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에서 벗어나야
일본 다카이치, 재정악화 우려에도 188조원 넘는 경제대책 추진
Japan's new Prime Minister Takaichi delivers her first policy speech | NHK WORLD-JAPAN News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예상대로 확대재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재정을 확대한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재정을 어떤 방향과 구성으로 확대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일시적인 경기부양과 가능하더라도 지속이 난망한 성장세 회복에 대한 희망 걸기 중심의 확대재정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하지 않나 싶다. 경제의 기초 체력(펀더멘탈)을 키울 수 있는 사회와 경제의 구조개혁, 재정의 무리한 팽창을 막으면서 동시에 전략적 초점 내지 우선순위를 두고 합리적 지출 중심으로 재정을 재편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일본도, 한국도.)
유류세 잠정세율 폐지, 소득세 과세 하한선('연간소득장벽') 인상 등 전반적으로 조세 부담을 완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물가 대응, 경제성장 투자, 국가안보 강화라는 3개의 축을 다카이치 국정의 핵심으로 두었는데 모두 재정지출이 동원된다. 특히 성장과 안보는 모든 역대 자민당 총리들이 역점을 두었던 영역이기도 하다.
아베노믹스 때에도 그랬지만, 너무 이상과 열정이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구매력 방어와 소비 진작,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 투자, 방재와 국가안보 강화를 위한 지출 증가는 정책목표로서는 모두 달성하면 최적인 것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건 어렵다.
특히 일본의 재정 여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실상 감세와 지출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이를 국채로 충당하겠다는 건 아베노믹스와 같은데 이미 천문학적이었던 국가부채가 더 천문학적인 수준이 되었다. 일본은행이 그때와 달리 금리 인상으로 기조를 바꿀 여지가 상당하다는 점도 있다. 물론 당장 일본경제가 어떻게 된다는 건 아니지만 지속가능성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이래 놓고선 나중에 소비세를 또 인상해서 불을 질러 놓고 물을 끼얹는 식으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래저래 서민들에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은 국가 주도로 민관이 조합하여 성공한 모델을 지녔지만, 더는 그것이 유효하지 않으며 민관의 역할을 명확히 나누고 관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패러다임은 일본에서도 벌써 30여 년 전부터 제시된 것이다. 80년대~90년대부터 자민당이 정경분리와 행정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민주당(1998-2016)의 부상은 사회보장과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다만 소비세 인상이나 공무원 감축은 전체적으로 비합리적인 자원 절감 전략이라고 본다. 과로하는 공무원들이나 서민들의 소비에 철퇴를 내리 꽂는 일이니까. 불가피하게 가진 사람이 더 부담해야 한다.
구매력 지지를 통한 고물가 대응은 생활과 직결되므로 필수이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단기 성장 문제는 민간에 맡겨두고 정부는 구조개혁과 생활보장에 초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생활보장 즉 사회보장도 사회서비스 전달의 효율화라던가 타깃 중심 복지의 강화라던가 하는 좀 더 효율적인 전략의 마련이 필요하다.
국제 질서가 혼란해지면서 각국 정부들이 국방력 제고에 좀 더 힘쓰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일본도 그런 길을 피할 순 없긴 하겠지만, 당장은 그게 우선순위는 아닌 것 같다. 방재 관련 기구를 신설하면 인력이나 재정이 더 소모될 것이고, 방위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방위 산업이 과연 그렇게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까 싶다. 국방비를 GDP 대비 2% 이상으로 인상하는 것도 보류하는 게 맞다고 본다.
물론 다카이치 총리는 AI, 반도체 등 전략 산업에의 투자도 공언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다 재정을 쏟아 붓겠다면서도 정작 재원을 최소 상당 부분 국채로 충당하겠다고 한다. 이건 정책 도박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아베가 가져 온 붐과 마찬가지로 다카이치도 붐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그 붐은 지속가능하며 또한 일본의 사회와 경제의 체질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최소한 노동 분야의 경우 일본에 필요한 구조개혁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측면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시간이다. 아베~기시다 내각까지 점진적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일단 가닥을 잡아 왔다. 일본의 평균 노동시간은 전체 노동자를 기준으로 할 때 2023년 기준 연평균 1,607시간이고 이는 1년을 52주로 볼 때 주 31시간 정도이다. OECD 회원국들의 연평균 노동시간이 1,752시간이므로 이보다는 낮다. 참고로 한국은 약 1,900시간 정도 된다.
하지만 해당 통계는 '모든 취업자'를 기준으로 한다. 파트타임과 비정규직이 많이 포함되므로, 정규직만 떼어 놓고 보면 평균 주 40시간 정도 된다. 그리고 주 49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 비율이 일본은 약 15%이다. 이는 미국(11.8%), 영국(8.9%), 프랑스(8.3%) 등을 확실히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체감 노동 강도가 높은 국가에 속함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과로사회까지는 아니더라도 피로사회 정도는 된다고 할까? 그리고 우리나라도 일본도 모두 이런 점이 저출산 현상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그런데 다카이치 총리는 자신이 롤모델로 삼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같이 2-3시간 정도 밖에 잠을 자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피부는 좀 안 좋아졌을 것 같다' 정도로 넘겼다. 정부수반이 과로를 하면 자연히 공직사회 전체가 더욱 과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아가 결정적으로, 다카이치 총리가 연장근로 상한 시간 규제완화를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마이니치신문 보도가 있었다.
동료 자민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야당 의원들도 총리에게 잠을 더 자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의 평균수면시간은 약 7시간 정도로, 8시간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롤모델인 대처의 건강 특히 뇌의 건강이 말년에 급속히 안 좋아졌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그의 과로와 극도로 적은 수면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일-여가 균형은 단순히 노는 것을 좀 더 풀어주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작게 보면 생존과 건강의 문제이고 크게 보면 사회 자체의 재생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육아 등 가족 생활, 여가 생활 등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도 충분히 보장하는 구조와 문화가 되어야 생산성도 향상될 수 있다.
아직 나라가 피로사회를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닌데 하물며 정부수반인 총리가 수면 시간이 적다고 말하고 결국 노동시간 규제까지 완화하려고 하는 게 그렇게 자랑할만한 일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좀 오버스럽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전반적으로 다카이치 총리의 일본은 열정적이고 활발하며 진취적인 국가를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국방이 강하고, 성장세를 회복하며,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본. 고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꿈꾸던 아름다운 일본과 일견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거창한 기획이 과연 시대적 흐름이나 일본의 현 상황에 맞는 것일까? 개인적으론 회의론에 서 있다.
이재명 치하의 한국도 대강 이와 비슷한 기획(? 그런 게 있었는지 잘 모르겠긴 하지만..)을 밀고 가는 중이다. 하지만 이는 90년대의 개발국가 모델의 유효 만료부터 2010년대까지의 체질 변화를 위한 구조개혁과는 역행하는 방향이다. 현대적인 체제에다 구식 전략을 합쳐 놓은 느낌인데, 지금은 예전과 같은 고성장 자체가 난망한 데다 되더라도 고용이나 소득, 소비, 자산 등에까지 전반적으로 긍정적 파급 효과를 미쳤던 그 시절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 미완된 2010년대까지의 구조개혁의 불씨를 되살릴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한국도, 일본도. 지금은 성장보다는 지속가능성이 우선적인 공적 가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