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일곱 번째 자식

by 남킹


모든 것은 깊은 밤, 안개처럼 스며든 꿈결, 융(Jung)의 집단 무의식(集團無意識)과도 같은 원형적(原型的) 심연 속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은 정지한 듯 고요했고, 짙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여명이 느껴졌다. 침울하게 뻗은 길 위에는 대지를 뒤덮은 먼지가 달빛 아래 스산하게, 마치 망자의 뼛가루처럼 흩날렸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녀 앞에는 거대한 무덤처럼 끝없이 이어진 산등성이만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풍경처럼, 숭고하면서도 고독한 낭만주의적 풍경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 꿈의 풍경 속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마치 양수(羊水)처럼 그녀를 감쌌다.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느긋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다 불현듯 등 뒤에서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녀는 연약한 갈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존재의 근원으로 추락했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놀랍게도 짙은 어둠 속에서 홀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연꽃이 무성하게 핀 연못이었다. 물은 칠흑같이 검었으나, 연꽃들은 별빛보다 더 밝고 순결하게 피어 있었다. 혼돈 속의 질서, 아포페니아(Apophenia)적 환상.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흰 연꽃 한 송이를 가슴에 소중히 품었다.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가슴 벅찬 행복감에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암스 파더스>의 아내는 당시, 친정이 있는 북쪽 문명의 땅을 여행 중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몇 달째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요양을 위해 잠시 친정집에 머물기로 하고 떠난 길이었다. 원래 한 달을 예정했지만, 벌써 6개월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떠난 파더스 가문의 저택은 거대했지만 어딘가 생기를 잃고 텅 빈 듯한 적막감이, 마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속 유령 들린 집처럼 감돌았다.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던 것은 하녀 <에스나>였다. 그녀는 원래 아내의 몸종으로 함께 왔지만, 안주인이 없는 사이 암스의 시중을 들며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에스나는 북부인 특유의 창백한 피부와 갈색 머리,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를 가졌지만, 유난히 작은 키와 살포시 벌린 입술 사이로 늘 머물러 있는 상냥한 미소가 그녀를 특징짓는 요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에 걸맞게 그녀는 자주 웃었고, 그 웃음소리는 텅 빈 저택에 드물게 생기를, 꺼져가는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듯 불어넣었다.

그날 아침, 에스나는 자신이 직접 바느질하여 만든 새 하녀 복을 곱게 차려입고 주인의 서재를 정성껏 청소하고 있었다. 묵직한 서재의 공기 속에서, 가죽 장정과 낡은 종이 냄새가 뒤섞인 그 공간에서, 책장을 정리하던 암스는 문득 에스나의 치마 아랫단에 정교하게 수놓인,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나지막이,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물었다.

“에스나, 그 치마에 수놓은 꽃은 무엇이냐? 처음 보는 모양이구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주인님. 저도 모르는 꽃이옵니다.” 에스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수줍게, 그러나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 보는 꽃인데, 감히 무슨 꽃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가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신비로운 꽃입니다.”

“꿈에서 본 꽃이라….” 암스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네가 꾼 꿈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보거라.”

“여러 번 같은 꿈을 꾸었사옵니다. 꿈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기도 하옵니다만, 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사옵니다. 아주 검고 깊은 물 위에 별빛보다 더 밝게 빛나는, 크고 아름다운 흰 꽃을 제가 가슴에 안고 나면… 늘 잠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나는 꿈을 회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기묘하구나…” 암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 순간, 암스는 말을 멈췄다. 자신이 몇 달 동안 혼자 간직해 온 은밀하고도 기이한 꿈의 비밀을, 하찮은 하녀에게, 그것도 자신의 아내의 몸종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으려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 것이었다. 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에스나에게 손짓했다.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진지하고 깊어져 있었다.

“에스나, 이리 가까이 다가오너라.”

“네? 주인님?” 에스나는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하지만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내게 좀 더 가까이 오너라.” 암스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녀는 마지못한 듯,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주인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섰다. 서재에는 무거운 침묵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마치 폭풍전야처럼 흘렀다.

“너는 입이 무거우냐?” 암스는 마치 중요한 거래를 앞둔 상인처럼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주인님. 그것이 무엇이든, 무덤까지 가져갈 각오가 되어 있사옵니다.” 에스나는 조숙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충성심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월경은 언제 끝났느냐?” 암스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태연하게 물었다.

“네, 그러하옵니다만… 그건 왜…?” 에스나는 이제 호기심과 불안감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되었느냐?”

“한… 2주쯤 된 것 같사옵니다.” 에스나는 수줍은 듯 살짝 허리를 비틀며 조용히 속삭였다.

