상홍양은 이름이 알려졌다면 알려진 이인데, 그 이유는 무제 때의 술/소금/철 전매제 실시를 주도한 <염철론>의 저자이자 관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의 처신은 그렇게 좋진 못했는지(아니면 역사의 패자(敗者)라 일부러 더 과실을 부풀려 기록한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려우나) 공을 뽐내고 자식들에게 관직을 얻어 주려 하였는데 곽광이 그러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곽광에게 앙심을 품었다.
곽광에 대한 탄핵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
1. 도성 밖으로 나가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2. 길에서 잔치 준비를 하게 했다.
3. 대장군 장사 양창이 공도 없이 수속도위가 되는 등 멋대로 대장군부의 도위(참모, 지휘관 등의 지위를 지닌 관원)를 멋대로 늘렸다.
결론 – 이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곽광은 전횡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무언가 범상찮은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신 단(유단을 이름인데, 그의 명의로 올린 소였다)이 부새를 돌려드리고 궁중 숙위에 들어가 간신의 변고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올릴 시점은 곽광이 나간 날에 맞추어졌다.
첫째로 유단이 황제의 곁에서 황제를 꼬드기든지 해서 곽광을 최소한 실각시키고 둘째로 그러한 상황 조성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곽광이 자리를 비웠을 때 소를 올리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곽광이 휴가를 나가면 상관걸이 대행을 맡았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상관걸이 권한을 행사해 곽광의 탄핵을 하부 관청으로 내려 처리토록 하려 했으며 상홍양은 대신들을 동원해 곽광 파면의 여론 형성을 하려고 들었다.
그런데 14세의 소제는 탄핵을 내려 처리토록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곽광이 두문불출하고 입조하지 않자 소제가 곽광을 불렀고 곽광은 들어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다.
이에 소제가 ‘장군에게 죄가 없음과 그 글이 꾸며낸 것임을 아니 장군을 관을 쓰라’고 명하자 곽광이 '폐하께서 어떻게 그것을 아시냐'고 물었다.
이에 소제는 ;
1. 곽광이 인사를 전횡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막 인사를 조정해 10일도 되지 않은 일이었는데 외방에 나가 있는 연왕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2. 곽광이 정말 역모와 같은 것을 도모한다면 교위 하나를 가지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고 답하였다.
소제의 총명함으로 곽광은 지위와 권력을 그대로 보존하였고 이제 칼날은 반대로 이 탄핵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 향했다.
처음에 연왕 측에서 사주하여 왕의 명의로 상소를 올린 자는 도주하였고 조정에서 급히 그를 추포했다.
이에 다급해진 상관걸 등이 ‘자질구레한 일은 끝까지 캐지 마소서’라고 은폐하려고 하였으나 소제는 이를 무시했다.
이후에도 상관걸 등의 파벌은 곽광을 계속 공격했으나 소제는 듣지 않았고 이에 그들은 독자적으로 곽광을 암살하려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개장공주가 곽광을 초대해 복병을 두어 때려 죽인 뒤 소제를 폐하고 연왕 유단을 새 황제로 옹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은 발각되었고 곽광은 상관걸 부자, 상홍양, 정외인 일족을 모두 주살했으며 유단과 개장공주도 자살했다.
이후로 곽광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집권을 무탈하게 이어갔다.
곽광의 집권기에 두 번째로 큰 사건은 창읍왕 유하의 폐위와 중종 선제 유순의 옹립이었다.
소제가 붕어했을 때 후사가 없었는데 소제 이외에 무제의 아들 중에는 광릉왕 유서만 살아 있었고 이에 대신들은 유서가 후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제는 유서의 행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고 곽광도 유서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한 낭관이 ‘장자를 폐하고 어린 이를 세우는 것도 가할 수 있다.’라는 취지로 소를 올렸는데 곽광이 그를 발탁해 구강태수로 삼았고 창읍왕 유하를 옹립하기로 하였다.
유하는 당시 18세로, 무제의 아들 창읍애왕 유박의 아들 즉 무제의 손자가 되었다.
