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서 신년 당부로 정부에 ‘모든 정책 초점을 성장에 맞춰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성장은 기업이 알아서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이 말을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내 말의 취지는 ‘시장이 책임질 영역은 시장이 책임져야지 정부에 편의를 봐 달라고 하면 안 된다’라는 뜻이다.
정부가 시장의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들을 유도(경제적 유인. 그것도 가급적이면 긍정적 유인 위주로.)하는 식으로 구조 재편을 도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장 자체를 직간접적으로 통제하거나 해서 성장 자체를 직접 책임지는 것, 그리고 시장이 대개 과점된 상황에서 소수 대기업들의 편의를 봐주는 식은 안 된다.
기업은 사람이 아니라 조직이고 사회경제적 권력의 주체이며 따라서 일반적인 자연인보다 더 큰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대기업들이 한국경제를 책임지고 있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결함이 있는 것을 계속 미봉책으로 막다가 치명적인 문제가 닥쳐 훨씬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그게 더 문제이다.
이 경우가 정확히 1997년 외환위기이다.
시장에 자유만 주고 자기책임을 면제해주고, 정부가 자꾸 급할 때 도와주고 급하지 않을 땐 놔 주니 해이가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마 그때는 성장 드라이브와 안정적/지속적 고용이 유지되던 때이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담보되지 못한다.
성장이 고용 창출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경제 생태계가 몇몇 기업들에 의해 과점되어 있으면 경쟁 원리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정치인들과 달리 기업의 지배자들은 명목상 사적 영역에 있어 제도적 통제를 거의 받지 않으면서 세습까지 하므로 정치사회적 차원에서까지 위험해진다.
시장의 재편은 느리고 고통스럽다.
가계의 실직이나 기업의 도산이나 지역경제의 침체 등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그걸 계속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피해를 최대한 방어하면서 동시에 국민에게 정직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관치적 개입과 간섭이 싫으면, 관치적 특혜나 이익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
미안하지만 중소기업 등의 차원에서도 이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할 때마다 중소기업이 제일 곤란해한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최저임금을 동결하거나 인하하면 그건 퇴행이다.
임금이나 원자재 비용 등의 지원을 통해 정부가 비용의 일정 부분이라도 흡수하는 방식이 낫다고 본다.
중소기업의 고용/노동 환경이 좋은 편도 아닌데 비용 부담을 완화해준다고 임금 규제를 완화하면 가계는 저질 일자리 증가분을 편익이라고 받아들여야 하고, 기업은 그나마도 고용/노동 개선 유인이 없을 것이다.
가계도 취업난이나 불안정고용 등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에 억지로 기업을 떠받치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정부가 긴축을 하는 건 만성화된 경기침체와 저성장, 가계부채 폭증과 불안정고용 등 가계경제의 위기, 고물가와 비용난 등을 생각하면 불가하다.
다만 어차피 쓸 것이라면 돈을 뿌리는 식은 안 되고 시스템을 개선하고 구조를 개혁하여 체질을 개선하는데 쓰여야 한다.
조란 맘다니 신임 뉴욕시장이 ‘뉴욕시민들의 기대를 낮추거나 작은 것에 만족하라고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작은 것에 만족하라.’라는 식으로 대하는 건 폭력이다.
하지만 기대를 과도하게 높이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극도로 부적절하다.
공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한계도 명확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국민에게도 이 점을 정확히 말해야 한다.
과도하게 높은 기대를 만들고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면 공공의 국민에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이러한 불만이 축적되면 결국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과 위기로 귀결된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자유로운 사회와 경제를 택했다면, 반대급부로 공공이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나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느릴 수 있다는 점도 인정/수용해야 맞다.
대부분의 경우, 많은 선택들은 하고 싶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해야 하거나 그게 최선이거나인 경우가 많다.
공공이 국민이 요구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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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재계는 이상한 가스라이팅을 해 왔다.
기만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수’를 자처하는 청년들도 그러한 공허한 프레임에 동조하는데,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x를 지킨다.’라는 말은 전제에 ‘x가 존재한다.’라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에는 자유민주주의가 맞지만, 1950년대~1980년대의 대부분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중 어느 것도 실존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동아시아 개발국가의 골격을 큰 틀에서 유지하고 있다.
