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개혁을 위한 제언

by 남재준

1. 경제를 위해, 경제에 신경을 꺼라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산업정책이나 무역정책 같은 것에 정부가 온 신경을 집중하는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고 본다. 금융을 포함해 이러한 영역들은 기본적으로 거리를 둔다는 전제에서의 '현장 중심의' 지원이나 규제 등만 하는 것이 맞다. 보육/교육/복지/보건/안전 등 정부가 원래 집중했어야 하는 '사회적 질'을 제고할 수 있는 문화적/제도적 인프라 등을 혁신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본다.


일단 공공과 시장은 서로 명확히 역할 분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라는 자명한 사실이 있는데, 한국 시장이 세계에서 아직 관치적 요소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있다. 또 우리 경제는 선진국처럼 스스로 시장을 창출할만한 여건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고 본다. 이 여건은 사회문화적 인프라를 통한 양질의 삶의 질이라는 전제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혁신을 비롯해 산업과 무역 및 금융 등의 운용은 시장의 몫이다. 그리고 이를 적정히 지원하거나 규제하고, 동시에 사회적 또는 공공적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대강 10여 년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선 이 지점이 근본적 구조개혁 등을 통한 실질적 진전이 없었다.


2. 변화하는 사회/경제, 변화 없는 정책


물론 내가 언급한 점은 시장경제에선 당연한 상식이지만, 이를 새삼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 경제가 더는 국가 주도의 2차 산업이나 수출에 기댈 수 있지 않게 된 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고용 없는 성장', '워킹 푸어' 등의 문제를 그렇게 오래 겪고도 이제는 아예 대안을 찾을 생각 자체가 있긴 한 건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이것도 상향 사회이동이 거의 막히고 계층 대물림만 활성화된 현상이 낳은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서비스업이나 IT 산업 중심 경제가 된 지는 20여 년이 되었는데, 지식정보경제로 넘어가며 새로운 일자리가 늘 것이라는 희망과는 반대로 그동안 불안정고용이 증가하고 화이트 칼라는 고도화된 대학진학률 등 학력 인플레이션과 맞물려 경쟁이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하물며 AI 산업이 과연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이전의 산업혁명 때도 그런 걱정을 했지만 과도한 것이었다 한다. 그런데 AI는 이전의 산업혁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이제껏 어지간한 지적 노동까지 대체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수준의 전망이 나온 기술 혁신은 없었다.


사실 AI만이 아니라 여러 차원에서 이제는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의 모델이나 인식을 적용하기 어렵다. 그 시절은 민주주의의 진전과 확산, 경기의 마지막 활황, 탈냉전 등 낙관의 시대였다. 지금은 사회경제적 불확실성-불완전성의 상시화, 극단적 문화 전쟁이나 정치 갈등 그리고 포퓰리즘과 내셔널리즘의 확산, 신냉전, 생태적 지속불가능성 등 선진국에서조차 '이대로 더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다.


물론 그 시절에나 지금이나, 특히 동아시아에서 사회문화적 삶의 질은 엉망이었다. 개인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고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고 강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뭘 위해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는 식의 문화. 정작 각자 자기 앞가림을 하느라 공동체적 기반이 침식되고 공동의 문제는 아무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미봉책으로 덮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는 동안에 위기는 착실하게 다가온다.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논쟁은 더는 의미 없다. 정책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국 이 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 가계가 안정적 사회 인프라의 보호 위에서, 안정적 고용과 생계를 보장 받고, 양적인 면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자기 자신을 돌보고 풍요롭게 하며, 자산 형성 등의 기대가 가능한가 등에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개인의 삶의 증진이다. 성장이 더는 가계경제에 안정적 고용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시장경제 하의 재분배는 애초에 생활보장에 한계 내지 상한이 예정되어 있다.


