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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에서 전제의 정확한 진술이 중요한 이유

by 남재준

작문을 할 때 다음과 같은 구성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1. A에 대한 설명

2. A에 대한 작자의 회의/반대

3. 작자가 옹호/지지하는 B에 대한 설명


이 구조는 논설문에서 많이 쓴다.


하지만 타당성이 있으려면 3번 못지 않게 1번이 중요하다.


1번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2번이 불완전하게 되고, 3번이 타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보통은 A와 B는 서로 비교/대조되는 주장/사상/견해/개념이기 때문에, B의 설득력을 높이려면 A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1번을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A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근데 그게 꼭 그렇게 되나?', '이 사람이 A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렇게 글을 전개한 것일까?'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불완전한 1번은 A와 B가 다루는 논제에 관하여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 극단적으로는 왜곡된 이해를 시킬 수도 있다.


보통 논설문은 사회적 담론의 형성과 구성에 기여하므로, 특히 오피니언 리더와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를 범하면 사회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


물론 결국 작자는 B를 주장하고 싶은 것이므로, 거기에 국한해서만 A에 대해 설명할 일이지 구태여 A에 대한 자신의 이해도를 독자에게 증명할 이유가 있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 말도 일견 타당하지만, 독자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이 과연 A를 제대로 이해하고 문제/비판 의식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A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 상태로 문제/비판 의식을 가진 것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해당 유형의 글은 A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B에 이르게 된 구조이다.


또 경우에 따라 A에 대한 문제의식과 B 간의 논리적 연계가 긴밀한 경우 다시 말해 A에 대한 문제의식의 전제가 타격을 받으면 B의 타당성도 타격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상의 문제 의식에 관한 예를 들면, 얼마 전 내가 읽은 소수자에 관한 글에서는 '종래의 소수자 관련 담론이 다수-소수의 억압 구조를 상정하면서 소수자들의 정체성만을 강조하다 보니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더 어렵게 하는 면이 있다.'라는 1번에 해당하는 주장/설명이 있었다.


해당 글에서는 최종적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소수자의 삶과 어려움에 관한 주체적 자기 진술과 해체를 통해 다수와 소수를 가로지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이 열릴 수 있다.'라는 3번에 해당하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이 글에서 3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1번은 일견 타당성이 있지만 이는 소수자 담론의 일면만을 설명한 것이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통상 소수자의 존재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낯설게 여기면서 그들을 소수자로 만드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집단화하여 이해한다.


소수의 입장에서는 소수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권력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그들을 소수가 되도록 만드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서로 연대해 다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를 놓고 보면, 억압의 논리를 포함하는 정체성은 소수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다수 주도 사회에서 그것을 중심으로 소수자를 집단화하기 때문에 강조가 불가피하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3번은 경우에 따라서는 소수에게 자신의 사회적 수용에 대해 다수에게 입증책임을 지도록 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소수자는 애초에 다수자들이 낯설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배제되고 소외되므로 독자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공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려도 그와 나의 경계가 실질적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한 그렇다.


그러나 일견 역설적으로, 경계의 붕괴는 일체화를 의미하는데 순수한 이론적 가정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러면 독립/주체 등 경계를 전제하는 개념들은 모두 무의미해지고 따라서 그로부터 도출되는 도덕윤리 등도 모두 무의미해진다.


나는 내면 경계의 붕괴와 일체화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본다.


인간은 본디 불완전한 존재이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사명일지도 모른다.


이를 다수-소수 관계라는 측면에서 다시 보면, 소수의 논리는 단순히 피해자의 서사가 아니라 종래에 다수가 보지 못한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 뿐이다.


다수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수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수가 소수를 이해해야 하는 도덕윤리적 의무가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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