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들 소시오패스가 되어 가는가

2020년대 중반 세계 선진국들의 정치적 자화상

by 남재준

Centrist ideas no longer wanted in Conservative party, says Kemi Badenoch | Conservatives | The Guardian



정치는 '사회적' 활동이고, 민주주의란 체제보다도 '문화'가 중요하다.


정확히 말해, 정치를 '사회적' 활동이라고 하는 의미는, '당신이 피치자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당연'한 전제를 그냥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고 은연 중에 무시하는 순간, 이미 민주주의는 후퇴와 위기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당연한 전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규범이다.


그걸 지키려는 의식적 노력이 없다면 법이고 역사고 아무것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나라 정치에서 이제 '대통령직선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유의미한 복수정당제' 등이 주요 과제가 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팬덤과 음모론, 뉴미디어의 극복', '참여를 넘어 숙의의 민주주의로', '정치 생태계의 다원성' 등을 제고해야 하는 훨씬 어려운 '민주주의의 질적 개혁'의 시대가 되었다.


케미 베이드녹 영국 보수당 대표의 ‘내게 반대하는 사람은 보수당이 아니며, 길을 비켜라.’라는 이 선언은 오늘날 세계 모든 선진국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자주 관찰되고 잘 관철되는 정치 리더십 스타일이다.


요즘 부상한 리더십의 종류에는 대강 세 가지가 관찰된다.


1. 강경한 이념형 리더십 – 보수 진영에서 더 자주 관찰됨. 보통은 마거릿 대처 등 이전의 ‘강력한’ 신념형 리더십의 재탕인 경우가 많음. 케미 베이드녹이나 조르자 멜로니.


2. 현란한 낙관형 리더십 – 진보나 리버럴 진영에서 더 자주 관찰됨. ‘미래’, ‘희망’ 등을 말하는 도시형 청년 엘리트 느낌. 롭 예턴이나 (비교적 윗세대지만) 쥐스탱 트뤼도.


나머지 하나는 위의 두 유형에서 모두 자주 보인다.


3. 정치공학적 수법이 더 교묘하게 노골화 (‘목적 없는 권력’) – 여론전, 레토릭 싸움, 약점 잡기, 마타도어, ...


그런데 정치인은 CEO나 관료와는 다르다.


정치인이 CEO처럼 국가를 운영하려 들다가는 독단적 결정 – 국가의 권위주의화 – 공공 후퇴와 민생 외면 등이 나타난다.


정치에서의 혁신도 기본적으로 민주정치체제의 규범적 문법을 거스를 수는 없는데, 혁신이랍시고 정작 정치의 기본적 전제를 거스르면서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는다고 정치가 후진적이라고 하는 자의식 강한 심지어 사회성이 의심스러운(‘입장을 바꿔 당신 같으면 당신 같은 리더의 리더십과 결정을 따르고 싶겠냐.’)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계엄을 극복하면 뭘 하나? 민주정치체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위기인데.


민주당과 일부 진보정당들이 자기들과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부분은 되돌아보지 않고 신나게 내부 반대자들이나 보수정당이나 비민주당 지지자들 탓을 하는 동안 그 자신들이 민주주의와 입헌주의를 후퇴시키고 파괴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주의에도 한계가 있다.


수단을 아예 가리지 않으려는 태도(반사적 태도라는 점이 더 문제이다)로는 절대로 유의미한 정의(Justice)로 귀결될 수 없다.


최근 꽤 많은 선진국 청년들은 민주정치체제에 대한 회의는 둘째치고, 기본적으로 사회적 감수성에 심각한 의문이 있고 오른쪽 아니면 왼쪽으로 극도로 경도되어 있는데 심지어 이는 구세대보다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영국 보수당 행사에서 한 청년이 ‘보수당은 우파여야 한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말만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보통 그 말이 나오는 맥락은 ‘내가/우리가 말하는 보수만이 (’진정한‘) 보수주의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더 나아가 ‘이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상대할 생각이 없으니 나가던가 알아서 하라.’로 나아간다.


이 점은 밀레니얼 좌파에게도 비슷하게 관측되어서, 좀 더 중도좌파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 특히 기성세대를 기득권으로 몰아붙인다.


정작 그 양자의 이념은 모두 파편적이다.