언급했듯이, 더는 성장이 자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고용이나 자산 등에 관한 희망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20여 년 간 계속 사회보장 지출을 증가시켜 왔지만, 기본적으로 재정적 여력에 이미 노란불이 켜진 데다 어차피 이것만으로는 가계경제를 안정화할 수 없다. 자영업이건, 중소기업 회사원이건 어느 직업을 가졌던 간에 대체로 과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양질의 삶을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물론 산업, 복지 등에 대해 정부가 무관심해야 한다거나, 모든 희망의 씨앗이나 실마리마저 버려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오래 전부터 직면해 왔고 더는 버티기 어려운 20여 년 전에 구축된 신자유주의 모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 국민과 정부가 모두 근본적인 패러다임 교체를 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이재명 정부는 동아시아 문화권, 개발도상국, 2차 산업 등 필수적 전제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국가 주도 기획의 프레임을 부활시킨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간 계속되어 온 구조적 문제의 뇌관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3. 우리 교육에 관한 생각의 전환


구 패러다임에서도 계속 중요한 요소는 한 가지 있는데, 그건 인적자본이다. 우리나라는 인재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면이 상당하며, 이는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특히 시험 제도는 이러한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새로운 시대의 인재를 뽑는다며 많은 것을 바꾸어 왔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전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시험 공화국'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리고 새로운 차원에서 심각해졌다. 과정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가 과정을 지배한다. 이 상황 자체를 극복해야 하겠지만, 문제는 상위 대학이라던가 고위 전문직 및 대기업 등에 대한 경쟁 과포화는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만약 대학을 반드시 가야 하고 또 기왕이면 높은 대학일수록 좋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면, 경쟁은 고밀도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과정 중심 평가를 한다는 것이 난망하다. 그렇다고 그런 인식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고용 빙하기가 된 지가 이미 오래된 상황에서, 대개의 빠듯한 가계 입장에선 그나마도 대학 진학이 메리트가 되었으면 되었지 디메리트라고는 할 수 없다.


또 대학진학률이 고도화된 상황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출생연도 기준 10년 단위 평균 대학진학률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계속 높아져 왔다. 1940년대생~1950년대생이 대강 20%대, 1960년대생이 30%대, 1970년대생이 40%대, 1980년대생/1990년대생/2000년대생은 계속 70%대이다.


대학진학률이 높은 것을 '교육열' 등과 연계해 칭찬하곤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과연 보편교육이나 교양교육의 차원에서 접근되어 왔는가? 또 우리 대학교육이 국립대 등을 제외하고 가계에 학자금 부담이 덜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학교육까지 받아야만 국민공통교육이 보장된 거라고 할 필요는 없다면, 애초에 대학 진학이 높은 게 꼭 좋은 거라고 할 수 없다. 모두가 대학을 갈 필요는 없다. 과도하게 대학이 많으면 대학에도 좋을 게 없다. 수가 너무 많은데 인프라 확충의 여유가 없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가계 입장에서 어디까지나 화이트 칼라 직종이 그래도 사회적으로 대우 받고 경제적으로 보수가 충분히 높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기업 입장에서도 노동의 양과 질이 담보될 필요가 있었으니 교육에 그러한 역할을 요구했다. 우리나라 교육열의 본질 내지 배후는 이런 맥락이었다. 교육을 목적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수단적인 것으로 본다는 맥락이.


학문은 학문, 산업은 산업으로 가야 하는데 학문에 산업의 논리를 요구하니 학문은 고사되는데 그렇다고 정말 고도의 질을 가진 산업 인력이 나오느냐 하면 비용 대비 편익의 차원에서 그렇지도 않다.


직업이나 학벌의 귀천이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강한(어느 정도 대우 받는 직업이라는 건 어느 나라나 있지만, 이 정도로? 라는 생각이 드는) 나라는 많지 않다. 정작 그 중상층 이상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삶을 살 필요는 없다는 인식이 이제는 확산되고 있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용 창출이나 교육혁신 등을 통해 좀 더 여러 장(Field)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동시에 공격적으로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더 확산될 수 있도록 직업교육 등에 대한 지원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대학이나 특종 전문직 등에 과포화된 인재들을 분산할 수 있는 구조와 문화가 형성되고 유도되어야 한다.


4. 타당도와 당사자의 시각이 없는 '적성' 체제


사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인적자본의 질적 차원이 '지능'이라는 차원에선 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의력이나 진취성이나 심지어 그 학업/직무에 맞는 전문성은? 이런 것들은 경쟁 과열과 그에 따른 치사한 수준의 변별력 확보 그리고 이와 연계된 맹목적 수준의 형식적 공정성에 대한 집착 등에 갇혀 있다.


