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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문호를 확장하는 구조개혁이 필요하다

by 남재준

나는 본래 사회불평등과 사회계층에 그렇게 민감한 편이 아니었는데, 요즘 한국사회의 흐름이 다소 불안하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정치사회학 차원의 불안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과 사회적 명예 등의 자원들조차 점점 경제적 부를 보유한 이들에게로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영역에서의 우위가 다른 영역에서의 우위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고 각 영역의 자원 분배 원리가 고유한 의미와 맥락에 따라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왈처의 복합평등으로서의 정의가 침식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경향은 예전보다도 수직이동 정확히는 상향 이동의 관문이 좁아진다는 느낌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상층 방향으로 상승해 갈 수 있는 관문이 좁아지는 것이다. 이미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중산층이 두터운 타원형 구조에서 피라미드형 구조로 사회계층구조가 변동했다. 특별한 사회변동이나 개혁 등이 없는 한, 앞으로는 기술이나 자본을 보유한 이들에게 더 모든 사회적 자원이 집중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서울 상위권 대학은 대체로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이 많고 그들은 대개 최소 중산층 이상의 가정 배경을 지니고 있다. 중등교육과 초등교육 차원에서도 벌써 경쟁(예컨대 특목고나 자사고를 목표로 한 경쟁)과 상위 클래스의 경쟁(의대 입시 등과 같은 대입)을 위한 준비가 필수라는 인식이 있게 된 지는 꽤 되었다. 인서울 상위권 대학 출신들이 대개 학계나 정계 등 사회 주도층이 되므로 결국 개천의 용을 찾기가 근본적으로 더 힘들어진 상황이다.


예를 들어 SKY 출신이 결국 엘리트가 된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시 즉 수능이라는 시험 한 번으로 대개 대부분의 사람들의 대입이 결정된다면 그래도 개천의 용이 날 가능성이 있다. 예전에는 사교육이 전면적으로 규제되었고 모두가 못 살다가 잘 사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환경이 좀 나은(?) 편이었다. 맨 꼭대기의 재벌이나 정치인 자제들은 원래 특권층이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그런데 오늘날의 경우, 사교육 없이 공교육 만으로 모두 시험이나 대입을 커버한다는 것이 '가능은 한데 대개 쉽지는 않은' 환경이 되었다.


결국 수저론은 현실적으로 생애 기회라는 측면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고교에 따라 인프라 등이 다르기 때문에 학생부 등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수시 위주 전형에서의 유불리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고교에 보낼 경쟁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정보 등 자원에 관한 역량은 최종적으로는 경제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다. 이전의 경향 즉 인서울 상위권 대학 출신들이 엘리트 편입에 유리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이런 상황에서 고착화된 취업난과 전공 미스매칭 문제, 변호사나 회계사 등 전문직으로의 쏠림 현상 등은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느냐를 유불리의 변수로 만들었다. 중산층 이상 부모를 두어야 고시나 취준을 오래 버틸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든 일단 취업부터 하는 게 우선이고 그 뒤는 그 뒤에 도모해야 한다. 하지만 취업부터 한다고 해서 상향 이동을 기대하기는 예전보다 더 난망해졌다.


대표적으로 로스쿨 제도는 노무현이 만든 것이지만 노무현과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제도이다. 소득 연계형 지원 제도니 하는 것을 아무리 동원해도 하층이 격렬한 입시와 3년의 교육 그리고 변호사시험까지 감당한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결정이 못 된다.


사회 자체 차원에서도 조금 위험한 현상이다. 정치권력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등의 정치인들이, 사회적 명예는 대학교수나 변호사, 의사 등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을 가지는 기능을 하는 직업인들이 주로 보유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모두 사회 지도층 즉 엘리트가 되며, 불가피하게 이들은 경제적 부의 차원에서도 최소 중산층 이상이 되는 이들이 많다.


계층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혁명이 발생하지 않고 유지되려면 상향식 의사결정의 요소가 일부라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저소득층 배경의 변호사가 많은 것과 적은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단순히 성공 신화를 증명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층화된 사회가 파국으로 가지 않도록 균열을 접합하는 역할을 한다. 구체적으로 노동권과 사회보장 및 여러 개혁들을 통해 구조의 모순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가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기업이나 금융의 논리 위주로 대변하는 사람들이 과다대표되면 곤란하다. 공공은 시장과 어느 정도 건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기업과 금융이 경제의 중추가 되고 또 그 영역에 몸담은 사람들이 공공에도 충원될 가능성이 상당하므로 기업과 금융의 논리가 중심이 되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흘러가면 노동이나 서민의 입장은 단지 상층의 동정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동정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크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현상의 완화를 위해서는 구조개혁이 불가피하다. 사회보장의 지속가능성과 증진을 위해서는 중산층까지 조세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또 로스쿨 제도는 언젠가 혁파되어야 하고,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문호를 더 개방하면서 소수자들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교육혁신을 통해 현재 여러 차원에서 진행되는(내신, 수능, 자격 등) 교육평가들의 능력/역량 검증 타당도 등을 면밀히 재검토해서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결국 기회의 구조를 어떻게 하면 경제적 배경의 영향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형평하게 만들어 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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