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어 스타머를 중도주의의 또 한 번의 실패로 평가할 것인가? 이러한 평가의 전제에는 스타머를 이전의 범중도좌우파 정치인들과 동일선상으로 이해한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이는 영국정치에서 중도주의의 주류화를 이끈 정치인이었던 토니 블레어와 그 이래로 주요한 변곡점이 되었던 데이비드 캐머런과 현재의 스타머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스타머는 무(無)비전인 정치인이다. 이 점에서 스타머는 블레어, 캐머런과 달리 중도주의의 진화가 아닌 퇴화 버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도주의는 시세와 맥락에 따른 가변성이 있고 창의적 재구성을 요한다. 예를 들어 블레어가 제3의 길을 제시했을 때, 이는 탈냉전/세계화/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 등 맥락에서 중도좌파 정치를 재정의한 것이었다. 즉 ‘좌파의 실용화’였다.
블레어가 만든 젊음+중도의 콤보는 2005년 매우 젊은 야당 당수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에 의하여 모방된다. 캐머런은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내세웠고 시민사회로 복지 전달 기능을 이양(Big Society)함으로써 대처주의와 일국보수주의를 창조적으로 결합했다. 이는 ‘우파의 인간화’였다.
결국 블레어와 캐머런은 모두 각자의 소속 정치적 전통(중도좌파/중도우파)의 큰 흐름을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이를 자기의 문제의식과 비전으로 재창조했다. 블레어는 1997년에 장기 보수당 정권으로부터, 캐머런은 2010년에 장기 노동당 정권으로부터, 스타머는 2024년에 장기 보수당 정권으로부터 교체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스타머는 비전이라는 것이 부재하는 정치인이다. 코빈주의를 배척했으나 신노동당이라는 말도 있고 동시에 청색노동당(Blue Labour, 사회문화적 우파 + 경제적 좌파)을 표방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부의 좌파들을 강하게 억누르고(블레어 시절에도 코빈을 제명/출당하는 수준의 일은 없었다) 국방지출을 증가시키기 위해 신노동당 내각 시절에 신설한 겨울철 연료 지원을 삭감하면서 내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 애초에 야당 당수 시절 싱크탱크 등을 통해 집권 시 국정 구상을 했던 블레어/캐머런과 달리 독일이나 스페인 등 최근에 집권에 성공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방문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자기만의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한 바가 없다.
스타머는 순전히 보수당 장기 집권의 피로와 환멸을 레버리지로 이용해서만 집권했고, 이것은 노동당이 여당이 되는 순간 유효기간이 만료하는 것이었다. 자기만의 비전과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집권을 하더라도 오래 가기 어렵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과연 노동당과 영국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의문이 제기된다.
중도주의의 창의적 재구성은 환경과 조건이 변하면 최적화의 해(解) 내지 균형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020년대 노동당의 경우, 단순한 중도나 신노동당으로의 회귀는 안 되고 스타머의 독자적 비전과 문제의식이 종래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맥락 위에 독자적 기치로 섰어야 맞다. 스타머는 그냥 중립기어를 넣은 것과 비슷한데, 중립(Neutral)과 중도(Centrism)는 다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차라리 코빈이 나았다. 코빈은 적어도 뚜렷한 철학적 기반, 문제의식, 비전,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1970-80년대 구좌파의 퇴조 이후 소멸한 도덕적 급진주의에 대한 부활 요청이었다.
리더십과 비전, 그리고 이에 기초한 정책 드라이브가 있으면 끝내 완벽하게 목표에 닿지는 못하더라도 방향과 운동이 생기는 것 자체만으로도 추동력과 희망이 생긴다. 2020년대는 팬데믹과 대봉쇄라는 암울한 세계화적 사건에서 시작해 시대 분위기와 환경이 암울하고 혼돈스럽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대침체를 근본적으로 이겨냈는가에 회의가 많고, 미국과 유럽이 권위를 잃었으며 내부적으로 문화 전쟁이 극렬해지고, 중국과 러시아가 노골적으로 신권위주의적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생태와 기후 차원의 지속가능성이 하락하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선진국들의 기성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것은 호황기 때에나 그럭저럭 먹힐 법한 무난하고 무색무취한 것들이다. 이러한 비전/리더십/권위의 부재가 2020년대 범중도 세력의 근본적 문제이다. 80년대에 형성되어 이후 2010년대까지 유지된 신자유주의적 구조화의 흐름에 대해서는 무대에서 물러난 전임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지만, 현재의 무기력함과 리더십 및 비전의 부재는 그럴 수 없는 사안이다. 2020년대 세계의 주류 범중도좌우파 정치는 권력(Power)만 있고 권위(Authority)는 없다. 이 점이 선배 정치인들과의 중대하고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의 맥락에서 보면, 중도와 포퓰리즘을 한 번에 결합한 특이한 사례가 이재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때 중도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는 것이, 이재명은 우선 정치적 진영 역학 구도와 실질적 정책의 영역을 분리해 전자를 부각, 격화시켰다. 본인이 대통령이 된 후 후자도 강조하면서 중도를 표방해 그걸 만회하려 하고 있으나, 2022년부터 그와 윤석열이 공동으로 새로 형성한 한국정치의 문화/구도/지형은 당분간 깨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이재명 본인이 그것을 깬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기에 결국 중도와 포퓰리즘이라는 희한한 귀결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중도라는 것도 스타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수준이다.
모두가 포퓰리스트가 되면 아무도 포퓰리스트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포퓰리즘에 집어삼켜졌지만 포퓰리스트가 아닌 정치인이 누구도 유의미하게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포퓰리즘에 잠식된 거대 양당의 중도/실용/민생 중시라는 자기 정의만 난무한다. 이것이 2025년 현재 한국정치의 본질이며 진실이다.
과거 보수-민주의 이원적 대립 구도와 양당의 진정한 의미의 중도화(그러니까 보수정당 대표와 민주당계 대표의 연설을 이름만 가린 채 바꾸어 놓아도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던 시절)는 진즉에 끝났다. 지금은 양당이 모두 외피만 중도화를 말하고 실제로는 서로가 극단적인 청산과 투쟁의 논리 속에 서로에게 저항하는 그러니까 제3자의 관점에선 양자가 모두 기득권이면서 동시에 저항자가 되는 기가 막힌 상황에 있다.
이 시대가 언젠가는 면역의 과정으로서 기억되고 새로운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끌 오피니언 리더십이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