적성시험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역량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합격한 직무보다 훨씬 높은 지적 역량을 가지고 있어서 합격해 놓고도 나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보다는 못해도 근속하고 직무가 적성에 맞을 수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럴거면..' 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상당수의 시험 제도가 수험생의 부담을 과중하게 하지 않고 취지대로 운영되려면, '경쟁의 적정한 관리'와 '시험 도구의 타당도'가 중요하다. 어지간한 시험 도구는 사실 경쟁이 적정한 수준이면 대체로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변별력이 높은 치사한 문제유형이라던가, 추상적 지능을 보는 적성시험으로 시험의 틀 자체가 변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바뀐다.


맥락을 떼어 놓고 말하면, 내 생각엔 '공정한 경쟁'은 중요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대학에서 입학시험을 치르거나 기업의 직원이나 정부 관료를 채용하거나 전문직을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합격한 뒤에 제대로 기대되는 학업/직무 등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있다. 시험은 이 기준을 제대로 측정하는 '타당도'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공정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험 운영의 인테그리티를 말하는 것이다. 부정행위 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험을 논할 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험의 본령은 '뽑혀야 할 사람이 제대로 뽑히는가'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현존하는 많은 시험들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학업/직무 역량'을 보려고 설계되고 시행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1차적'으로는 그렇다. 현재 합격하는 모든 인재들은 이전의 세대보다도 더 뛰어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부족하다'라는 생각이 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점은, '실제 개편된 시험이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있다.


현장에서의 요소/양상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아마도 '경쟁률'과 같은 '경쟁의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인기가 적당하거나 별로 없는 블루오션 시험은 공정성과 타당도를 모두 잡기가 쉽다. 하지만 인기가 너무 과열된 레드오션 시험은 상위권의 성적이 촘촘하게 서열화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사하게 문제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에 이른다. 킬러문항이나 사교육의 공교육 대체 등의 문제들의 실체는, 출제진이나 사교육 시장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문화와 구조가 복합적으로 제도를 그렇게 운영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검사적' 사고방식으로 멍청하게도 무슨 카르텔 운운하며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타깃으로 삼고 억지로 킬러 문항 출제를 저지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답이 없는 인식도 곁들여 언급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응시자들의 상향 평준화-사교육-고난도 출제 간의 되먹임 구조/문화 등이 계속되는 한 킬러 문항을 출제하는 건 불가피하다. 이걸 바꾸고 싶으면 구조와 문화를 바꿔야 하고, 그게 정확히 정치의 역할이다.


수능부터 시작해 PSAT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시험들이 '적성'을 보거나 그러한 요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편된지는 십수 년이 되었다. 이제는 더는 '지식'이 유효한 세상이 아니고 '창의적 사고력'과 같은 것들이 중요한 시대라고 한다. 그러니 '기초적 역량'을 보는 것이 필수라고도 한다.


하지만 창의적 사고력은 객관식 평가로는 절대 측정할 수 없다. 유럽 등에서 쓰는 것처럼 직무 시뮬레이션이라던가 심층 면접이라던가 복합적인 직무 논술 등이 그나마 나은데, 그랬다가는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시험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창의적 인재 선발은 불가하다.


또 기초적=도구적 역량이 직무 능력과 직결된다는 근거도 약하다. 이건 그냥 일반 지능 시험에 가깝다. 문제는 이것이 압도적 변별력 도구가 되는 순간, 더는 '기초' 시험이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시험은 당연히 노력 여하가 중요하다. 하지만 운, 당일의 컨디션, 노하우의 체화 가능 여부 등이 꽤나 주요하게 작동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제한시간 내에 형식적 퍼즐 등을 잘 풀 수 있는 지능과 노하우를 사람이 관련 분야의 지식 등을 갖춘 사람보다 더 직무 역량이 뛰어나다거나 창의적 사고력을 가졌을 거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리고 사실, 관료나 법조인에게는 근본적으로 '창의적', '기업가적' 사고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런 건 산업 현장에서의 특정 직종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관료나 법조인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근본적으로 같다. 행정이나 정책 그리고 법 등에 대한 원칙과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운용하며, 최신의 변화들에 맞추어 이를 융통성 있게 변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꼭 기업가적 사고나 창의적 사고 그 자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관료적 문화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경직적 사고는 시험 제도의 특정 유형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건 그냥 그 나라에 전형적인 조직 문화라든가, 또 관료제의 본질적 특성 같은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기본적으로 관료나 법조인 등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대학수학역량'도 그렇다. 주객이 전도가 되어서 도구적/기초적 성격의 국어-수학-영어가 주가 되어 있다. 국문법이나 국문학을 배우는 것이 공통소양 차원에서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계공학과를 가기 위해서 국문법이나 국문학 요소가 상당한 과목을 꼭 치러야 하는가? 반대로, 미적분이나 대수학을 배우는 것이 공통소양 차원에서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학과를 가기 위해서 미적분이 포함된 과목을 꼭 치러야 하는가?


