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은 아니지만 국회로 갑니다>를 읽고 1

1부 '정치, 불신의 벽을 넘어'를 읽은 후의 생각들

by 남재준

1-1. 정치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를 읽고


보통 ‘삶의 문제’라고 하면 경쟁, 취업, 대출, 자영업, 가족관계, 성적, 진학, 부양, 자립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청소년 야구단이라는 건 글쓴이 본인 말마따나 일반적인 학교에서 하기 어렵고 의지와 사람이 모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해냈다는 점에서 글쓴이는 일반인과는 확실히 좀 다르고 리더십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삶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국민들이 정치에 회의감을 갖는 건 맨 처음에 언급한 '삶의 문제'에 현실적으로 정치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에서 당장 정치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정치가 아무리 양질이어서 대입 구조개혁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하더라도 그건 몇 년은 지나서야 가능한 것이고 현실적으로 개인에게는 이익이 되기 어렵다. 정치에 대한 혐오는 문제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치가 개인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진로 프로젝트를 위해 김현미 의원을 만났었다. 그때는 정치인이 꿈이었으니까. 글쓴이가 겪은 바와 같이 놀랍게도 아버지가 SNS로 그냥 해본 연락에 김현미 의원이 응해서 부모님과 의원회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때 기억하는 건 내가 수학을 잘 못한다는 부분을 나인지 엄마인지가 언급했는데, 김 의원이 자기 자식들도 본래는 그랬었다고 했던 거 같고 다 쓸모가 있다고 했다. 그때는 아직 중학생이었고 수학이 그 정도로 내 인생에 스트레스를 주리라고까지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국어/수학교육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국어야 그렇다 치고, 모든 사람이 수학을 수능 수준으로 잘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형식적으로는 그런 걸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 진학이 아직도 고교 졸업 후 기본으로 생각되는 나라에서, 실질적으로는 수학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물론 기초학력보장은 중요한데 수능이나 제반 입시에서 수학의 난이도와 영향력은 그 정도가 아니질 않은가. 중요한 건 정치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나 고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거다.


중앙 차원에서의 정치는 단기적으로 손쉽게 바꿀 수 없는 걸 바꾸는 거다. 그리고 대개 그건 당장, 지금의 삶의 문제 개선에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바꿀 건 바꿔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더라도 우리 정치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냉정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2. 포용적 시장경제를 이끄는 민주주의의 힘을 읽고


민주주의냐 시장경제냐 하는 이분법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지도 않는다. 윈스턴 처칠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겪어본 모든 최악의 통치형태 중 가장 나은 것'이라는 취지의 언급에서 최악이라는 것의 기준이 효율성만을 본위로 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처칠의 배경 등을 고려하면, 중우정치의 폐단 등을 걱정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등이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본 이유이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불편해지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뿐이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그렇다. 독재냐 민주주의냐는 사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냉정하게 말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지를 본위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신의 생활에서 느끼게 되는 불만을 표출한 것을 두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거나 독재의 효율성에 대한 갈망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다소 부적절하다. 더 강한 봉쇄론은 미래통합당에서 제기한 것이었고, 국민들은 2020년 ‘팬데믹’ 총선에서 민주당에 역대급 압승을 안겨주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거리두기 규제에 대한 불편함과 심리적, 경제적 어려움 등이 제기되었다. 그것도 생활인 입장에선 할 수 있는 말이다. 독재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러니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감안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비판한다는 말은 사실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민주적이지 않기도 하다.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서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이니까. 정치권엔 국민에게 이해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정치권이 국민을 이해해야 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또 기본권, 사법의 독립, 언론의 자유 이런 개념들은 광의의 민주주의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민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법치주의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고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에 대해 소수의 항변권 보장이나 다수결을 규범적 가치로 통제하는 등의 작용을 통해 민주주의를 견제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심이냐 아니냐 선이냐 악이냐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대개의 경우 그런 개념들은 스펙트럼상에서 이해된다. 인간은 특별히 악해서라기보다도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한다. 그건 단순히 시비와 같은 관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과 타당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게 아닌 것도 맞다. 반대로 인간은 사회성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회성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사회성을 전제했고 그것이 인류의 생존과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음도 인정했지만, 동시에 사회성이 내재한 개인과 소수에 대한 폭력성을 극도로 경계했다. 결국 이기심이나 이타심은 선악, 시비 등과 일대일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견해도 이기심이라는 건 선악과 섞어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이 최선을 선택하는 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최선을 선택하는 게 과연 억제될만한 것인가, 그리고 일견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을 사회적으로 억제한 것이 타당한가는 현실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서울에 집중되는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최선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지방으로 옮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건 옳은 것일까? 그런 언급은 없지만, 본문에선 사실상 개인의 선택이 악으로 되는 경우와 사회적 억제가 선으로 되는 경우만 상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불완전한 개인의 선택을 억제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고 최악과 차악 중 최악을 선택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3. 대한민국 국회 vs 스웨덴 국회를 읽고