압도적 권위주의 정치권이 고권적/협력적으로 재벌 기업들+금융권 등 및 관료들을 경제기획 하에 체계적으로 통제하고, 다시 이들이 대다수의 가계의 노동과 자본, 천연자원 등을 통제하는 체제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장 중심 개혁이 이루어지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는 대대적인 사회경제적 구조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경제는 사회문화와 불가분이어서, 제도개혁이 이루어지고 그 영향이 축적되어서 확실히 많이 바뀌긴 했어도 골격은 그대로이다.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보수 세력에서는 우리나라가 서구와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그 점을 강조하기까지 했으면서도(한국적 민주주의라던가), 서구와 같이 종래의 우리 정치체제, 경제체제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를 취했다는 것처럼 말한다.
원리나 체제를 선언했다고 해서 곧 그렇게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훨씬 더 솔직하다고 본다.
그는 사회문화적으로 유교적 공동체주의를 취하고, 경제적으로 빅 푸시를 위해 체계적인 국가 주도 경제기획과 개발을 추진한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반대와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적어도 실체와 다른 것을 실체인 것처럼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수요/소비 측면에서의 복지국가나 노동권 보장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시에 공급/생산 측면에서의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포함했는데 결국 그 실현 방법은 정부 주도 산업기획과 국유화일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의 개발국가는 유사하면서도 더 엄혹했다.
사회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운동&노동조합과 직결되어 있었고, 장시간에 걸친 민주주의/시장경제의 유기적 발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개발국가는 군사독재 및 유교적 위계 사회문화에서의 상위계층이 주도했고, 대개 탈식민화되거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거나 하여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시작했다.
동아시아와 유럽은 똑같이 전후에 황폐화되었지만, 전자는 대개 식민지나 2등 국가였고 후자는 열강의 동의어였으므로 전후 세계를 주도하게 된 미국이 두 대륙을 대하는 시각과 국제적 위상은 천지 차이였다.
미국에게 유럽은 서구 문명 그 자체이므로 다시 말해 과장 좀 보태면 어머니 같은 대륙이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체로서, 당연히 신용에 기초해 지원을 했다.
하지만 아시아는 거칠게 말해 아직 사회문화적, 경제적 모든 측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고 오히려 미국이 계도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 차이에 기인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복지국가와 사회보장, 노동권을 진전시키면서 동시에 전후 복구 사업과 국유화 등을 통해 고용을 제고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하지만 아시아의 개발국가는 자생적으로 시장경제가 성장할 때를 기다릴 수 없었고, 압축적-체계적으로 공업과 수출 기반 성장을 위해 국가가 주도해 경제주체와 생산요소를 체계적으로 집약하고 조직화했으며 사회보장의 진전은 더뎠다.
그러니까 서민 입장에서 보면, '과소비'를 억제하고 수입품보다 국산품을 애용하여 수출 제고와 경상수지 흑자 그리고 달러화 확보에 기여해야 하며, 노동권과 사회보장이 제대로 없어서 가족이 전부 경제적 책임과 사회적 위험 부담을 져야 하고,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사회문화적으로 유교적 위계주의가 가족/직장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강경하게 개인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놓고 보면 아예 기만을 보이지 않은 싱가포르나 그래도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화가 축적되어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본을 제외하고, 신흥공업국인 한국과 대만은 보수 세력이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를 내세우는 건 냉전용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대만은 강소기업들이 많이 성장했으므로 자유시장경제는 약간 더 맞을 수 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아니므로’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라는 식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모델의 변이성이나 특색은 서구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한국, 대만 등 신흥공업국이 그랬고 중국이 그렇다.
8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 전환은 특히 공급/생산 측면에서의 전면적인 산업구조개혁 정확히는 정부가 시장에서 대대적으로 손을 뗐다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대처주의와 레이거노믹스가 지배한 미국과 영국에서는 제조업 기반 경제구조가 붕괴하고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신(Neo)자유주의가 재소환한 국가의 모델인 최소국가는 결국 조세와 예산을 모두 감축하고, 사회보장이나 노동권 등을 축소하면서 민영화 및 규제 완화와 사양 산업 지원 중단 등을 통해 ‘개인의 자립’과 ‘시장경제 왜곡의 시정’을 도모하는 식으로 수요&소비 + 공급&생산의 양 측면에서 모두 국가가 대대적으로 역할을 줄이는 것이다.
