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를 보면서 든 대통령직의 선진화에 대한 생각

국가원수 중심에서 정부수반 중심으로

by 남재준

박근혜를 보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직과 그 리더십에 대한 실질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에서 정부수반으로서의 대통령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박근혜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다른 무엇보다 권위주의, 집단주의의 표상으로 보였기 때문에) 적대감까지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녀에게는 품위가 있었다. 박근혜 재임 당시에 진보 성향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중도화가 시작되고 보수에게서 현실적인 국정 역량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의 대통령이라기에는 박근혜 presidency는 60-70년대의 가부장적 리더십을 상당 부분 바이브 등 외피만 재현한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 리더십이었고 무엇보다 정책적으로 무능했다. 최순실, 정호성과의 취임사 수정 논의를 들어보면, 처음에 새 정부가 추진할 구체적 정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경제부흥'이니 하는 추상적 문구로 전부 교체했다.


박근혜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은 풍부하다. 고전에 대한 지식도 많고, 최근 북콘서트를 보면 외교 경험과 대한민국의 대외적 위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군주에게 요구되는 자질이지 정부수반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아니다.


박근혜는 청와대를 자기가 응당 있어야 할 곳으로 여기는 듯한 뉘앙스가 있었는데, 대통령직을 영애/영부인처럼 수행하는 건 곤란하다. 박근혜는 박정희보다 육영수를 닮았지만, 정확히 그 지점이 바로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박근혜의 경험과 능력으로는 그 이상을 하지 못했다.


문제는 국민들이 실질이 아니라 그런 외면적이고 추상적인 면모들만을 봤다는 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2012년 대선 토론 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고 싫어한다' 같은 말을 어떤 어른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리더십은 '세세한 사항들에 얽매이지 않고, 큰 비전을 제시하고 가열차게 추진하는 큰 어른/보스'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기실, 군사독재자나 재벌총수들이 다 그런 이미지였으니까.


거기다 전근대에 아직 사회가 전체적으로 볼륨이 덜 높았을 때에는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모호하게 뒤섞여 있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영국을 예로 보면 군주와 총리는 본래 하나였으니까.


우리나라는 군주제적 문화를 형성해 왔다. 강렬한 집단주의와 가부장제 등의 문화가 전반적으로 조직문화라던가 리더십을 그렇게 만든 경향이 있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중시될 때는 스트롱맨이 필요하고, 그는 구체적인 사항에 얽매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문화, 사회, 정치, 경제, 교육, 복지, 행정, 과학, 기술, 예술, 스포츠, 산업 등 모든 분야가 고도로 복잡화-자율화된 거대한 체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리더란 멤버와 상호작용하면서 그 안에서의 노드가 되는 것이지, 그 자신이 위계적 조직구조에서 절대적 존재감을 가지는 식이 될 수 없다.


사회가 복잡해진 만큼, 정부의 역할도 시장이나 시민사회 등과 독자적으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해져야 하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보다 전문화될 필요가 있다. 통상 계선조직 등 실무 행정의 영역에서는 대개 이는 한참 전에 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나 리더십의 영역에서는 그것이 충분히 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현대 국가에서의 대통령은 군주로서의 위엄이나 카리스마가 아니라, 본인이 어떤 원칙과 비전과 청사진과 정책 대안을 지니면서 동시에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


국가원수로서의 역할보다는 정부수반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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