우선 국회의원 정수가 축소되는 건 잘못이라는 점에는 동감한다. 그것이 정치혐오에 기반한 것도 맞다. 하지만 현실정치/정치문화에 대한 불만과 정치혐오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사실관계를 보면, 우리나라도 1988년 이후 국회의원 정수를 줄인 적이 있었다. 2000년 총선(제16대)에서 국회의원 정수는 273인이었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전체적으로 긴축 기조가 나타나면서 정치권도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분위기의 연장선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인구비례원칙 위반(수도권 과소대표, 농어촌 과대대표)을 이유로 해당 공직선거법 규정을 위헌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2004년(제17대) 총선에선 원상 복귀되었다. 더하여 비례대표제 확대를 통해 여성, 전문가 등의 국회 유입을 늘려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더 증가시키는 건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300석은 일종의 타협선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한 건 국회 정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것보다는 국회의원의 특권 남용을 비롯한 정치문화의 일신, 그리고 지역구-비례대표 비율이나 소선거구제 조정 등을 통한 다당제 유도 등이다.


지역구+소선거구제 체제하에서는 국회의원은 글쓴이가 언급한 것처럼 지역구에 신경을 써야 하므로 국가 전체 차원의 입법이나 정책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런데 비례대표만으로 국회를 채우겠다는 발상도 급진적이기는 하다. 지역구라 하더라도 중대선거구제를 시행하면 최소한 정당 차원에서 공동으로 지역구 관리에 대응하게 되므로 의원 개인이 지는 부담이 약간은 감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나의 아이디어 내지 경우의 수이다.


정부수반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고 권력이 분산되는 것이 꼭 의원내각제의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 80년대 이후 내각의 집단책임원칙이나 여당의 사전심사제 등이 형해화되고 ‘대통령 같은 총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e.g. 마거릿 대처, 토니 블레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 중요한 차이는 정부형태보다는 정당체계이다. 일본은 일당우위제, 영국은 양당제, 스웨덴은 다당제이다. 단독 과반이 사실상 불가능한 정당체계가 될 수밖에 없는 선거제도를 가지면 당내 권력은 몰라도 총리는 정국 전체의 차원에서는 연립여당들과 합의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국민들이 정치인들에게 가지는 불만은 문화나 이미지 차원이기도 하다. ‘높으신 분들’이라는 이미지에는 국회의원들이 고급 차를 탄다거나, 보좌관들에게 갑질을 한다거나, 격렬히 싸우는 듯하면서도 서로의 체포동의안에는 슬며시 방탄을 한다거나, 자당 대표와 대통령을 무조건 옹위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영향을 미쳤다.

국회의원 세비가 1억 5,000만 원인데 우리나라 직장인 평균 연봉이 4,300만 원 즉 1/2도 안 된다는 건 일하는 국민 대다수보다 국회의원들이 단순히 ‘더 많이 받는다’라는 정도로 표현할 수 없다.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이 높은 건 정치의 현실이지 세비라는 제도적 결정에 있어서의 정당화 근거로 삼는 건 ‘업계 옹호’나 매한가지다. 국회의원은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 든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유럽에선 실제로 그렇다.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정치인을 전문가나 고위층이 최종적으로 떨어지는 직업으로 생각해왔고 보스정치 문화도 강한 등의 영향이 있다. 국회의원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대표이자 선출직이다. 일반적인 공공조직/기업의 연공제하에서의 승진의 결과처럼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리고 국회의원의 연봉을 아무리 올린다고 하더라도 금융권처럼 고액 연봉을 받는 곳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또 사실은 따라잡아서도 안 된다. 기업인이나 금융인 같은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는 것이 꼭 공익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기의 내집단이나 내집단이었던 집단에 호의적으로 생각한다. 국회보좌관도 여의도의 입장을 시나브로 대변하는 것처럼. 이해와 대변의 경계는 흐릿하다. 정치인은 기업인이 아니다. 고액 연봉을 받지 않고도 공공에 복무할 수 있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게 맞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국회의원의 세비가 낮아서가 아니라 애당초 거대 양당의 공천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대 양당의 후보가 되어야만 당선이 될 수 있는데 웬만한 지역구는 현역 의원이나 쟁쟁한 스펙을 가진 이들이 서로 다툰다. 그런 판국에 일반적으로 생계부터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후보로서의 스펙을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비례대표에서 소수자나 노동자 등을 그나마 안배할 수밖에 없게 된다(이제는 '유의미한'(=민주당과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진보정당이 원외로 밀려났으니 그마저도 없게 되었다).


