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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를 시로 하는 시대

by 남재준

선거운동은 시로 하지만 통치는 산문으로 한다는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의 명언에 대단히 깊이 공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중도와 좌우의 차이는 단순히 성향이 더 뚜렷한가 그렇지 않은가 보다는 위의 명언에서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현실 속에서 구체적이고 고난도의 결정들을 채워 나가는 부분, 즉 그날그날의 일상적 운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런 것들이 안정과 작은 성과의 축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치의 문화 내지 문법에 대한 종래의 합의가 이제는 거의 붕괴된 상황이다.


기성세대가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통치가 점점 시가 되어간다.


이것은 정치의 본령으로서 공동체의 삶과 운영의 문제에 대한 부분들이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거나 가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어떤 사회문제를 객관적이고 편견 없이 인식하고 대안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시각에서만 문제의 존재부터 정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서 무의미한 극렬한 충돌만 반복됨을 의미한다.


또는 하나의 강렬한 이념을 내세우는데, 정작 그것이 가져오는 구체적 결과들이 그 이념과 그것을 내세우는 정치인의 인기에 가려 제대로 냉정한 평가를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기성세대 주류가 사람들의 삶이 놓인 구조의 흐름을 개선하지 못하고 결국 불평등과 불경기의 지속이나 사회문화적 갈등의 증폭 등으로 귀결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오에 대한 저항으로서 우익포퓰리즘이나 내셔널리즘이나 좌익포퓰리즘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이러한 투쟁, 저항, 상징, 이념, 정체성 등은 공허하다.


구조의 문제를 직격하지 못하고 되려 은폐하거나 악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성 주류에 대한 저항이 정당하다는 것과 현재의 새로운 엔트로피적 흐름이 미래가 있는 지속가능한 것인가는 분명 다른 문제이고, 궁극적으로는 후자가 더 결정적이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근의 '행정/정책/통치를 시로 하는' 전체적인 세계 각국의 흐름들은 '이 사람들은 내일이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변화를 위한 변화로 인해 최악으로 귀결되는 것은 신중하게 선택해서 차악으로 귀결되는 것보다 나쁘다는 것, 가능한 한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상존하는 파국의 가능성을 사전에 조정하고 안정화하는 것이 공공의 역할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을 보면 문제의 근원을 정리하고 해결한다기 보다 오히려 점점 더 모든 것이 혼탁해지고 중심이 없어지는 느낌이 커진다.


과연 언제까지 이러한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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