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구조적ㆍ제도적 환경에 정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정치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모든 정치체제는 존멸의 위기를 예약한 것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지 막연하게 특정 정치인에게 기대를 걸고는 실망하거나, 아니면 아예 정권교체와 내 삶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내 경우는 후자이다)
정치는 통상적인 행정ㆍ교육ㆍ사법ㆍ의료ㆍ공업 등 체계적ㆍ안정적 메커니즘이 되지 못하고 그럴 수도 없다. 리더십, 이념, 권력, 선거, 투쟁 등 정치의 역동성ㆍ불확실성이 정확히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가 부재하고, 그냥 선거컨설팅이나 여론 전략이나 지역구ㆍ당권 다지기 같은 데에 집중되는 건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이다. 정치인이 자기 안위나 권력을 생각하는 건 일반인이 이직을 고민하거나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치는 기능 유지보다 방향 제시를 위한 활동이고, 무엇보다 사적 이니셔티브의 추구가 아니고 공적 영향력의 행사가 객관적 본질이다. 권력에의 의지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잡아먹는 순간 정치인과 나아가 정치와 국가 전체가 위기를 예약한 것이다.
노무현-문재인 시기에 인물 중심 정치, 지역주의 정치에서 시스템(특히 규범) 중심 정치와 참여민주주의, 분권주의 정치로 넘어갔다. 그러나 노무현 사후 16년이 지난 지금, 시스템 중심 정치의 태생적 불완전함이 민주당 내 최근 역학 구도 변화를 통해 드러나고, 참여민주주의는 포퓰리즘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잠식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실마리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를 내적으로 접착하는 공동체나 내이션의 감수성에 균열이 인다. 이제는 생활자의 관점과 정책 중심 정치로 넘어갈 차례이다. 정치체제의 의의는 공동체의 의사결정 방식이라는 점에 있다. 궁극적으로 이는 정치 그 자체와 더불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정책이 개인들의 삶의 보호막이나 인프라 등이 되어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정치과정/정책과정을 처음 배울 때, 기본적으로 투입-산출-환류(Feedback)의 구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책'이다. 이는 입법과 행정을 통해 구체화된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정치가 자신의 삶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치지 않거나 부정적 영향만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회의감을 가지며 어떻게 보면 민주정치체제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냥 서로 간의 공방전만 반복하는 것이 민주성 제고의 결과라면 민주주의라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한 불만은 기성 정치권에 대항하여 포퓰리스트들에 대한 지지로 폭발한다.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의 민주정치체제는 백척간두에 처해 있다. 근본적인 전환에 대응하는 구조개혁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 현재의 민주정치체제에 대한 관성적 수용마저도 더는 견디지 못할 위험이 있다. 거안사위(居安思危)라는 말이 있는데 현재로서는 과연 안(安)인지에 대해서 조차 의문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