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현명하면서 오만하다. 그래서 수많은 문명이 명멸을 거듭해 왔다. 인간은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설치다 자멸을 택하고는 다시 반성했다가 또 이 과정을 반복한다. 사회가 발전해 온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면도 아닌 면도 있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모호하고 불편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게 진실이니까. 어느 한 면만 보려고 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다.
나는 '문송'이라는 말이 어이가 없다. 애초에 학벌의 볼모가 되어 있는 인문사회 분야는 노동수요에의 부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문사회과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교양인이라고 젠 체 하기 위해서도, 직무 역량을 위해서도 아니다. 기대가능성이 없는 것을 마음대로 재단해놓고 모욕까지 준다. 그 자체가 인문사회의 사유ㆍ탐구 대상이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여러 차원에서 삶을 조망하고, 가치와 사실이 혼재된 사회에 관하여 통찰력 있게 이해하는 등의 활동들은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은 전쟁ㆍ시장ㆍ기술 등에 종속되어 무조건 적응하라는 집단ㆍ조직의 논리에 압살당하고 말 것이다. AI가 뭘 할 수 있건 정말 중요한 건 그런 상황에서 인간의 의미와 무의미이다. 인간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제일 본질적인 것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제껏 많은 역사의 순간들이 그러했듯 인생의 높이나 길이나 너비만 있고 깊이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문과 스스로마저 자학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모욕을 왜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 자기자신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실은 전공자라고 인문적 감수성과 소양을 가지거나 사회과학적 탐구력과 통찰력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의 한 차원이 인생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경험과 생각, 감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 모두 인문사회의 사명이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기술을 배척한다는 것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맥락ㆍ관계ㆍ감정ㆍ숙고ㆍ한 등이 모조리 지워져 버린 채 '그건 이제 필요 없어'라거나 '적응하라'고만 한다. 정작 뭘 위한 필요이고 적응인지는 없다. 버니 샌더스의 AI 멈춤은 아주 급진적인 주장이지만, 그 문제 취지가 더 중요하다. 플라톤의 문자무용론도 마찬가지이다. 이 주장의 맥락은, 그 주장 자체가 아니라 소통ㆍ성찰의 부재 우려에 있다. 기본적으로 상호작용이 덜하게 되는 텍스트의 외형적 지식만을 가지고 내가 다 안다는 것처럼 오만해질 우려. 지금도 이는 유효한 지적이다.
과학기술 발달과 인문사회 통찰은 반드시 대척점에 있지 않다. 가치판단 없는 과학기술 발달이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 같은 것을 가져왔다. 인문사회는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고민하고 문제를 염려한다. 기술결정론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 기술독재로 귀결될 수 있다. 일론 머스크 같은 자들이 핵심 기득권층이 된다면 인류는 자살을 택한 것과 같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