포괄적인 세계관/철학, 그리고 이에 기초한 사회경제구조 등에 대한 정책 이니셔티브의 종합적 체계 등이 없다.


이민이라던가 젠더라든가 인종이라든가 몇몇 이슈에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 경제나 안보 등에서는 그냥 예전에 하던 얘기 그것도 이미 실패나 한계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 전례를 재탕한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의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화 대 민주화 등 세대와 시대적 대의/과제에 대한 충돌이 한국정치의 주요 균열점이었을 때에도, 적어도 철학적 원칙과 정책적 방향 그리고 중도에의 수렴 등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전부 없는 것은 고사하고, 그렇다고 선진국처럼 철 지난 이념이라도 강경한 소시오패스적 버전으로 재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철학이고 정책이고 아무것도 없고 서로가 서로를 기득권화하면서 자기 진영을 배타적으로 결속한다.


선진국 중에서 가장 후진적이라고 할 만하다. (뭐가 선진적인지는 상대적일 수 있어도, 뭐가 후진적인지는 명확하다.)


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토론하거나 하려는 관용조차 없다.


그냥 자기의 안락한 사상과 무리에 안주하면서 배타적으로 타인과 외집단을 밀어내는데, 정작 그런 작자들은 굉장히 나약하거나 아니면 사회성(외향성이 아니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마거릿 대처도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을 꽤 많이 들었는데, 나이젤 로슨이나 케네스 클라크 그리고 존 메이저 등은 그녀가 적어도 초기에는 ‘굉장히 열정적인 토론가였고, 반대의견이라고 해도 일부 반영하는 경우도 있었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좌파 진영에 대한 격렬한 이념적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후일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적들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수하고자 하는 어떤 원칙이 있었다고 언급했고 전임 노동당 총리인 해럴드 윌슨에 대해 나름 호평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예의를 케미 베이드녹과 같은 사람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보수주의만 보수주의’라는 말은, 결국 노동당은 말할 것도 없고 자당 내에서조차 이견을 가진 사람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내 의견이 옳다’라는 말과 ‘내게 반대하는 건 그른 것이다’는 다른 말이다.


타인의 의견을 ‘그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재단하는 폭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건, 중용, 유연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영국 보수당의 수백 년 전통에도 정면으로 어긋난다.


탈냉전 이후 대강 30여 년이 흐른 지금, 세계는 AI와 자동화 – 사회와 자연의 지속가능성 – 신냉전 –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의 근본적 파탄 – 배외주의와 극단주의의 부상 등 복합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위기가 아니더라도, 본래 정치에선 대단한 도덕주의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사회통합의 도모 및 민간을 위한 인프라와 규범 제시 등의 역할을 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가 ‘드라마’가 되어서는 아니 되었다.


마거릿 대처는 작은 정부를 원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재임기만큼 정부가 크게 보인 때는 없었다.


정작 개인의 삶, 민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은커녕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구조화되어 버렸고, 이제는 이러한 구조화에 합의한 기성 정치권 전체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


이런 분노에 대해 상당수의 기성 정치인들이 여전히 껍데기만 남은 ‘중도’, ‘합리성’ 이런 것을 말하고 다니는 사이에 감정적 취약점들을 포퓰리스트들이 치고 들어간다.


대처주의가 만든 세계에선 부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대물림하여 착하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만 계속 사회경제 지도층이 되고, 자수성가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가 걸어온 길의 엄혹함과 자기 성공의 예외성을 들어 타인과 사회에 폭력을 휘두른다.


이런 시대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본성에서 벗어난 행위는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대처는 억울할지 모르겠지만, 1990년 그녀의 11년 만의 사임은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반작용이었다.


그러고도 그녀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에 대해 뒤돌아볼 생각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는 전후세대 출신이라 좀 더 사회적 감수성이 있었지만, 대처 이후의 세대는 아예 이기주의와 극단주의의 극단을 달린다.


정치를 비롯해 인간의 모든 생활은 대개 사회적 기반과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투가 될 수 있어서 위험하지만, 반대로 개인이 아무렇지 않게 자기 신념과 세계에만 갇혀 타인을 밀어내고 외면하면서 계속 인간 생활의 중요한 진실을 외면하면 결국 그 후과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언젠가 현재의 이러한 주류적 흐름을 만들거나 부추기거나 여기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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