“최근 너의 몸에서… 맑고 미끈거리는 분비물이 나오더냐?” 암스는 여전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냉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러하옵니다만…” 그녀의 볼이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혈류가 피부 아래로 급격히 쏠리는 감각, 그녀는 암스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좋다. 그럼, 오늘 밤, 모두가 잠든 후에 내 침소로 몰래 오너라. 누구에게도, 심지어 그림자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주인님… 그 말씀은…?” 에스나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 속에는 두려움과 함께 숨길 수 없는 설렘이, 새벽녘의 여명처럼 일렁였다.

“그래, 너의 짐작이 맞다. 나는 오늘 밤 너를 품을 것이다.” 암스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욕망이 아닌, 어떤 운명적인 사명을 수행하려는 듯한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 몸에 나의 씨앗이 깃든다면, 나는 네가 거처할 집을 따로 마련해 줄 것이다. 그리고 너와 아이를, 네가 죽는 날까지 책임지고 돌볼 것이다.”

“주인님의 은혜에… 결코 누를 끼치거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주인님!” 에스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얼굴 가득 환하게 드러냈다. 그녀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는, 마치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를 물러갔다.

4개월 뒤, 암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임신한 에스나를 조용히 저택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집에서 마차로 꼬박 반나절이나 가야 하는, 문명의 땅 외곽의 한적한 곳에 은밀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아내 몰래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열 달 후, 에스나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암스의 일곱 번째 자식이었다. 암스는 그 아이에게 자신이 꾼 꿈과 에스나가 꾼 꿈의 징표를 따라, <로터스(Lotus)>, 즉 ‘물의 꽃’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에게 자신의 성(姓)인 <파더스(Pater)>를 물려주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특정 지을 수 없는 사생아는 당시 법에 따라 모두 정령의 땅 <나스라딘> 수녀원으로 보내져 평민으로 길러져야만 했다. 하지만 암스는 자신의 일곱 번째 자식을 세상의 눈으로부터 철저히 숨겼다. 그 아이에게는 특별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파더스 가문은 본래 뿌리를 알 수 없는 유랑민, 집시의 후예였다. 그들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언제부터 이 땅에 발을 디뎠는지는 가문 내에서도 정확히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저 수백 년 동안 대륙을 떠돌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만이 희미하게 전해질 뿐이었다. 그들이 북쪽 문명의 땅 중앙부, <정치의 도시>와 <경제의 도시> 사이의 비옥한 경계 지역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대략, <장수의 국왕>으로 알려진 <네스라 4세> 시절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들은 한동안 외부인 취급을 받으며 변방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은 대륙의 지리에 밝다는 이점을 활용하여 소규모 무역업에 종사했다. 암스의 증조부인 <슐레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중앙 대륙을 험준하게 관통하는 <데밀론 산맥>과 깊은 협곡으로 이어지는, 좁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을 통해 육로 무역을 하며 잔뼈가 굵었다. 그는 대륙 곳곳의 다양한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며, 천부적인 상술과 성실함으로 점차 인근 부유층 고객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슐레트는 고객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구해다 주었다. 신선한 남부 해산물부터 시작해서 동부의 희귀한 도자기, 서부 장인이 만든 정교한 금속 공예품, 심지어 북부 첨단 과학 도시에서 생산된 부품이나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마약류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그는 고객이 주문한 물건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약속한 기한 내에 구해다 주었으므로, 그의 명성은 점차 문명의 땅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막강한 재력가들의 확고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던 중, 453년, 남쪽 환락의 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마피아 조직 <혈맹의 동지>가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북쪽 문명의 땅으로 향하는 모든 육상 교역로를 봉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가의 공인을 받은 대규모 무역상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혈맹의 동지를 거치지 않고서는 사실상 육로 무역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혼란은 슐레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환락의 땅을 드나들며 마피아들과 깊은 친분을 쌓아왔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한패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그에게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역 독점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전쟁과 봉쇄로 인해 천정부지로 치솟는 각종 생필품과 사치품들을 안정적으로 그의 고객들에게 공급했다. 그는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뢰>였다. 그는 항상 합당한 가격으로 계약을 체결했으며, 시장 상황이 아무리 급변하여 물건값이 폭등하더라도 처음 계약한 가격만을 고집했다. 그의 이러한 우직함과 신뢰는 삽시간에 왕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는 곧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드높은 빌딩과 초호화 저택, 광활한 영토를 사들였다.

주변의 유력 가문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어떤 가문은 아예 가문의 재산 관리까지 그에게 맡길 정도였다. 그렇게 파더스 가문은 무일푼의 집시에서 성공한 상인 가문으로 화려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시 가문’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그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적어도 남쪽 바다에서 벌어진 운명의 해전, <앙리쇄루 전투>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하였다.

