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은 아니지만 국회로 갑니다>를 읽고 5

4부. '지역에서 정치의 희망을 찾다'를 읽고

by 남재준

10. 내 삶에 직접 닿는 지역정치 ~ 12. 거버먼트의 시대에서 거버넌스의 시대로 를 읽고


마지막 장이다.


- 이 장은 국회보좌진으로 지역과 국회에서 활동한 글쓴이의 전문성과 경험이 느껴졌다. 지방자치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원칙적인 방향에 공감한다. 다만 이제는 역효과도 정밀하게 예측하여 그에 대한 중앙조정 등의 대안을 수반하는 자치분권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이 장의 메인 주제인 지방자치보다 중앙정치에 대한 내용이 더 많아졌다.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동시에 분리되어야 하는 운명에 있다. 다만 그 모두가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사실이다. 지방선거나 대선/총선 모든 선거가 제대로 된 '계약'이 될 수 있도록 매니페스토와 정책 중심 정치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요코미치 다카히로 전 일본 중의원 의장은 사회당 출신 홋카이도지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지방자치에는 이데올로기는 필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민당이 압도적 우위인 55년 체제의 지속 중에도 ‘혁신(일본에서 사회당 등 좌파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개념) 도정’을 이끈 지자체장들은 존재감을 가졌다. 다른 한편으로 지역 차원에서 청소년, 주부 등이 직접 삶 속의 구체적인 생활 이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도 제시하는 ‘생활정치’의 흐름이 9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는 후에 민주당이 성립되었을 때 그 노선의 일환으로서 지방분권과 생활정치를 강하게 내세우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모델이 중앙에 들어왔을 때는 결국 좌초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차원과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지방이 소멸하거나 기본적인 인적/물적 인프라가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는 덜하다는 등의 상황에서는 지방분권이나 지방자치가 구상대로 실현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수도권의 신도시들은 재정 기반이 탄탄하지만 지방의 많은 지자체들은 재정 기반이 약하다. 또 토호 중심으로 지방 권력이 집중되거나 지역이기주의가 성행하는 경우에는 지방자치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중앙 차원의 개혁을 자치분권을 명분으로 가로막겠다고 들 수도 있다.


- 지방분권이라는 것은 재정분권을 반드시 수반한다. 재정분권이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재정을 관리하고 재원을 확보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는 중앙정부로부터 더는 가급적 지원이나 의존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유야 어찌 되었건 만약 현 상태에서 재정분권이 이루어지면 현실적으로 지방자치단체들이 알아서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재정자립도가 지자체마다 차이가 나는 이유는 세수 기반의 차이가 하나의 요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자체 재정 운영의 방만함과 비효율성은 이전부터 지적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남과 같이 기반이 탄탄하고 성공적인 행정을 이룬 모델을 모든 지자체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분권을 하더라도 어느 시점에는 중앙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 지방자치를 중앙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나 정치 신인들의 훈련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 자체로 완결된 무대로 보아야 한다는 글쓴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 지방자치가 질적으로 고도화되는 것이 분권과 자치의 고도화에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고 분권을 할 수 있다. 또 지방의원 정당공천제와 국회의원 지역구+소선거구제를 재검토해 지방의원의 중앙으로부터의 영향을 완화하고 국회의원이 지역구에 신경 쓰느라 중앙정치와 입법에 써야 할 신경이 분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방의원과 국회의원의 기능이 제대로 분리되고 양자가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상호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된다.


- 국회의원의 자유위임 원칙(대의제에서 대표자(국회의원)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 헌법 제46조 제2항)은 매우 중요한 헌법적 원리이다. 왜냐하면 국가적 차원은 매우 복잡하고 거시적이므로 현실적으로 모든 이해관계 등을 완벽하게 조정할 수 없으며, 수 개의 민의 중 어느 하나를 우위로 둔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대리인은 경제적 이익만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주식회사의 경우나 생활 속의 구체적인 이익을 두고 생각하면 되는 지방자치단체의 경우는 설명할 수 있지만 전국 단위에서 여러 차원의 이익과 이해와 신념 등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중앙 정치인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방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은 그 사무가 주민의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주민의 의사가 더 강하게 반영될 수 있어야 맞다.