국회의원 세비를 완전히 무보수로 하는 건 터무니없는 소설 같은 얘기다. 그래도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이유는 일정 부분은 정치의 전문성을 인정한다는 부분도 있고 객관적으로 업무량이 많은 것도 맞으며 겸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봉급을 주는 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수준에서 좀 낮춘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못 먹고 살 정도가 되지는 않는다.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에 관한 논쟁도 실은 제도와 문화의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원론적, 제도적으로는 헌법상 국회의원의 권리가 맞다. 이는 국회에서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언로 개방, 그리고 과거 독재 정권 시절의 무분별한 국회의원 신변 위협 등에 대한 반성으로서 검찰권/경찰권을 쥔 대통령과 정부를 엄정하게 방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현재의 한국정치에서 불체포특권은 원수처럼 서로를 청산해야 한다고 으르렁거리는 거대 양당이 정작 뇌물수수 등의 사건이 발생하면 ‘업계 동료’로서 서로를 방탄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나아가 최근에는 이재명 대표로 대표되는 ‘자당대표 방탄’의 수단도 되었다. 또 면책특권은 국회에서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말들을 쏟아내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방어막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러니 국회의원에 대한 비판은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그 제도가 실제 운영되는 정치 현실, 정치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국회의원 정수가 줄면 더 소수가 더 다수를 대표하게 되므로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건 맞다. 하지만 국회의원 수를 늘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권력이 분산되는 건 아니다. 우리보다 국회의원 수가 많은 선진국들은 오히려 당의 기율이 엄격하다(그게 의원수가 많아서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2019년 금태섭 의원 징계 파동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국가기관도 아닌 정당이 국회의원의 자유위임을 실질적으로 침해/위반하고 있다. 국민의힘도 예외는 아니다. 검찰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던 국민의힘의 주류에 반대한 권은희(1974-) 전 의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검찰을 옹호하느냐 안 하느냐를 떠나서, 국회의원이라는 헌법기관의 신념을 보장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당론 투표를 하는 것이 일상화된 것을 넘어서, 당내에서 당대표나 주류에 대해 이제는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과거 120석대 정도였던 시절과 180석인 현재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의견의 다양성이 있다고 보는가? 기본사회를 당헌에 삽입할 때도, 한 경선 후보가 무려 90% 이상의 득표율을 받았을 때에도, 이재명 대표가 조건 없이 검찰 수사에 임하겠다고 한 말을 정면으로 뒤집었을 때에도, '자기 이익' 때문에 당의 앞길을 막지 말라는 식의 협박을 의원들에게 했을 때에도 민주당 의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사실 조직 논리상으로도 수가 많아지면 의견을 수렴하라는 정렬의 압력이 더 커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결국에는 개인의 의견이 충분히 보장되기 어렵고 지휘권을 더 강하게 해야 의사결정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회는 100분 토론이 아니라 입법이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산출'해서 결론을 내야만 하는 기관이니까. 다들 한마디씩 말을 얹기 시작하면 배가 산으로 갈 가능성이 커지는데 사람이 많으면 이런 경향에 부채질을 하니까. 물론 그렇다 해도 문화와 행태에 따라서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고도 의견/표결의 자유 보장과 숙의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결국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숙의와 의견의 다양성을 모두 잡는 건 정치문화의 문제이지 국회의원 정수와는 무관하다.


정치 혐오는 정치 현실에 대한 경멸인데 그것은 완전히 타당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정치제도에 대한 섣부르고 과도한 변동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치제도는 대개 정치문화가 올바르면 남용될 일이 없는 것이다. 물론 정치제도가 개선되어 정치문화의 영향을 덜 받도록 하긴 해야겠지만 문화는 제도로 개선하는 데에 한계가 매우 크다.


다양한 목소리의 반영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국회의원 후보 공천 제도 개선이나, 앞서 언급한 선거구제 개정이나, 대표 결정 방식의 개정이나, 이러한 수단들을 통한 다당제 구도의 확립이나, 국민참여경선제의 확대나.. 하지만 국회의원 정수 확대 자체는 다양한 목소리의 반영이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수 확대만 하면 그냥 국회의원의 ‘TO’가 늘어나면서 공천을 신청해볼 만한 엘리트들이 더 좋아할 뿐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논의에 요즘 국회의원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메인 의제로 올라오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이재명 당시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현 주류는 2024년(제22대) 총선 때 정치개혁은커녕 국민의힘을 더 눌러야 한다는 명분으로 되레 비례대표제를 축소하고 지역구를 증가시키자는 국민의힘 의견에 동참하려는 기미까지 보였다. 결국 누더기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개선되지 못했다. 여의도는 국민에게 업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할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냉정한 현실 인식부터 필요한 시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국민주권, AI, 균형발전? 明 정부는 뭘 하고싶은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