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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원 대만 국민당 주석의 ‘푸틴은 독재자가 아니다'

by 남재준

Cheng Li-wen's statement that "Putin is not a dictator" sparks controversy; she emphasizes that labels should not be made lightly - VOCO News | Global Chinese Instant News Network

정리원(鄭麗文, 1969-)이 훙슈주(洪秀柱, 1948-)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대만 국민당(‘중국국민당’)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이 여성의 이력을 놓고 볼 때, 지난 10월 31일에 Deutsche Welle와 한 인터뷰에서 ‘푸틴은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라는 취지로 말한 것은 놀랍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한 일이다.

정리원은 국립대만대 법학과 학사, 템플대 법학(국제법) 석사, 케임브리지대 국제관계학(중국학) 석사이다.

그는 1990년 3월에 있었던 들백합운동(野百合學運. 3월 학생운동이라고도 한다. 40년간의 국민당 일당독재에 반대하며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요구한 운동이다. 리덩후이 총통과의 대화가 이루어졌고 대만 민주화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다.)에 참여했다.


또한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대만독립운동에도 참여했고 나아가 민주진보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민진당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지자 이와 관련하여 해당 인사에 대한 부정적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2002년에 제명/출당을 당했다.


이 일은 그의 정치성향을 급격히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의 무소속 출마 실패 후 그는 결국 2005년에 공식적으로 국민당행을 택하고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이전과는 달리 92공식의 준수를 통한 양안관계 안정화 및 중국과의 연계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지향하는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그는 현재 대만의 문화 요소 중 90% 이상이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며, 나아가 모든 대만 국민이 ‘나는 중국인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도 언급했다.


기본적으로 대만은 원주민들을 탄압하고 중국국민당이 밀고 내려와 중국문화를 압도적으로 이식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연원이야 어찌되었건 사실 대만이 중국문화권의 일부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더 노골적으로 또 가시적으로 대만을 수중에 넣으려고 한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동아시아의 민주주의는 내셔널리즘과 엮여서 참으로 복잡한 역사를 지녔다.


어떤 면에선 내셔널리즘은 이념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만 하더라도, 민족해방을 내세우며 종북 활동을 서슴지 않는 NL계 극좌가 있었다.

민주당계 정당의 평화통일 강조와 이러한 맥락에서의 평화 중시 대북정책은 한편으로는 내셔널리즘의 산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정당의 냉전 시절 반공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수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했는가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다.

냉전 구도의 차원에서 보면 대만 국민당 정권과 우리나라 군사-보수 정권은 모두 내부적으로 개발독재를 하면서 대외적으로 친미 성향을 보여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고 한국과 대만 각자의 내부에서 민주화라는 새로운 요구가 분출되면서 역학 관계나 보수-진보 간 정치 성향 차이가 더 복잡해졌다.


이는 선진국의 경우 주체적으로 내부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 관계도 형성해 나갈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나 대만의 경우 상당 기간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중간 즈음에 있는 국가로서 그러니까 다소 종속변수 비스무리한 존재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의 경우 당초에는 군사-보수 정권이 대체로 큰 틀에서 냉전 구도 하에서 반공을 국시로 가져가면서 친미 성향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의 내부 체제와 달리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내부는 당시 개발독재체제였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은 내부적으로 민주화를 주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한민족과 외방 세력’이라는 이원적 대립 구도 하에 군사-보수 정권이 만든 ‘이념적 구도’의 틀을 깨고 한민족인 북한과 대화와 통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이보다는 약간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민주당계 정권 시절 우리나라가 중국에 보수 정권보다 아예 미국을 제쳐두는 모양새를 취하면서까지 밀착했다는 증거가 없고, 반대로 보수 정권 시절에도 북방외교를 시행한 것이 노태우 정부 때였고 사드 문제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중관계를 보수 세력에서도 중시했다.


대만의 경우에는 대만의 중국화가 진행되고 기득권화된 국민당은 종래의 본토 수복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포기하고 반대로 문화적 공통 요소를 바탕으로 양안관계를 대화 중심으로 풀어가자는 노선이 되었다.