- 글쓴이가 설명해 준 것처럼, 현실적으로는 국회의원은 국가적 차원(신탁인)과 자기 지역구의 차원(위임인) 둘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정치인형의 입장에 있고 이는 이해할만하다. 정치인도 정치를 제약하는 구조와 제도 속에서는 자기의 사명과 이익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선택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를 점진적으로라도 좀 더 자유위임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정당과 지역으로부터 국회의원을 가능한 한 분리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 최근 몇 년간 당원이냐 대의원이냐의 논쟁이 민주당 내에서 가열되었다. 그런데 사실 어느 쪽이건 민주당과 같은 대형/수권 정당에게는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당원이 많아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국민의 민의와 동치로 볼 수는 없다. 참여 열의를 넘어 사실상 팬덤 정치에 빠진 당원들이 위주가 되는 건 곤란하다. 사실 팬덤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팬덤이 생기면 무차별적으로 같은 지지자들마저 공격하고, 또 정치인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넘어 사수하려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때 검찰개혁을 지지하는 문재인 지지자와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나도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긴 하지만 검찰개혁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토론이 이성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일방적/감정적으로 개혁에 반한다는 식으로 그 사람이 나를 몰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그때부터 문제는 심각했다. 팬덤이 점령한 정당에선 이제 ‘누가 더 진짜냐’를 다투는 강성/순도 경쟁에 빠지며, 형식적으로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인데 실질적으로는 지도자가 당원의 여론을 설계하고 동원하는 방식이 된다. 이미 친문이 주류였을 때에도 민주당은 명분 만들기를 위해 빤히 정해져 있는 당원 투표를 이용해 오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 정치는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중앙으로 수렴되는 문화와 구조를 가지며 정치의 생활화가 이미 실현된 서구 국가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당원과 당 밖의 국민 간의 정서와 생각에 상당히 차이가 난다.


- 2015년 2월 8일 치러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45.3%로 41.78%를 득표한 박지원 후보를 간신히 이겼다. 문 후보는 권리당원 ARS 투표(문 39.98%, 박 45.76%), 일반당원 여론조사(문 43.29%, 박 44.41%)에서는 박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대의원 현장투표(문 45.05%, 박 42.66%)에서 문 후보는 박 후보를 근소하게 앞섰고, 무엇보다 일반국민 여론조사(문 58.05%, 박 29.45%)에서 문재인 후보가 박지원 후보를 상대로 압승했다. 일반국민 여론조사 반영 비율은 15%였지만 이는 매우 중대한 시사점을 남겼다. (참고로 대의원 45%, 권리당원 30%, 일반당원 10%였다.)


- 2025년 6월 3일 대선 때 지상파 3사(KBS/SBS/MBC)의 심층 출구조사에 따르면,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사람들 중에 이재명 당시 후보의 재판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42.7%였고 중단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44.4%였다. 당원들의 압도적 중단 여론과 달리 실제 민주당 지지층 내부의 여론은 팽팽했다. (참고로 전체 응답자의 63.9%가 ‘공직선거법 파기환송심 등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을 계속해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집계됐다. ‘재판을 중단해야 한다’는 응답은 25.8%,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0.3%였다.)


- 국민참여경선제가 아니면 문재인과 같은 사람이 활약할 수 없고, 당의 중요한 문제들에서 제대로 된 민의를 읽어낼 수 없다. 완전국민경선제까지는 안 되더라도 국민참여경선제의 비율과 일반국민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국민참여경선제의 활성화 논의가 있을 때에도 역선택 문제 제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한국경제에 유경준 전 통계청장/전 국회의원(미래통합당)이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실행 가능성 자체가 높지 않다. 표본에 걸릴 확률이 높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과에 유효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낮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이제까지 국민참여경선제를 실시한 선거 중에서 실제로 역선택 때문에 문제된 케이스 자체가 없다. 결국 역선택이라는 건 그냥 ‘그럴 수 있다’라는 정치적 핑계이고 공포 마케팅에 지나지 않는다. 역선택 방지 조항을 삽입하는 한이 있어도 국민참여경선제는 더 강화해야 한다.


- 정치인 이재명의 성공과 실패, 허와 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Governance와 지방분권을 하나로 묶어 이해하고, Government와 단일제 하에서의 지방자치를 묶어서 거칠게 이해한다고 하자. 글쓴이의 이해처럼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자치단체장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지낼 때 지방분권 강화와 창의적/추진력 있는 지방행정에 기여했다는 것이 민주당 내의 평가이다. 이는 나아가 거버넌스와 풀뿌리민주주의와도 연결되고, 당대표일 때의 당원민주주의 그리고 현재의 '국민주권'정부로까지 연결된다.


-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재명 성남시장/경기도지사가 그렇게 추진력 있게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지방자치단체장에게 권한이 집중된 구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이재명은 이제까지 국민의 직접 참여를 강조해 오면서도 자신이 공직에 있을 때에는 (나쁘게 보면) 독단적이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점들은 민주당 대표와 대통령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문제는 정확히 이 지점이다. 중앙의 경우 지방과 달리 여러 이해관계가 더 복잡하고 무엇보다 정부와 국회의 관계가 훨씬 수평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중앙정치에 등판한 후 대체로 시민참여나 민주적 정국 운영보다 당원결집과 대내적 강경한 획일화 + 대외적으로 강경한 적대로 나아갔다. 당대표 이재명은 당의 통합적 운영을 미필적 고의로 하지 않은 셈이었고, 선거제도개혁, 금융투자소득세, 연금개혁, 노동시간 규제 등 정책의제들마다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침묵하거나 뒤로 가서 다른 말을 하거나 일부의 여론에 휘둘렸다. 또 대통령이 된 현재에는 뚜렷한 국정 철학/비전/전략이 있다기 보다는 개별 이슈에 대한 지적 등이 위주가 되어 있고 정책에 대해서는 밋밋한 인상을 준다.