나이가 18세라면 고대에는 적절한 성년이기는 하지만 국정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곽광의 입장에선 좀 더 다루기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하는 황제가 된 뒤 많은 일탈행동을 보였고 곽광은 결국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곽광이 부하 전연년에게 물으니 폐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하였으며 전례가 있느냐고 곽광이 묻자 이전에 은의 이윤이 태갑을 폐하여 종묘를 안정시킨 것과 같은 일이라고 답하였다.
곽광은 전연년, 거기장군 장안세와 더불어 모의하였고 미앙궁에서 중신 회의를 소집했다.
곽광이 ‘창읍왕의 행실이 어둡고 문란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할까 두렵다.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자 신하들은 눈치만 보았다.
이에 전연년이 칼자루에 손을 얹고 대신들을 겁박하였다.
그러나 곽광은 이를 충언(忠言)이자 동시에 구경(九卿)을 대의한 말로 간주했다.
이는 전연년이 대사농으로서 구경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사전에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곽광은 대신들과 더불어 소제의 황후이자 태후가 된 효소황후 상관씨를 알현하여 폐위의 명분과 논의를 아뢰었다.
실권이 곽광에게 있는 상황에서 태후의 명이라는 것은 형식적 절차와 명분에 불과하였고, 태후는 궁문마다 ‘창읍왕(유하) 측 신하들을 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유하가 조정에 들어왔을 때 환관들이 태후의 명에 따라 황제의 측근들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습적 상황에 유하는 당황하였다.
내조로 들어오지 못한 유하의 신하들은 곽광의 지시로 장안세가 근위 기병을 거느리고 200여 인을 붙잡아 모두 옥에 가두었다.
또한 곽광은 ‘숙위를 삼가게 하라. 만약 뜻밖에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기면 내가 천하의 원망을 짊어지고 임금을 죽인 자의 이름을 뒤집어쓰게 된다.’라고 하였다.
숙위를 삼가라는 말은 숙위를 엄중히 하라는 뜻이고 이미 유하의 측근들이 모두 물리적으로 배제되었기에 이때의 숙위는 숙위가 아니라 감시였다.
태후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대신들을 불러들였으며 유하를 불러 엎드려 조칙을 받들게 하였다.
이때 곽광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고 상서령이 그 표문을 읽었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상례 위반 : 상주로서 슬퍼하지 않고 길 위에서도 고기 반찬을 먹음. 여자들을 의복 수레에 숨겨 역참(‘국가 차원의’ 관영 연락/교통망) 숙소로 반입하였으며 입궁 직후 사사로이 돼지와 닭을 사서 먹음.
2. 국가/절차 농락 : 황제의 인새(행차/명령에 사용하는 옥새)와 부절(금문 출입, 명령 전달 등에 사용하는 수단)을 선제(소제)의 영전 앞에서 받아 처소로 돌아가 봉인을 뜯고 방치. 부절을 무단으로 16개나 가져다 쓰며 측근들이 그것들을 번갈아들고 조문/의식에 출입.
3. 금궐 기강 문란 : 금문(후궁/내전의 문) 안으로 창읍왕 측 노비 200여 인을 들여 장난과 유흥을 즐김. 황제의 조서의 형식을 빌린 허위조서로 금과 여자들을 하사하도록 함.
4. 금악/음락 : 선제의 빈소 앞에서 군악대, 의장대 등을 동원해 음악을 연주토록 하고 광대가 연희를 부리도록 함. 소-양-돼지 세 짐승을 모두 희생하는 최고급 국가 제수를 사사로이 끌어다 연회에 씀.
어가 위용/수렵 남용 : 황제가 정식 행차할 때 쓰는 가마를 가져다 궁을 질주하고 멧돼지 싸움, 호랑이 싸움 등을 즐김.
5. 내정 문란/음행 : 태후가 내전에서 이동할 때 쓰는 과하마 수레를 빌려 노비에게 타고 놀게 함. 선제의 시녀들과 음란한 행동을 하며 이를 누설할 시 참형에 처하겠다고 압박.
6. 간언 탄압 : 간언하는 신하들을 문책하거나 결박해 옥에 가둠.
결론 – 종묘가 임금보다 중한데 전하(유하)는 아직 종묘에 고하지 않았으니 황제의 자격이 없고 마땅히 폐해야 함.
