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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위선의 혁명가들

by 남재준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은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이었다. 애초에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보통은 읽은 후 마음이 불편한 적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읽은 후는 물론이고 읽는 내내 묘하게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 이유를 곱씹어 보고 대강 정리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주인공 ‘수민’과 그의 아버지인 ‘태수 씨’의 이야기이다. 명확히 나오는 건 아니지만 추측건대 태수 씨는 간 질환으로 인하여 사망한다. 태수 씨의 투병 생활 중 수민과의 기억과 태수 씨의 장례식장에서의 장면 등이 교차해서 등장하고, 또 수민과 태수 씨, 엄마(공 여사) 등의 이야기들이 다루어진다.


내가 볼 때, 이 소설은 다분히 이념적이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혁명’, ‘NL’ ‘PD’, ‘페미’ 이런 말들이 등장하며 실제로 등장인물들은 그러한 정치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태수 씨는 85학번 사학과 출신으로서 PD 운동권으로, 마찬가지로 85학번 사학과 출신 NL 운동권인 수민의 엄마와 투쟁을 했다. 그러다가 수민의 엄마가 임신을 하면서 혁명의 길을 포기하고 현실적인 가장이자 직장인의 길을 택하게 된다. 전형적인 86세대 서사이다.


한편 태수 씨가 항상 언급했던 동기들(‘민주85’) 중 ‘성식이 형’은 끝까지 NL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나게 되며, 결국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장기 복역을 하게 된다.


그런데 중년의 가장이 된 태수 씨는 페미니즘이나 환경주의를 지향하는 ‘신좌파’인 딸 수민이 보기에는 보기에 따라 모순이라고 볼 수 있는 행동들을 한다. 그의 ‘대의’는 젠더와 가족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제사에서 반바지를 입지 못하게 하는 것, 엄마에게만 제사상 준비를 전가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마치 우리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당신은 그걸 응당 받아들일 뿐이라는 듯이.’라고 수민은 묘사한다. 동시에 태수 씨는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를 두고 수민은 ‘나는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 씨의 모습을 좋아했었는데.’라고 언급한다. 또 태수 씨가 ‘요즘 여자’들에 대한 남성 중심적 편견을 그대로 체화하는 것 또한 묘사된다. 자신의 딸들도 ‘요즘 여자’들인데, ‘한국 여자가 그렇지 않으냐’라는 식으로 말하는 아버지에 대해 수민은 불편함을 느낀다. ‘다 알면서도 참고 사는 거야. 그런데 너네는 왜 그러니?’ 태수 씨가 한 말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전형적인 86세대의 모순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한편으론 이상주의적이고, 추상적인 구조니 투쟁이니 하는 것을 강조했으면서 현재에는 ‘그건 당연한 거다, 알면서도 참는 거다’와 같은 권위주의적인 사고와 표현을 비치니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노선의 차이에서도 기인한다. 86세대가 수용한 좌파 담론은 현재로서는 구좌파가 되는데, 그들은 유물론적 사고의 기초에서 노동의 착취와 해방의 문제가 모든 인류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나타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체제로서건 이념으로서건 자동적으로 여성이나 사회적 소수자들까지 포용하지 못했다. 신좌파는 그러한 차원에서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하게 되었다. 대의와 사적 영역을 구분해 전자를 중시하는 구좌파와 달리, 신좌파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다.’와 같은 명제에서 시작하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전적으로 내 관점에서 보면 이런 모든 것들에 염증을 느꼈다. 차라리 대놓고 권위주의적 보수인 것이 위선적인 진보보다 훨씬 낫다. 인간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면서 정작 그 과정에서의 폭력에 대해서는 무감한 사람들. 그리고 근본적으로 진보가 세상을 보는 이분법적이고 극도로 우울한 관점과 감성에 대해서도 격렬한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먹물’이지만, 정직하게 먹물임을 인정한다. 그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태수 씨는 ‘우리는 투쟁하며 공부했어. 도서관만 다니던 뜨내기들하고는 급이 달랐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서관만 다니던 뜨내기들이 결국 구체적으로 세상을 운영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들이 되었고, 86세대들은 민주화라는 바람의 선봉이 된 후 완전히 저물거나 폭주했다. 물론 그 투쟁에 대해 나는 일면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매우 극단적인 권위주의와 폭력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의 담론도 반사적으로 더 극단적이고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거시적인 투쟁과 대의 같은 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내일부터 걱정해야 하고 현실적으로 감정이나 그 외 여러 자원들을 절제하며 최대한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지 않으면, 생활 감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작중의 주인공과 부모는 모두 대학 출신이다. 대학 출신이 ‘의식화’ 등을 위해 육체노동자가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계를 위해 육체노동을 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거시 담론은 아니더라도,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인습의 타파와 같은 사상들은 핵심 좌파 운동권을 제외하고도 항상 존재해 왔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변화의 필요성도 함께 주장하는 이들. 더디더라도 모순과 위선이 없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본 노무현은 투쟁가라기 보다도 ‘개혁자’에 가까웠다. 태수 씨도 노무현을 사랑했다는 묘사가 나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보는 노무현, 진보와 86세대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존엄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정치에서건 이것이 일관되게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실제로 86세대는 이원적 대립 구도의 좌파적 세계관에서 노동해방이니 민족해방이니 하는 것을 내세웠고, 그러한 급진적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그나마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을 선택했다. 내가 본 진보의 ‘개인 존중’은 어디까지나 반사적인 것이었을 뿐, 그들의 세계관의 근본과 맥락이 그러한 추상적이고 극단적인 세계관과 이상, 모순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을 꽤나 늦게 깨달았다.


수민의 관점 정확히는 초점에 대해서도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젠더 문제가 별로 중요하지도, 그리고 본질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여성운동의 담론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젠더 갈등이니 뭐니 해도 여전히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 중요한 건 실제로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지 세상 사람들이 ‘요즘 여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다. 그런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실제 현실과 생활에서 완전히 괴리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민이건 그 부모건 간에 셋 다 먹물 진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독자로서 나는 이 지점을 기점으로 해서 가장 큰 불편을 느꼈던 것 같다. 특히 태수 씨의 경우에는 한편으로 자신이 진보라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로 보수적이라는 부분이. 나의 아버지는 태수 씨보다 훨씬 극단적으로 모순적인(구체적인 것은 밝히지 않겠다) 사람이었기에 나는 근본적으로 아버지를 포기했다. 정확히는 인생에서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언행의 정합성, 무결성(Integrity) 이런 것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생각은, 그저 먹물 진보들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에선 구좌파와 신좌파라는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아버지와 딸이 한 가족으로서 서로의 공통점(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훼방 놓는 사람들')을 공유하며 갈등 못지 않게 사랑도 묘사된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수민이 풀어놓은 태수 씨의 개 '유자'는 그러한 공통 요소를 상징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런 지점들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가족 서사가 중심이 된다고 보기 힘든 측면이 상당히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실제 대한민국에서 이런 가족은 그렇지 흔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우리 가족만 해도 아버지는 명확히 86세대의 변두리에 있었던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대학 자체를 나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어머니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은 것 같다. 세상에는 대단히 다양한 결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인데, 소설에서 그것을 다루면 독자들은 최소한 한 번 쯤은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았다. (이 소설의 예술적 가치를 특정 방향 정확히는 혹평하는 방향으로 비평하는 게 아니라 독자로서 느낀 바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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