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Growth)에서 발전(Development)으로
2012년은 일본에서 제2차 아베 내각이 성립하고 3년여 간의 짧은 민주당 정권이 대참패로 몰락한 해이다.
소위 세 개의 화살(확장재정-확장통화-구조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의 원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다카이치 사나에 현 일본 총리는 아베노믹스의 승계를 선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구조개혁 대신에 ‘방재·방위 투자’를 내세웠다.
한편 우리나라의 이재명 대통령 역시 확장재정 및 AI 산업의 국가 주도 성장을 강하게 역설했다.
종래 한국과 일본은 모두 국가 주도하에 위계적으로 공업 기업들-금융계-관(官)계-학계-전문계-노동 등을 체계적으로 조합하여 경제기획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고, 수출을 통해 국내총생산(GDP)을 증대하는 개발국가를 수립했고 이를 수십 년간 이어왔다.
현재의 ‘사나에노믹스’와 ‘이재명노믹스’는 이러한 개발국가를 현대판으로 리뉴얼하여 되살리는 방식을 취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현재의 경제 환경에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이 있는 전략인가?
몇 가지 거시경제지표를 2012년과 2025년을 대비하여 살펴보았다.
일본의 경우, 우선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12년에 약 0%로 디플레이션에 가까웠는데 2025년에는 2.9%로 체감물가가 인플레이션으로 전환되었다.
실업률은 2012년에 약 4%, 2025년에는 약 2.6%로 약 1/2 수준으로 하락했고 실질GDP 성장률은 2012년 약 2%에서 2025년 1% 정도로 하락했다.
고용률은 2012년 70%대 초반에서 2025년 80%대로 대폭 상승하였다.
청년(15~24세)고용률도 2012년 38.5%에서 2024년 기준 48%로 상승하였고, 반대로 청년실업률은 4% 미만으로 고용의 활용도는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실질임금은 2012년 대체로 상승이 정체되었는데 2025년에는 9개월 동안 계속 –1.4%로 물가상승이 임금상승을 상회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가계소비는 2012년 대비 2025년 약 +1.35% 정도였는데 팬데믹 이후 회복되긴 했으나 과거 피크 대비 대폭은 아니다.
민간 설비투자는 2012년 대비 2025년 약 +21.9%로 회복세가 견조하다.
한편 GDP 대비 일반정부부채(=중앙정부부채+비영리 공공기관 부채) 비율은 2012년 226.1%에서 2025년 234.9%로 2020년 팬데믹 기간 258%로 정점을 찍었다가 완만히 낮아져 230%대를 유지하고 있다.
선진국 중에는 최고 수준이다.
GDP 대비 경상수지 비율은 2012년 +1.5%~+2.0% 수준이었고 2025년에는 대규모 흑자로 더 증가해 +3.9%에 이르렀다.
그런데 세계 행복지수를 보면, 2012년 10점 만점에 6.064점으로 43위였는데 2025년 6.06점으로 51위가 되었다.
대체로 6점 이상을 주도한 것은 안전, 건강 등의 측면인데 주관적 만족도가 평균 이하이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하면, 일본의 경제 지표들은 대체로 아베노믹스의 목표였던 ‘디플레이션 탈피, 성장 회복’을 달성했다고 생각된다.
경상수지 흑자나 고용률 상승 등을 보아도 견조한 성과를 냈다.
오히려 현재에는 물가상승이 임금상승을 상회하고 설비투자는 대폭 증가했는데 가계소비는 정체되어 있으며, 정부부채가 최고도로 증가했으며 무엇보다 주관적 삶의 만족도가 세계 평균 이하이다.
이러한 상황은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2012년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민주당(2009-2012)이 내세웠던 전략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민주당은 ‘국민 생활이 제일’, ‘삶을 지키는 힘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나라로’, ‘경제재생은 사람으로부터’ 등의 표어를 내걸었다.
이 노선에서는 생활보장 즉 가계의 구매력 뒷받침이 첫 번째 핵심이 된다.
최소 소비세 동결 등으로 내수 소비 보조, 공보육과 장애인이나 노인 등의 개호(돌봄) 충실, 지방분권 강화와 지역 공동화 현상의 해결, 소수자 인권보장 강화로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사회 구현 등이 중요한 전략과 정책수단이다.
다른 하나의 노선은 재정의 건전화인데, 다만 그 전략 중에서도 민주당은 최대한 온건한 것을 골랐다.