태후는 탄핵/폐위 상소를 수용해 ‘가하다.’라고 하였고 이에 곽광이 유하에게 조서를 받들도록 하자 왕이 말하기를 ‘듣건대 천자에게 간쟁하는 신하 일곱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천하를 잃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곽광이 말하기를 ‘지금은 황태후의 조서로 폐위하는 것이니, 어디에 천자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유하의 손을 잡아 옥새 끈을 풀어 태후에게 바치도록 하고 내전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였다.
곽광은 유하를 창읍까지 전송했으며 이때 ‘신은 차라리 왕께 죄를 질지언정 사직에는 감히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후에 삼국시대 때 수춘삼반 중 하나인 왕릉의 난 때 사마의가 왕릉에게 했던 말과도 비슷하다. (‘나는 차라리 경에게 빚을 지지 국가에 빚을 지지는 않겠소.’)
‘사감(私感)은 없으나 그대는 공적 차원에서 볼 때 제거되어야 한다.’라는 냉혹한 뜻을 전달하는 말이다.
곽광은 유하의 측근 200여 인을 모조리 주살하였는데 그들이 끌려 나가며 시장에서 통곡하면서 외치기를 ‘마땅히 결단할 때 결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어지러움을 당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진즉에 곽광을 처치했어야 했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어진 후사 논의에서 다시 광릉왕 등을 제외하니 과거 무고의 화 때 죽은 여태자 유거의 손자 유병이가 민간에 있었는데(무고의 화 때 병길이 유병이를 구했다. 병길에 관하여서는 다음 편에서 다룬다.) 무제의 자손으로는 그만 남게 되어 곽광이 그를 옹립했다.
곽광이 옹립한 유병이(유순)가 바로 중종 선제이다.
곽광의 아들, 아우, 사위 등이 요직에 올라 내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했고 이에 곽씨 가문의 세도가 형성되고 확고해졌다.
선제는 곽광에 의해 옹립되었고 또한 이렇다 할 근위 세력도 국정 경험도 없었으므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유하와 같은 꼴이 되지 않기 위해 곽광에게 납작 엎드렸다.
곽광이 선제에게 권한을 반납하려 할 때에도 선제는 스스로 이를 사양하였다.
곽광은 20여 년간 집권했고 그가 사망하자 황제와 태후가 조문하고 장례 용구를 황제의 것에 준하게 하였다.
B.C.68년(선제 6년)에 곽광은 최고의 반열에 오른 상태로 사망하였고 사후에도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곽광은 행정 역량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무난하게 운영하는 것 정확하게 말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역사 속의 많은 권신들이 그랬듯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또 무난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별로 특별히 한 것이 없어 보인다는 의미인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제도개혁 등과 같이 무언가 큰일을 벌이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이는 사실 당시 한(漢)이라는 국가가 처한 기본적인 상황을 놓고 보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무제가 54년간 재위하며 활발한 대외 팽창과 국가의 경제 통제 강화 등 매우 뚜렷한 자취를 남긴 군주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그만큼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무제의 후계자인 소제는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아 곽광 등의 보정(輔政)을 받았는데 여기에 상관씨 가문 등이 도전하는 형국으로 정국이 어수선하고 불안했으므로 무제 사후에는 더 큰 변화보다는 오히려 종래의 체제를 안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
곽광이 어떤 깊은 철학적 근거나 배경을 가진 것은 아니나, 굳이 말하자면 유가의 인(仁)과 도가의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부활시켜 이전에 문제가 고제와 여태후 집권기로 인한 피로를 여민휴식이라는 명분으로 큰 일을 벌이지 않고 안정적 통치 노선을 택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곽광의 집권기에 술의 전매제가 폐지되었는데, 이는 민간에 자유로운 거래권을 돌려주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대외 팽창을 당분간 자제하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고 본다.
이때 이미 정적(政敵)이었던 소금/술/철 등의 전매제를 입안했던 상홍양과 곽광은 서로 충돌했는데 상홍양의 정책과 반대의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무제 때의 통치 패러다임이 서서히 종식될 것임을 의미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선제 때의 법가와 도가 등이 함께 결합한 안정적인 통치로 이어졌다.