암스의 할아버지 <다비드 파더스>는 서른세 살 되던 해, 비록 가세는 기울었지만 그 미모가 문명의 땅 전체에 자자했던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 <마리안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다비드는 조상들처럼 어릴 적부터 무역업을 도우며 대륙 곳곳을 누볐다. 그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휴양지로 유명한 남쪽 환락의 땅의 <알리한테> 시를 여행하던 중, 머물던 호텔에서 마리안느의 눈부신 미모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그녀가 살고 있다는 <산주앙> 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실제로 본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난 후였다.

마리안느는 당시 병든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 정령의 땅에 머물고 있었고, 슬픔에 잠겨 거의 집 밖 출입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다비드는 포기하지 않고 산주앙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달 뒤, 어머니의 장례식을 끝마친 마리안느가 산주앙으로 돌아오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애도 기간이었으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수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플랫폼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비록 상복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슬픔 속에서도 감출 수 없이 빛나고 있었다. 다비드는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죽음의 슬픔 속에서조차 눈부시게 빛나는 황홀경을 목격한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릴 뻔했었다네….”

다비드는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한 달의 애도 기간이 흐른 뒤, 마리안느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는 두꺼운 양피지 뭉치를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단순한 청혼서가 아니라, 두 사람의 결합 이후 마리안느 가문에 제공될 구체적이고 막대한 재정 지원 계획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사실상 일방적인 후원에 가까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다비드는 조상 슐레트처럼 무척 영리하고 정보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정보>와 <신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마리안느의 가문이 겉모습만 번지르르할 뿐, 실상은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며 파산 직전이라는 사실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앞으로 장인어른이 될 사람과 그의 딸 마리안느가 누리게 될 재정적 혜택과 사회적 지위 향상이라는 특장점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리안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꼬박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그는 마리안느에게 구애하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나씩 물리쳤다. 그는 비록 마리안느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치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처럼 그녀와 그녀 주변의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놀라운 정보력과 끈기는 마침내 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파더스 가문을 이 땅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바로 대양 건너 섬나라, <베네치아> 제국의 침략 전쟁이었다. 대양 중앙에 흩어진 수많은 섬들을 무력으로 통일한 베네치아 제국의 오만한 황제 <돈토스>는 남아도는 막대한 군사력을 소진하고 대륙의 부를 탐하기 위해 천년 왕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선전포고 후 불과 한 달 만에 남쪽 환락의 땅 해안부터 무서운 기세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언제나 그렇듯이 막대한 돈을 삼키는 괴물이었다. 천년 왕국 정부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마구 발행했지만, 당시 베네치아 군대의 위용과 돈토스 황제의 명성은 이곳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도 전부터 왕국의 국채 가치는 휴지 조각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베네치아의 압도적인 승리가 점쳐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광범위한 정보망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으며, 수집된 정보의 활용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고 있던 <앙리쇄루> 해협 곳곳에 자신의 정보원들을 은밀히 배치했다. 그리고 연락책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황을 보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시장에 쏟아져 나온 왕국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돈토스 황제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돈토스의 폭정에 항거하는 내부 저항 세력이 이미 황제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고, 베네치아 함대의 보급선이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첩보였다. 다비드는 베네치아의 패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정확했다. 앙리쇄루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는 예상치 못한 기습과 내부 반란으로 인해 처참하게 전멸했고, 돈토스 황제는 도주 중에 암살당했다. 다비드는 하룻밤 사이에 왕국 최고의 부호이자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훗날, 노년의 다비드는 자식들을 불러 모아 빛바랜 항공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바로 베네치아 수군이 전멸한 앙리쇄루 해협을 묘사한 군사 지도였다. 그는 자국 함대 진영 수백 미터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보아라, 이 검은 선이 무엇인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지. 오직 위대한 우리의 <헤머스> 수군 대장군과 그의 최측근 몇몇만이 알고 있었던 비밀이었다. 바로 대규모 해저 지진으로 인해 만들어진 거대한 바닷속 협곡이었지. 그 협곡을 따라 주먹만 한 크기의 신형 원자 기뢰 수백 발이 일렬로 숨겨져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천하무적이라 자부했던 베네치아 최강 함대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돈토스의 오만함과 방심이 패배를 자초했지. 그 순간, 나는 신의 섭리를 느꼈다네. 그의 탐욕스러운 제국의 종말을 말이야…”

