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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란 무엇인가

by 남재준

신문을 보다 보니 김수영 시인을 소개한 글이 보였다. 읽어봤는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굉장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화자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그 시를 창작해 세상에 내놓는 것 자체도 하나의 '큰 일' 즉 부정의한 체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은 이분적이지 않다. 큰 일과 작은 일은 실제 삶의 맥락에선 그렇게 쉽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 존재인지 우리는 나이를 들어 가며 깨닫는다. 그런 이들에겐 오늘날에도 '내란 청산'보다는 자신의 내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꽤 많은 이들이 삶의 현장에서 고투하면서 동시에 약간의 사회적 의견도 지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시민은 소시민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래서 역사라는 큰 단위에서 보면 체제에의 저항자냐 순 응자(소시민ㆍ부역자 등)냐로 나뉘겠지만, 나는 그런 가치를 내포한 이분법 다시 말해 전자에 더 높게 가치를 두는 것에 반대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일'도 '큰 일'이 될 수 있다. 큰 일에 관심을 가지는 정확히는 열불을 내는 이들 중에는 '먹물'들이 많다. 나도 '먹물'이지만 먹물인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 시대엔 먹물이 과다해져서 희소 가치가 별로 없고, 먹물에만 빠져 있기엔 나를 둘러싼 현실과 내 정신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항상 생존이 우선이었고 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비난할 순 없고, 또 그것을 함부로 '계몽'한다느니 하는 오만한 생각은 타당치 않다. 대개의 경우 세상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최악과 차악 중 차악을 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영구히 계속되는 유토피아에의 '진보'적 기획과 투쟁은 많은 실패와 희생을 제물 삼아 온 측면도 크다.


한편, 김수영 시인은 '불온함'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그것을 단순한 정치적 저항으로만 보지 않고 부당한 상식ㆍ예술가의 세계의 한계를 깨는 것, 마침내 예술의 본질로까지 나아갔다. 글쎄, 불온함은 예술을 외적으로 보았을 때의 하나의 특성이 될 것이다. 불온함의 무제한적 해제처럼 보이는 주장의 실체는 극단적 탄압ㆍ미시적 세뇌에 이른 강도의 체제적 억압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다. 그것은 현실 정확히는 부당한 현실에의 저항이다.


그러한 측면에선 그가 자유주의자로 보이는 면도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이전보다 폭넓게 보장된 오늘날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불온함 즉 체제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피해자 서사에 이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재이다. 표현에 대한 책임감 없이 그 자체로 사회적 보호막인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며 정작 자신은 의무나 제한은 없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사실상 영위하려 들게 된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말해 김수영 시인의 시에 이제 별 감흥이 없다. 그건 그의 사상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 보다는 그의 사상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보장된 현대사회의 혼돈과 난맥상으로부터의 비롯된 회의다.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고립되며 극단화된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에게 보다 진솔한 공감과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이다. 역설적으로 타인이나 사회가 없으면 자유란 무의미한 개념이다. 심지어 타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타인과 상호적으로 보장하고 보장받는 안정감 등의 자유도 있다. 개인은 사회ㆍ공동체와 불가분이며 개인과 공동체 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논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유사한데 중요한 점은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자유와 책임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인간상은 자유와 의무, 개인과 공동체 등을 균형적으로 보고 책임감 있게 자신과 사회를 대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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