즉 지출심사제도(Spending review)를 강화하여 지출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특히 토건 사업 축소와 공무원 인력 조정 및 방위비를 GDP 대비 1% 이하로 억제했으며 성공하진 못했지만 국채 발행을 통한 재원 충당을 원칙적으로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다.
나아가 진통 끝에 소비세 인상으로 정책을 바꾸었다(이 지점은 자민당 등 야당의 집중 공격 타깃이 되었다).
또 행정개혁과 규제개혁을 통해 관료 주도가 아닌 정치 주도 정책을 추구했으며 규제관리체계를 개선해 규제를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재정 운용의 합리화와 사회보장 증진을 통한 가계경제 지원, 지역과 중소기업 등의 회생 등이 기본 기조인데, 현재 일본의 문제(실질임금 상승 저조, 가계소비 정체, 정부부채 과도, 주관적 삶의 만족도 정체 등)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베노믹스나 종래의 개발국가보다 타당하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수출 주도 성장과 전체의 양적 성장이 전체적인 소득 증가 나아가 자산 형성을 가져온다는 종래의 논리 구조는 한계에 봉착했다.
왜냐하면 일단 선진국 반열에 들어가는 경우 자본과 노동의 집약과 기술의 모방이라는 체계적 기획이 가능한 체제는 사실상 더는 불가능하고, 또 소위 ‘전체 파이’가 커지는 데에는 어느 정도 객관적 한계가 있으므로 경제의 양적 성장은 분명 지속되고 있는데 경제발전 역량과 무엇보다 국민 개인의 삶의 만족도나 이를 뒷받침하는 제반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크게 변하지 않거나 정체되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의 경우에도 일본과 비슷한 문제의 결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개발독재 하에서 일본과 비슷한 노선을 탔으며, 86세대 중에서도 그때의 성장 가도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자원은 없으니 수출만이 살 길이다’, ‘제조업이 고용 창출에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산업 분야’, ‘전체가 성장세를 타면 개인도 당연히 이익을 누린다’, ‘사회문화의 문제는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알아서 개선된다’라는 등의 인식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지만 중공업의 점진적 사양화, 비숙련 노동의 자동화, 소수 고숙련 노동수요와 고등교육 보편화의 매칭으로 인한 경쟁 심화 등의 조건 변화를 생각해보면 2030년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에서 그 전제들에는 문제가 많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는 특히 이러한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12년에나 2025년에나 여전히 2%대 초반 정도를 유지하며 2025년 3분기에는 1.67%였다.
실업률은 2012년 3.2%였는데 2025년에는 2.6%였다.
실질GDP 성장률은 2012년 2%대였고 2025년에는 1.4% 정도이다.
가계소비는 최근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며 설비투자(국내 총고정자본형성률)는 2012년에나 2025년에나 대강 30%대 초반을 유지한다.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계속 상승해 2024년에는 50%를 돌파했다.
실질임금상승의 경우 소폭(2025년 3월 기준 전년 대비 +1.1%) 회복 중이고 경상수지의 GDP 대비 비율은 +5.3%였다.
2024년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 75.6%가 만족한다고 답했고, 국제연합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한국의 점수는 10점 만점에 2012년에 5.83점, 2025년에 5.95점을 기록했다.
OECD 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10점 만점에 5.8점에서 6.1점으로 소폭 상승했으나 OECD 평균인 약 6.7점에는 여전히 미달이다.
그런데 절대 점수는 높지만 상대평가로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2022-2024년 평균 58위였고 OECD 국가 중에서도 하위권이며 우리나라 통계청은 ‘만족 여부’를 묻지만 국제연합은 ‘만족도를 0-10으로 볼 때 몇 점’을 묻는다는 등의 차이도 있다.
다만 이는 중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이 2010년대에서 2020년대로 넘어오는 10여 년 간 삶의 질이 꾸준히 개선되고 반대로 종래 높은 질을 유지하던 서유럽과 미국의 내부 상황이 점점 혼탁해지면서 다소 정체하면서 상향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 효과가 있다.
간단히 말해 다른 나라들이 우리보다 빨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나라나 일본은 삶과 사회의 질이 지난 10여 년간 ‘거기서 거기’였다는 것이다.
이건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이 못 된다.
또 60% 수준에서 행복도가 계속 정체되는 이유는 결국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앞서 언급한 경제정책에서나 포괄적으로 사회 자체가 패러다임 전환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은 그래도 우리보다는 가열차게 무언가를 해보려고(정확히는 구조에 유의미한 긍정적 충격을 주기 위해) 십수 년 이상 노력했고 그 결과 거시경제지표에 상당한 개선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용이나 GDP, 경상수지 등을 보면 2000년대 정도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거나 소폭 개선되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에는 예컨대 경제성장률이 3-4%였을 때 1980년대-90년대 초까지의 성장세를 왜 이어가지 못하느냐고 한탄했다.
