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하고 깊은 종소리가 네 번씩 네 차례, 마치 시간의 사계(四季)를 관통하는 장엄한 교향곡처럼 울리고, 뒤이어 맑고 가벼운 멜로디의 종소리가 세 번,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를 속삭이듯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기도와 참회, 그리고 깊은 묵상의 시간, 크로노스(Chronos)의 흐름이 멈추고 카이로스(Kairos)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는 아난다 원장과의 대화를 잠시 멈추고, 경건하게 눈을 감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원장의 크고 깊은 눈동자, 그 호수 같은 심연에 스치는 아쉬움의 빛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희망의 불씨, 아리아드네의 실과도 같았다. 나의 목적, 나탈리아의 행방을 찾고 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미로를 헤쳐나갈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세자님께서 애써 이곳까지 찾아와 들려주신 이야기는 실로 귀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뇌가 깊이, 마치 장엄한 서사시의 플롯처럼 담겨 있군요.” 원장은 부드러운, 그러나 그 안에 강철 같은 의지를 품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제 기도의 시간이 되었으니, 아쉽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는 놀라운 까마귀와 같은 분.” 원장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가볍게 입김을 후- 하고 세 번 분 뒤, <정감(情感)의 복음송> 첫 두 마디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종소리와 어우러져 성스러운 울림을 만들었다.
“반가움은 하늘의 새들도 알고 땅의 벌레도 기억하니…”
“온 만물은 기쁨에 들뜨고 은총은 내려와 우리를 감싸네.”
“저의 부족한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헤아릴 수 없는 위안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원장님.”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저의 이야기가 진실과 화해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작은 초석으로 쓰일 만한 가치를 지니기를, 그리하여 거룩하신 분의 뜻에 가닿았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기를, 소인은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마음의 정화.”
원장은 자리에서 천천히, 마치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어 나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마치 생명의 에너지가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 전해져 왔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이룰 수 있는 자의 고통>이라는 제목의 짧은 기도문을 읊조렸다. 나는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고자 눈을 감고 기도의 후렴구를 경건하게, 마치 내 자신의 죄를 고백하듯 복창했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원장실을 나오자, 아까 나를 안내했던 헬라스가 아닌, 또 다른 앳된 소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새아이>라고 소개했다. ‘새아이’는 정식 수녀가 되기 전 예비 과정에 있는 소녀들을 부르는, 갓 둥지를 떠나 첫 비행을 준비하는 어린 새를 의미하는 호칭이었다. 새아이는 원장실에서 수도원 광장까지 이어지는, 스물일곱 개의 크고 작은 문들을 통과하는 동안 나를 안내했다. 그녀는 많아야 열다섯 살쯤 되어 보였는데, 걷는 내내 발그레한 볼을 설렘으로 물들이며, 자신이 3년 뒤 정식 수행 수도승이 되어 이 넓고 황량한 세상을 다니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인도할 긴 여행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전쟁의 참화가 할퀴고 지나가지 않은, 평화로운 시대에나 볼 수 있을 법한 천진난만함과 싱그러운 미소를, 마치 라파엘로의 그림 속 아기 천사처럼 지니고 있었다.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밝음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끝없는 방황과 사무치는 그리움이라는 위태로운 외줄 위에서, 삶의 기쁨과 슬픔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자꾸만 발을 헛디뎌 절망과 고통이라는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내 삶에는 크게 기뻐할 만한 일이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과연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다. 하지만 이 ‘새아이’의 티 없이 맑은 모습 속에서는, 내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느껴지는 소원함과 친밀함, 혹은 융합과 개별성 사이의 복잡한 문제들을 너무나도 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경이로운 평온함이 느껴졌다.
마침내 마지막 문을 통과하자 드넓은 수도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의 햇살은 강렬하고 선명했지만, 뜨겁기보다는 따사롭게, 마치 신의 은총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광장 한쪽에 자리한, 수령이 천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올리브나무 밑동에 마련된 <은자의 걸상>에 나란히 앉았다. 시원한 그늘 아래, 바람은 비록 가늘게 불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짙은 풀 내음과 흙냄새가 긴장으로 굳어있던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이며 안심의 틀 속으로 안내했다.
새아이는 잠시 눈을 감고 짧은 묵상에 잠겼다. 감은 눈꺼풀 위로 푸른 혈관이, 마치 대리석 조각상 위의 푸른 광맥처럼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상쾌한 바람이 맞은편 호두나무 가지들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 뒤로는 목재로 만들어진 원형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빛바랜 파라솔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위로는 단아한 색으로 칠해진 발코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정령의 땅 나스라딘 수녀원의 풍경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건물들의 색상조차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암회색의 벽과 바닥 돌이 단순하면서도 엄숙하게, 마치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이어져 있었다.
어느새 새아이는 콧노래처럼, 방심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복음송의 한 구절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투명한 햇볕 아래 반짝거리는 그녀의 조그맣고 붉은 입술이, 잘 익은 체리처럼 오물오물 움직이는 모습을, 나는 아버지와 같은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가녀린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살결 위에는 짙은 나무 그림자가 바싹 마른 그녀의 체형 위로 가로놓이며 덧없는 무늬를 그렸다. 나는 그녀에게서 평민의 아이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떤 선천적인 기품과 고요함이 서려 있음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는 노래를 멈추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내게 은은하게 미소 짓는 해맑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시다면, 새아이님께 아난다 원장님에 관하여 당신이 아는 소중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 맑은 하늘처럼 투명한 이야기들을요.” 나는 평소 낯가림이 심해 처음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이 어린 소녀에게만은 마음이 편안하게 열리며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새아이는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찰랑이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자신이 다른 수녀님들에게 전해 들은, 고통과 절망, 그리고 기적적인 부활이 어우러진 슬픈 이야기, 마치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연민과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원장님의 속세 시절 이름은 <제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원장님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돌아오신 분, 오르페우스처럼 저승에서 귀환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또 다른 미궁 속으로, 아난다 원장이라는 인물의 깊고 어두운 과거 속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희망과 절망이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 속에서 격렬하게 싸우고 마침내 하나가 되는지를 목격하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