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감정과 서사 중심 정치

by 남재준

우리나라 정치는 모든 선진국 정치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의 특색을 지닌다.

그것은 '감정/서사 중심'이라는 점이다.

사회문제/정책의제와 이를 둘러싼 인식과 신념의 대립이 주가 되는 대개의 선진국과 달리, 우리 정치는 정책은 부수이고 정체성, 감정, 드라마가 짙게 깔려 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보수, 진보 심지어 중도까지도 모두 개인 서사나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자수성가한 탁월한 민주주의 수호자이자 사이다 개혁가' 이재명,
'권력에 항거한 정의로운 검사이자 자유민주주의 수호자' 윤석열,
'계엄을 막아낸 보수 정치인이자 스마트하고 스타일리시한' 한동훈,
'점잖고 합리적이며 절제된 김-노-문을 잇는' 이낙연,
'의사, CEO를 모두 겪으며 새정치와 중도로 정치를 바꾸는' 안철수...

물론 정치인들은 본질적으로 문화적 상징이자 이미지가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다시 말해 국민들에게는 정치인들이 항상 어떤 이미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윈스턴 처칠은 '우리 위니(Our Winnie)'라고 불렸고, 해럴드 윌슨은 자기를 '서민이자 보통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파이프 담배와 가넥스 코트를 애용했고, 존 F. 케네디는 젊고 역동적인 리더십의 이미지를 일부러 연출해 내기도 했다.

동시에 이 모든 정치인들은 이미지와 별도로 뚜렷한 개인의 신념과 정책이 있었다.

또 이념이나 신념은 사실 그의 사람으로서의 스타일과 언행, 바이브 등 인적 요소에도 영향을 미치므로(결국 이념도 그 사람의 가치관에서 온다) 서사나 느낌이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즉 그 사람의 언행이나 행보나 스타일이나 바이브 등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이념과 정책 지향성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또 정치는 기본적으로 기계적 기능이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한국정치로 다시 돌아와서 볼 때, 예를 들어 한동훈은 어떤 보수이며 이재명은 어떤 진보인가?

정직하게 말해 이 질문을 무슨 '이념적'이라는 등의 핑계로 회피하는 건 기만적이다.

중앙정치는 이념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국정이라는 건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거대한 장(Field)이며 시스템인데, 최소한 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정책적 대안의 패키지 그리고 이것들을 묶는 비전과 원리는 있어야 한다.

애초에 그런 방향을 제시하는 게 다시 말해 '이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지'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이 하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도'라는 말도 실은 우리 정치에선 누가 갖다 붙이건 상징과 이미지용 간판에 불과하다.

본래 중도라는 것이 (그 자체로 완결되었거나 최소 이미 어떤 정책 지향성을 예고하는 보수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라벨과 달리) 어떤 '내용'을 가졌느냐로 승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또는 정치의 서사와 감정이 정치에 너무 짙게 깔리면, 정작 정치의 본령이 훼손된다.

국민들이 나름의 문제 의식이 있고, 신념과 정책에 비추어 정치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느낌으로 또는 진영 논리에 따라서만 정치인을 선택하는 건 곤란하다.

게다가 우리 정치는 한 술 더 떠서 정치인이 국민들의 생활 속의 어려움으로 다가가 경청하고 공감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국민들 중에 특히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정치인에게 공감하고 그를 띄워주지 못해 안달이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왜 그렇게 그를 띄우냐고 묻는다면, 앞서 언급했던 그런 서사들이 어김없이 튀어나온다.

자수성가니, 정의로운 검사니, 점잖은 신사니.

결국 그 끄트머리엔 '이 사람이 나라를 구한다.'로 귀결된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부풀려 놓은 기대감은 필연적으로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가 크게 곤두박질치기 마련이다.

정치를 포함해 모든 인위적인 노력에는 내재적 한계가 상존한다.

선거 과정에서의 토론이나 매니페스토 등은 결국 그러한 기대치를 현실적인 수준까지 낮추고, 후에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인이 제시하는 프레임과 정책 등의 내용 안에서 느낌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정치문화가 이렇게 흘러온 데 대한 책임은 정치인들에게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은 상당 부분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내용과 정책이 아니라 감정과 서사가 중심이 되는 정치는 결국 민생에 닿지 못하고, 계속 피로만 쌓여간다.

제일 심각한 건 그렇게 정치인이 연예인처럼 떠받들어지고 소비되는 동안, 정작 정치가 진정으로 해야 하는 구조개혁과 정책 논의는 완전히 실종되거나 그런 이미지 만들기나 프레임 전쟁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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