*미묘한 것은, 다른 한편으로 정작 사회문화적, 외교/국방 차원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많아졌다. 야경국가론에 따르면 국가의 존재 의의는 치안이나 국방 및 시장경제체제의 유지와 지속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유지 등(e.g. 민법, 상법 등 계약의 자유 보호)을 맡아보는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외교/국방 차원에서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와 합쳐졌고 이는 대대적인 대외 군사 개입이나 강경한 현실주의 국제관계론의 관철 등을 의미했다. 그러면 이는 국방비의 증강을 요구하는데,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비를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감세까지 하니 쌍둥이 적자의 하나로서 재정적자가 발생했다. 저변에서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다음에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증세 없다는 공언을 뒤집으니 민심이 폭발했다. 그렇지만 성장 드라이브와 소비주의 등이 이를 덮어버렸고 이후의 클린턴 행정부 등에서도 근본적인 구조개혁은 없었다. 이렇게 과점 양당 중 어느 쪽이 집권하는지와 무관하게 큰 틀에서 이미 신자유주의적 금권정치에 의하여 손상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티파티 운동 등을 거쳐 아예 포퓰리즘적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결론적으로, 80년대부터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체제는 ‘군사/국가 감시 등의 확대’(개인의 자유와 인권 침해)와 ‘사회경제적 위험과 손해의 가계에의 전가와 중산층 소멸’(사회불평등이 계속 문제로 지적받는 진정한 이유) 등으로 귀결되었다.
정책적 결론만 놓고 보면, 나는 공급/생산/기업 측면에선 신자유주의에 동의하지만 수요/소비/가계 측면에선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영미식 시장경제나 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 경제 모두 부정적으로 본다.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가 제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을 본위로 형성되어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 라인 모델(Rhine model)이라고도 한다.
물론 최초에 이 모델은 복지국가에는 부정적이고 공정경쟁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그렇지만 북유럽만큼은 아닐 수 있어도 대륙 유럽의 국가들의 복지 수준도 상당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적어도 그 필요성, 정확히 말해 시장경제에 ‘사회적(Social)’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적 시장경제’, ‘경제민주주의’ 이런 말들이 자주 쓰이는데, 이는 아마도 ‘사회’라는 말이 들어가면 ‘사회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좀 더 규범적 권위가 있는 개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Socialist Economy), 사회적경제(Social Economy),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자신은 사회주의(Socialism)보다는 사회적-주의(Social-ism)를 지향한다고 언급했다.
이 말에는 사회주의와 사회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동치 관계가 될 수 없음을 전제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 시장균형 메커니즘, 경쟁과 선택, 경제활동의 자유 등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들을 견고하게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공교육, 노동권, 복지국가와 사회보장, 환경권, 공정거래규제 등 게임의 규칙이나 공정한 게임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를 가미하며 이를 위한 국가나 시민사회의 경제적 역할도 인정한다.
시장과 공공이 상치된다기보다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기본적으로 사회적 시장경제는 공급/생산/기업에의 과도하고 인위적이며 직접적인 개입을 부정적으로 본다.
경제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좀 이상하다.
민주주의는 경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용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업민주주의의 경우, 경제사회학적 관점에서 노동과 기업의 발언권 등을 균등하게 보정하고 노동의 목소리를 더 반영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경제체제로서 의미를 갖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노동시장이 이원화되면서 불안정고용이 만성화되었는데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에서는 어렵고 정규직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명목상 노동의 발언권을 제고한다는 게 꼭 노동 가계 전체를 위한 일일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민주라는 말을 그대로 해석한다고 하면, 경제를 민주화한다는 건 국민들 전체가 경제의 주권자(?)가 된다는 의미인가?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경제체제 중에는 사회주의가 거기에 제일 가까울 것이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경제 전체를 통제하는 것을 지향하는 사상이니까.
하지만 이건 먼 미래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불가능하다.
왜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민주화가 반드시 경제의 민주화로 이어져야만 하는가?
구조개혁을 할 때, 그 방향과 지향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러한 논의가 좀 더 심도 있게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서구식 원리/체제의 긍정적 측면은 수용하고 부정적 측면은 배제하며 우리의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거나 반대로 왜곡되어 작동할 것 등을 선별하는 작업들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
원리나 체제를 형식적으로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19세기 말의 근대화의 논리와 비슷하다.
과학기술 등의 제고만으로는 안 된다.
결국 사회, 문화, 정치 등의 영역에서 실질적 내면화가 있어야만 전환이 유의미하게 성공할 수 있다.
다만 그 당시에는 근대화가 의심할 바 없는 규범적, 진보적 루트였다면 현재의 구조개혁은 반드시 성찰적이어야 하고 또 우리 맥락에의 결합 양태 등에 관한 숙고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