세계적으로 보면, 80-90년대의 재구조화를 거치면서 서비스업이나 금융업으로 완전히 쏠리고 IT 등을 제외하면 제조업 부문이 과거와 같지 않게 된 서유럽과 미국 등과는 별도로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중공업 등 구(舊) 제조업도 유지해 온 편이다.
결국 거시경제지표가 나빠서 우리가 행복도가 더딘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고용률이 높더라도 고용의 양적 풍부와 질적 보장이 더는 없고, 가계부채는 계속 증가세에 있으며 소비는 정체되어 있고, 생활보장이 아직 갈 길이 상당하며(공보육, 교육혁신, 돌봄의 개인 맞춤형 전환 등), 사람들의 심리는 부동산 등 안정 자산에 대체로 쏠려 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부동산을 결국 찾게 되는 이유도 도전과 창의를 발휘할만한 사회문화적 토양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주어진 목표나 조직의 논리 내지 일본식 표현으로 ‘공기’에 맞추어야 하는 문화가 일신되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적 균열은 더욱 악화되고 극단화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세대와 무관하게 정신적 고통과 실존적 위기에 맞닥뜨리고 있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때의 심리는 경제 자체에 관한 심리일수도 있지만(예컨대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 사실 선진국일수록 그 저변에는 결국 자유와 창의를 발휘할 수 있으면서도 공동체적 돌봄이 개인을 지지하는 안정적인 사회적 토양이 존재하게 된다.
즉 사회문화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예컨대 비록 공보육의 충실이 설비투자와 같이 경제성장에 직결되는 건 아닐지라도 여러 파급 경로를 통해 경제의 질적 개선과 단순한 성장(Growth)이 아닌 발전(Development)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을 비롯해 많은 세계의 경제학자들도 한국에 이 점을 조언하고 있다.
한국은 양적으로 경제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기보다, 사회의 질과 개인의 삶에 대한 자유도와 만족도를 더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이전의 민주당계 정권들은 경제정책 자체에서는 오류가 있었을지 몰라도(부동산정책에서의 당위와 현실의 부적절한 연계라던가.. '소득 주도 성장'과 '경제의 측면에서 기반이 되는 복지'는 서로 다른 접근이다. 언뜻 들으면 전자는 성장 전략을 소득과 소비만으로 충당하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다만 실제로는 혁신성장이라는 개별적인 성장 전략이 있긴 했다.) ‘사회적인 것’의 가치에 대해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 복지, 인권 등의 영역에서는 (당연하지만) 보수 진영이 아니라 민주당계가 더 많은 역할을 해 왔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경제의 체질 개선에 있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당은 과거 보수 진영이 쓰던 양적 성장이 알아서 만족도를 보장한다는 듯한 레토릭을 주로 쓴다.
산업과 금융 자체를 직접 움직여 여기서 더 양적 지표들을 개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단 성과도 불확실하고 복잡화, 선진화된 시장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부는 정부가 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그것은 이제까지 계속 강조한 삶의 질과 사회통합에 관한 문제이다.
거시적으로 재정의 역할을 보지 말고, 과정 중심적으로 재정을 볼 필요가 있다.
즉 재정을 쓴다는 것과 재정의 역할 자체보다는 재정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를 정밀하게 설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확실히 일본보다 여유가 있지만 이미 저출생-고령화 등으로 인한 중장기적 재정 수요 압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관세 장벽이 복원되고 제조업 성장세의 둔화 우려가 제기되면서 재정이 이를 뒷받침해야 하는 문제도 생겼다.
재정 자체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기본적으로 재정이 만능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민간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한 구조개혁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고립, 심화된 사회적 균열과 갈등, 사회보장체계의 지속가능성, 돌봄의 충실, 재정적 지속가능성 등의 과제에 집중하고 대체로 다른 영역들 대표적으로 산업이나 금융 등의 경우에는 정부보다는 시장에 맡기는 편이 합당하다.
분명히 세계와 우리나라가 모두 전환점에 있는 것은 맞는데, 그러한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느냐 못하느냐가 앞으로 국운을 가를 중대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하루라도 빨리 개인의 삶의 질과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과제를 위한 구조개혁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정책 패러다임과 민간의 문화 등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