고교 졸업 시험('공통소양' 중심 학업성취도 측정)과 대학 입학 시험('전공기초' 중심 전공적합도 측정)을 분리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최근의 고교학점제는 큰 틀에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순연이라는 과제에 부합한다. 문제는 평가 제도가 여전히 혁신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좋건 싫건 우리 교육은 평가 특히 대입에 좌우되므로, 대입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으면 고교학점제의 취지도 몰각되고 운영이 왜곡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당수의 '윗분'들이 만드는 상당수의 정책들의 현실처럼, 탁상에서 나오는 말로만 그럴듯한 제도의 치명적인 문제들이 거의 시험 체제 전체에서 유감 없이 발휘된다. 그리고 이 '윗분'들은 이 나라의 상층부가 언제나 그랬듯 자기들이 위에 있거나 이미 관문을 넘었으니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거나 아니면 어려운 문제는 손을 아예 댈 용기가 없거나 아니면 그냥 미봉책으로 넘어가려고 하거나 한다.


5. 공정한 경쟁을 넘어, '타당한 경쟁', '적정한 경쟁'으로


공정한 경쟁보다 본질적인 것은 '타당한 경쟁'이다. 또 경쟁이 적정해야 인재가 낭비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인재를 쓸 것이고, 또 인재를 어떻게 양성하는가의 제도와 문화 등의 합리화는 필수이다. 시험 제도는 필요악이고 많은 것들이 그렇듯 태생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항상 의도한 인재만 길러내는 건 아니다. 현대적 선진 사회경제에서 교육의 의의는 '토양'이라는 점에 있다. '창의적 엔지니어', '진취적 기업가'는 토양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야 나온다. 기조차 제대로 펴기 힘든 사회문화에서 어떻게 창의성이나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교육 생태계에서 스티브 잡스가 대학 시절 들었던 캘리그라피 같은 수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공학 부문에서 중국을 부러워 할 이유도 없다. 중국의 오늘은 한국의 어제와 비슷한 면이 있다. 공격적이고 집중적으로 지원을 할 수 있고 '육성'을 하는 체제이므로 그렇게 된다.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체제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유주의 사회는 제대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면역력이나 내구성이 있고 무엇보다 '창의적이고 자유로우며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거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까 최근의 문제들은 자유주의 사회경제의 한계가 아니라 반대로 자유주의의 이점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개발독재처럼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육성 체제도 안 되니 어정쩡하게 이상한 귀결을 맞게 된 것이다.


최근의 상향 평준화나 이로 인한 적성시험, 스펙과 포트폴리오의 축적 등은 계층적 배경이 없으면 시험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든다. 플랜C 등을 기대할 수 있느냐, 당장 몇 년 동안의 장기 수험도 상관이 없느냐, 스펙 등을 쌓을 만한 정보나 네트워크가 있느냐, 심리적으로 얼마나 자기 확신이나 자존감을 지니느냐, ... 계층적 배경이 여기에 직결되는 건 아니어도 배후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사회경제 지도층에는 중상층 이상 밖에 없고, 일반 서민 가계들은 자산 형성이나 상향 사회이동에 대한 기대가 없는 채로 목구멍이 포도청인 삶만 살게 된다고 하면 그런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단순히 발전이 안 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뿌리에서 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방식과 조건을 계속 지켜나가려면, 불가피하게 변화해야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좀 더 현명한 보수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점들을 인식했다. 노동권이나 사회보장은 사회주의의 물결을 차단하기 위한 '보존을 위한 변화(Change for Conserving)'의 원리를 채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모든 것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어야 하고 우가 있으면 좌가 있어야 하고 안정이 있으면 변화가 있어야 한다. 중상층 이상은 자기가 가진 희소 자원의 대가로서 더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반대로 중하층 이하는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적어도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유의미한 보장이 있는 희망을 제공 받아야 한다. 현재 상황은 그 균형이 이미 깨졌거나 최소한 심각한 수준의 균열을 보이고 있다. 체감할 수 있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쇄신과 구조개혁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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