- 지방자치는 이념의 영역이 아니지만 중앙정치는 생활만의 영역은 아니다. 제도와 구조의 영역이다. 국가적 차원의 숙고와 철학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지방자치단체장 시절의 마인드로 대통령직을 수행한다는 인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성남시장/경기도지사일 때는 권력이 집중된 지방자치제도를 잘 활용했고, 당대표와 대통령일 때에는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의 '밀어붙이기'와 '비이념' 마인드를 중앙으로 가져갔다. 다른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주권이나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하지만, 지난 노동시간 규제 완화 논쟁에서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이재명 당시 대표가 입장을 정해놓고 그냥 일방적으로 그것을 말하려고 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고 국민보다 당원이 우선한다는 것처럼 당원중심주의를 앞세우기도 했으며 나아가 지자체장 때와 마찬가지로 대화를 하긴 하는데 사실상 국민의 뜻이 어떻다 라고 정하고 이재명 대통령의 뜻대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짙다.


- 이재명판 민주주의에는 허와 실이 있다. 명목상으로는 주민이나 당원(국민이 아니라)의 참여에서 나아가 '직접' 결정을 강조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민의는 이렇다'라고 대의자가 정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식이다. 그런데 결국 이재명은 역설적으로 집권적인 현행 지방자치 구조 안에서 성장한 정치인이며, 또 주권이나 참여 등을 강조하는 이상의 실제는 결국 이재명에 대한 철저한 동의와 그의 강한 밀어붙이기를 민의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진보적 이상이 현실과 결합했을 때 현실적/결과적으로 나쁜 형태의 포퓰리즘이 된 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재명의 시정/도정/당무/국정은 모두 '레토릭'과 '실제'를 정확히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 사실 Governance는 본래 Governing/Government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개념을 우리나라에서 분리해 이해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집권적/단일적/하향식으로 국가를 운영해왔음을 시사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관계는 사실상으로는 정부 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앞으로 지방분권이 고도화되면 더 확실히 그러한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거버넌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와 여러 민간 주체 중 특히 시민사회의 협력적 거버넌스(Collaborative Governance)를 의미하는 경우가 꽤 많아 보인다.


- 건강보험 본인부담상한제가 발달해 온 역사 같은 경우를 보면, 협의가 아니라 사회운동조직의 거센 요구와 항의 그리고 정부의 부분적 수용 내지 보류/거부 등의 상호작용으로 정책과정이 돌아갔다. 참여정부는 거버넌스를 지향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이는 정치과정상 정책결정기구의 입장/사고와 투입(Input)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운동조직의 입장/사고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구하는 사람과 전달하는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대립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현실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가적 의사결정을 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에게 좌절을 안긴다.


- 노무현 대통령을 상징하는 브랜드는 ‘참여민주주의’지만 실은 거기에는 내재된 제약 조건도 있었다. 시민들은 언론 투고나 사회운동이나 입당 등을 통해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지지하는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건강한 거리를 두고 비판의 여지가 없는지를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 ‘깨어 있는’ 시민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인식과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타인과 공감/공존하고 타인으로부터 배우면서 계속 자기 성찰/반성을 통해 발전하는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듯이 만사에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또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노 대통령은 일종의 ‘사회적 테크노크라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전문가와 관료의 독자적 기능은 더 고도화되어야 하지만, 그는 동시에 민주적 태도와 사고로 업무에 임해야 한다. 정부혁신(지능형 의사결정시스템, 집단학습 등)과 전자정부(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홈택스 등) 등을 가열 차게 추진하고 재임 말년에 참여정부 평가 포럼을 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는 ‘위원회 공화국’을 만들었다는 비판이나 특히 노무현 정부에선 ‘실험적인’ 결정을 많이 했다는 비판도 들었다(인사행정에서 다면평가 활성화의 실패 같은 것). 하지만 계속 도전하고 변화해야 점점 변화에 가속도가 붙는 시대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생각이고 이건 오늘날엔 더욱 맞다고 생각한다.


- 지식인 특히 대학교수들은 정부를 비판하고 분석하는 기능을 하고, 정부에 참여하면 객관성이 하락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과학은 본래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여 그 개선에 도움을 주고자 시작된 분야이다. 오늘날 사회과학은 실천이나 예측보다 사후적 분석에 그치는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위원회 공화국’이라는 비판이 있을지라도 지식인 입장에서 자기 분석의 허와 실을 경험을 통해 알아야 하고, 또 정치인이나 관료 입장에서는 정치적/행정적 맥락 안에서만 생각하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비효율적이라 하더라도 시도해보지 않으면 학습이 없고 학습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정부 위원회건 공론화위원회건 전문가와 시민사회와 일반시민들의 국정 참여를 위한 방안과 전략을 고민한 참여정부의 노력은 평가할만하다. 실제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면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정치적 책임감이 제고된다. 민주주의의 개혁을 위해서는 시민이 정책에 관하여 중앙 차원에서도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전문가의 참여도 제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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