민주진보당은 국민당을 제외한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던 시대를 뚫고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외적 차원에서 대만의 명확한 독립과 일국양제의 거부를 추구했고 나아가서는 대만 원주민 문화 신원(伸冤) 등 ‘대만화’를 추진했다.


또 최근 중국의 군사적 압박이 더 노골화되면서 대만은 차이잉원 민진당 정권 하에서 보다 미국과 밀착하고 제1세계에의 가담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외관상 언뜻 보면, 대외정책상으로만 보면 우리 보수정당과 대만 민진당이 미묘하게 비스무리한 지점이 있고 또 우리 민주당계와 대만 국민당이 미묘하게 비스무리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점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좀 묘해진다.


다시 정리원의 말로 돌아온다면, 과연 푸틴이 독재자가 아니라는 그의 말이 진심일까 아니면 중국에게도 간접적으로 우리가 당신들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걸 어필하고 싶어 하는 제스처였을까 궁금하다.


전자였으면 좀 심각한 일이다.


사실 푸틴을 독재자로 프레이밍하는 것은 NATO와 서방의 프로파간다적 측면이 있다는 취지로 말한 것을 보면 진심이 아니라고 의심할 정황이 별로 없어 보인다.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법학을 전공한 사람이 단지 외관상, 형식상 민주적 선거였다는 이유로 독재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기본적인 정치학이나 법학에 대한 이해가 심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히틀러와 나치당도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독재일까?


하지만 '민주적 독재'라는 건 숱하게 존재해왔다.


실질적인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법치주의, 기본권과 같은 실천 원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냥 다수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떤 지도자가 90%의 득표율을 받았고 그것이 형식상으로는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협의(狹義)적으로는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겠지만 광의(廣義)적 즉 자유주의와 법치주의와 기본권 등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 경우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구체적으로 말해 정치과정에서 국민이 표현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복수정당제 등을 러시아와 중국에선 사실상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그냥 다수결로 전락시켜 독재자에게 집권의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장식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식을 알고도 정리원 국민당 주석이 정말 푸틴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황당한 얘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도 NATO가 동진(東進)하지 않겠다는 러시아와의 약속을 어긴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정황을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NATO가 러시아에게 군사적 위협을 시도하려고 한 적은 전혀 없다.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우크라이나 국민과 정부가 결정할 주권의 문제이지 러시아나 NATO가 그렇게 하라 말라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가 위협적으로 서진(西進)을 시도했다면 시도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


앞서 언급했듯 체제의 문제를 생각하면, 어떤 사람들은 과거 냉전 시대의 이념 대결과 이로 인한 내부 사상 탄압의 트라우마부터 떠올린다.


그러나 현대세계에서 한국과 대만의 위상은 더는 개발독재 국가가 아니며, 선진국들과 같은 반열에 있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본권과 자유주의 원리가 제대로 지켜지며 개인의 영역과 다원성을 존중하는 ‘삶의 방식’이 실현되고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현실적인 지정학적 위협 요소를 고려해야 하므로, 우리나라나 대만이 섣불리 중국을 들이받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일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나 러시아 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건 너무 위험한 선택이 될 여지가 많아진 환경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대만에서 민진당이 2016년부터 벌써 약 10년을 집권한 상황인데, 만약 다음 2028년 대선-총선에서 국민당으로 완전히 정권교체와 다수당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그것도 규범적 관점에서는 고심거리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 민주당계 정권도 그랬지만, 대만 국민당도 너무 위험한 늪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정리원 주석이 보다 현명한 노선을 취하기를 바란다.


단지 '우리 이익만 챙기면 된다'라는 생각이 선진국의 차원에서 유행하고 있지만, 만약 대만이나 한국이 개발국가 시절의 자국의 대외적 위상을 생각하고 외교정책을 접근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자신이 사회인으로서 방향을 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세계 차원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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