개인으로서의 곽광은 기본적으로 기술관료나 학자로서의 역량이 아닌 혈연을 통해 다만 황제를 곁에서 모실 뿐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황제의 곁에서 신임을 얻는다는 것은 곧 역량과 무관하게 본인의 입지를 급상승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였고 곽광은 그것을 극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곽광은 호가호위(狐假虎威) 즉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지도 않았으며 이 덕분에 무제 사후에 온전히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일은 성취하더라도 가족과 후손의 문제는 다른 법이다.
나중에 다루게 될 사마의나 김조순(金祖淳, 조선/1765-1832)과 견주어 보면 곽광은 가족 관리를 잘 못했다.
권신은 사후 안배도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왕에게 권위와 권력이 있어야 하는 체제에서 신하로서 그에 준하거나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진 것이므로 그것을 빼앗길 명분과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의 후손들도 최소한 권세를 시작한 사람에 준하는 역량 정도는 가져야 한다.
단지 문벌귀족이 되었다는 것만 가지고서 오래 가기는 어렵다.
곽광의 부인 현이라는 사람은 악행을 매우 많이 저질렀다.
곽광은 생전에 스스로 묘제를 정해두었는데 헌은 그것을 고쳐 사치스럽고 크게 만들었으며, 곽광이 생전에 노비를 감독하던 풍자도라는 사람과 정사를 자주 논했는데 헌은 곽광 사후 그와 간통했다.
또 현과 곽광의 딸들은 효소태후가 있는 내전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방자하게 행동했다.
가장 심각한 사건은 이미 곽광 생전에 있었는데, 바로 공애황후 허씨를 독살한 것이었다.
공애황후는 선제가 민간에 있을 때부터 부인이었는데 남편이 황제가 되자 자연히 황후가 되었다.
헌은 자신의 막내딸 곽성군이 황후가 되기를 바라 유모 출신 의원이었던 순우연을 사주해 공애황후를 독살하게 하고 남편에게 성군을 황후로 세우도록 권하였다.
황후 사후에 관원들이 의원들을 잡아다 수사하였는데 순우연의 의료 기록과 행실이 엉망이어서 하옥되었고 거센 심문을 받았다.
이에 불안해진 헌은 결국 곽광에게 알렸고 곽광은 크게 놀라 보고하려다 차마 하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결국에는 순우연을 추궁하지 못하게 ‘논죄하지 말라’라는 표시를 하여 사건을 처리해 은폐하였다.
선제는 일찍이 민간에 있을 때부터 곽씨 가문의 권세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황제가 된 후에는 곽광에게 납작 엎드렸고(그러니까 선제는 사실상 즉위할 때부터 본심을 숨기고 일부러 연기를 한 게 된다) 공애황후 독살 후에도 곽씨 가문을 강하게 의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곽광의 형의 손자였던 곽산, 곽운과 곽광의 아들 곽우도 사치와 유흥을 즐겼다.
곽운은 아예 조정에 나가지도 않고 아랫사람을 시켜 칭병하여 조회에 인사를 대신하도록 보내면서 사람들과 사냥을 나가는 등의 짓들을 하였다.
선제는 단계적으로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여 서서히 곽씨 가문의 세도를 걷어냈다,
우선 측근 위상(후에 다룰 예정이다)을 승상에 임명했고, 곽산이 통제하던 상서문하를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바로 상소를 올릴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나아가 신하들에게 자신에게 직보하도록 하였다.
또 궁중 호위 병력 지휘관 등을 측근인 허씨, 사씨 가문의 자제들로 대체했다.
선제의 ‘곽씨 배제’가 본격화되자 곽씨 가문은 불쾌하게 생각하였고 곽우는 칭병하며 정무를 보지 않았다.
임선이라는 사람이 곽우에게 문안을 갔는데 곽우가 불만을 터뜨리며 ‘천자가 우리 집안 장군(곽광)이 아니면 현재의 지위에 있지도 못했는데, 지금 장군 무덤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우리 집안을 모조리 바깥으로 밀어내고 도리어 허씨, 사씨를 등용해 나를 쫓아냈다. 사람들이 죽을 죄를 짓고도 스스로 돌이켜 보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전형적으로 결국 공사(公私) 구분에 실패해 망하는 길로 스스로 들어서고 있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자손에 대대로 권세를 이어받게 하여 은혜를 잊지 않겠다 한다 하여도, 현실적으로 공은 일신전속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곽광의 권세는 곽광이 공이 있어서 얻은 것이지 그 가족들이나 자손들로 가면 권위는 약화되거나 아예 없게 된다.