파더스 가문의 막대한 부와 권력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암스였다. 그는 할아버지 다비드의 막대한 재산과 냉철한 지혜, 그리고 할머니 마리안느의 수려한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는 왕국의 재정 위기 때마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선민 정부를 지원하며 정치적 영향력까지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하늘 아래 그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완벽에 가까운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그는 자신의 가문을 앞으로 천 년 이상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로 만들 원대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을 무렵, 암스의 여섯 아들과 그들의 식솔들이 모두 대저택의 연회장에 모였다. 밤이 유리창에 검푸른 잉크처럼 번져갔다. 하인들은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고 술을 채웠다. 그리고 집사는 검은 벨벳 천으로 덮인 거대한 액자를 조심스럽게 벽난로 위 중앙 벽에 걸었다. 벽난로의 불빛이 액자 표면에 반사되어 신비롭게 일렁거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암스는 상아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그림 곁으로 다가갔다. 연회장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암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검은 천을 벗겨냈다. 순간,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파더스 가문을 오랫동안 상징해왔던 용맹한 사자, 날카로운 호랑이,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 그리고 견고한 창과 방패, 빛나는 왕관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하늘, 지하, 얼음, 섬, 땅, 달을 신비롭게 묘사한 여섯 개의 작은 방패가 둘러싼 중앙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순결한 흰 꽃 한 송이가 영롱하게 피어 있었다. 지켜보는 아들들과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당혹감과 궁금함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일었다.

“아버님, 감히 여쭙니다만, 저 꽃은 무슨 의미이옵니까? 저희 가문의 문양과는 너무나도 생소합니다.” 첫째 아들 <레이>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연꽃(Lotus)이다.” 암스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네, 물론 연꽃인 것은 알겠습니다만… 어찌하여 저 연약해 보이는 꽃이 저희 파더스 가문의 새로운 문양 중앙에 자리하게 되었는지요?” 레이는 여전히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재차 물었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자라지만 결코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암스는 마치 심오한 진리를 설파하듯 말을 이었다. “연꽃잎 위에는 단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질 뿐이다. 연꽃이 피어난 곳에서는 물속의 탁한 기운은 사라지고 맑고 좋은 향기만이 가득하게 된다. 연꽃은 어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굳건히 유지한다. 연꽃의 둥근 모양은 원만함과 조화를 상징하며, 그 고운 빛깔은 보는 이의 마음과 몸을 맑고 평온하게 정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연꽃이 지닌 미덕이다.” 아버지는 부드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버님,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강인함과 권위를 상징하는 파더스의 문양에, 이토록 부드럽고 나약해 보이는 꽃이 추가되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 <좌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마리안느를 쏙 빼닮은 그는 차가운 스모키 실버 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아버지의 의중에 의문을 표했다.

“연꽃의 줄기는 겉으로는 부드럽고 유연해 보이지만, 그 속은 강인하여 거센 비바람에도 결코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암스는 목에서 가래가 끓는 듯, 그르렁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눈빛은 먼 미래를 응시하는 듯했다. “나는 이제 너희 여섯 아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파더스 가문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첫째 레이는 <정치의 도시>로 가서 권력의 중심을 장악하라. 둘째 좌네는 <경제의 도시>로 가서 부의 흐름을 지배하라. 셋째 살론은 <문화의 도시>로 가서 대중의 정신을 사로잡아라. 넷째 칼른은 이 땅의 중심이자 모든 물류가 모이는 <교통의 도시>를 통제하라. 다섯째 오나는 <과학의 도시>로 가서 미래 기술을 선점하라. 여섯째 해즐너는 <무역의 도시>로 가서 대륙 간의 교역을 장악하라. 그리고 너희 모두 명심해야 한다. 너희의 이름 뒤에는 항상 <파더스>라는 위대한 이름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저 연꽃의 깊은 의미를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거라.”

여섯 명의 파더스 형제들은 아버지의 갑작스럽고도 파격적인 선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연회가 파하고 모두가 흩어진 뒤, 암스는 조용히 그의 막내아들,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일곱 번째 아들, <로터스>를 자신의 서재로 불렀다. 그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아들을 처음으로 자신의 앞에 세웠다.

“너는 이제 남쪽 <환락의 도시>로 갈 것이다.” 암스는 아들의 어깨를 잡고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곳은 모든 욕망이 뒤엉키고 부패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힘이 움트는 곳이다. 그곳에서 은밀하게 너만의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키워나가거라. 그리고 명심하여라. 너는 지금부터 파더스 가문의 아들이다. 단, 세상에 절대 너의 성(姓)인 파더스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너와 너의 후손은 오직 <로터스>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시선을 먼 미래에 두고, 저 연꽃처럼,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너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아들아.”

암스는 파더스 가문의 새로운 문양이 새겨진 작은 펜던트를 그의 일곱 번째 아들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 그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로터스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미지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 그의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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