또 곽광은 공사 구분이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다.
일례로 곽광이 섭정하던 시절에 궁중에 변괴가 생기고 인심이 불안해하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상부새랑(옥새 담당 관리)을 소환해 옥새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상부새랑이 거부를 했다.
곽광은 강제로 옥새를 빼앗으려 했고 상부새랑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신의 머리는 가져가더라도 옥새는 드릴 수 없습니다’ 하니 곽광이 그 의기를 가상히 여겨 다음날 그의 품계를 2등급 올렸고 이에 백성들도 곽광에게 중망이 더욱 모였다.
곽광이 사감과 권력의 사유화를 했다면 이런 사례에서 그냥 상부새랑에게서 강제로 옥새를 빼앗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항하면 죽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곽광은 그것이 명분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나아가 일시적으로 자기 이익에 반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공적 직분을 다하려는 태도를 가상하게 여길 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곽광 본인이 권세가 드높았을 때에도 사양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으며, 그 덕분에 곽광이 정치적 자본의 소모를 감수하면서 꼭 하고자 했던 일(유하의 폐위)에서도 비교적 수월하게 권위로 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손들은 다음 임선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가장 중요한 진실 내지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대장군 시절처럼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권세는 사람마다 때가 있는 법이니 이제 허씨, 사씨 두 집안은 천자의 골육이니 귀하게 쓰는 게 마땅합니다. 대사마께서 이런 앙심을 품고 움직이려는 건 잘못입니다.’ 하니 할 말이 없어진 곽우는 며칠 뒤 정무에 복귀했다.
권력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것이므로,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이 없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행동을 해야 하며 권력이 없어진 것을 사감으로 억울해 하다가는 종국에는 자신의 일신과 가문의 안녕까지도 보장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곽씨 일문은 본인들의 공도 아니며 심지어 공을 세운 장본인이 없어져 권위의 원천이 사라진 상황에서 몸을 낮추기는커녕 오히려 전횡과 범죄를 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곽씨가 공애황후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부각되었고 파장이 커지자 결국 견디지 못한 현이 곽우, 곽산, 곽운에게 자신의 죄상을 실토했다.
이에 곽씨들은 자신들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여 모종의 일을 꾸몄으며 이는 발각되어 곽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사람이 권력을 오래 지니면 자연스럽게 자기 경계가 서서히 해제되기 마련인데, 하물며 권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곽광이 선제 옹립 후 감히 천자의 수레에 함께 탔는데(참승) 선제는 등골이 서늘해했다고 한다.
곽씨의 화는 참승에서 싹텄다는 말이 생겼다.
곽씨 일족들은 곽광의 가족이니 가족들의 폐단은 결국 곽광 본인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본래 왕정의 체제 원리에 따르면 주권은 군주에게 있으니, 권신은 그 기본적인 원리를 뒤트는 구조적 변이였다.
그래서 <한서>에서는 이를 두고 ‘威震主者不畜(위진주자 불휵)’, 즉 ‘임금을 위축시킬 만큼 위세로 누르는 자는 곁에 둘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결국 아무리 신임을 받고 성과나 공적이 많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 분수를 알고 더욱 삼가고 조심해야 하며 주변까지도 가능한 한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준다.
반고는 찬하며 곽광을 평하기를, ‘배우지 못해 수법(術, 국가의 통치술/행정 실무 역량)이 없었고 대리(大理, 큰 이치)에 어두웠다.’라고 하였다.
곽광은 본래 소하와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실체를 보면 처세술과 행정 역량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소하와는 달리 그 본인의 처세술조차 완벽한 것이 아니었으며 행정 역량은 부실했다.
그럼에도 권력 장악 능력이 뛰어났고 그 권력은 근본적으로 보면 무제의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무제가 추구한 그토록 강대했던 황제권은 결과적으로 황제권을 억누르는 신권(臣權)이 탄생하는 씨앗이 된 셈이었다.
참고) <한서> 곽광김일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