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은 아주 길고 어두운 잠에서, 마치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의 지하 왕국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첫 감각은 색(色)이었다. 온 세상을 뒤덮은 푸른 기운, 입센의 희곡에나 나올 법한 병적인 푸른빛이 가장 먼저 시야를 채웠다. 그것은 희망의 색이라기보다는 깊은 슬픔과 실존적 절망의 빛깔에 가까웠다. 푸른빛은 사방에 가득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서글픈 상념만이 눈을 가렸다. 창밖은 불야성을 이루며 시끄러웠지만, 그녀가 누워있는 방 안은 무덤 속 같은 침묵만이,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우주의 종말처럼 감돌았다. 남쪽 환락의 땅, 그중에서도 가장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도시 <삼가타>는 잠들지 않는 이들의 천국이자 지옥, 소돔과 고모라의 현대적 재림이었다. 거리에는 약과 춤, 섹스와 폭력이 물처럼 흔하게 흘러넘쳤다. 화려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도시의 겉모습을 장식했지만, 그 속은 추악하게 일그러진 욕망과 고통으로, 마치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처럼 들끓고 있었다.
그녀는 불행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불행은 그녀의 운명,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따라다녔다. 부모는 지독한 약물 중독자였고, 유일한 오빠는 뒷골목을 전전하는 폭력배,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부류였다. 그들의 삶은 홉스가 묘사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그 자체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오빠에게 끊임없이 두들겨 맞았고, 낯선 남자들에게 수없이 강간당했다. 아픔과 고통은 그녀에게 너무나 친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몇 번이고 자신의 손목에 면도칼을 그었고, 철창처럼 차갑고 더러운 침대에 널브러져 누워, 오염된 하늘 너머 어딘가에 있을 천국을 막연히 꿈꾸었다. 그녀에게 닥쳐오는 재앙은 요행으로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정해진 운명이었다.
인간의 모든 번뇌 가운데서 증오만큼 파괴적인 것은 없다. 스물여섯에 첫 아이를 낳았고, 스물일곱에 또 아이를 낳았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새롭게 나타난 남자는 그녀에게 매일매일 지옥 같은 노동과 학대를 강요했다. 집과 싸구려 술집을 오가며, 그녀의 시간은 끝없는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주사기가 난무하는 더럽고 비좁은 2층 침실에서,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자가 숨겨둔 매그넘 권총의 방아쇠를 쉴 새 없이 당겼다. 둔탁한 총성과 함께 남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게 갈라지고 부서졌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전쟁과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참혹함의 끝을, 대멸종 이전의 역사 속에서 지겹도록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 과거의 교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저 고통 없는 피안(彼岸)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길은 아득히 멀고도 험난할 뿐이었다.
그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서 3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한 인권 변호사가 그녀의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변호사는 그녀가 처했던 끔찍한 지옥과 같은 삶을 상세히 조사하여,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대한 변론서를 작성했다.
“모든 절망과 아픔, 슬픔과 고통을 한데 모아 꾹꾹 눌러 담은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불행. 이것이 바로 피고인 제인이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변호사의 호소력 짙은 변론은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적적으로 감형이 이루어졌고, 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그녀의 기구한 사연에 대한 여론이 뜨겁게 들끓었고,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비극적인 지난날을 파헤치며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그녀는 머지않아 정령의 땅에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토렌질 하바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교육의 기회를 얻었고, 생애 처음으로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는 것을 받았다. 헤어졌던 두 아들과의 자유로운 면회가 허락되었고, 종교 활동과 도서관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교도소 도서관 한구석, 먼지 쌓인 책상에 주저앉아 낡고 얄팍한 <반야심경(般若心經)> 한 권을 우연히 펼쳐 들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푸른 희망의 실오라기 하나 잡을 수 없었던 칠흑 같은 절망의 시간 속에서, 과거의 온갖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아귀처럼 달려들어 그녀를 물어뜯으려 했지만, 그녀는 경전을 암송하며 그 모든 것을 견뎌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암송 구절 속에 복받치는 울음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공(空)’. 모든 것은 없음이요, 없음은 곧 모든 것이었다.
실체는 허공이요, 형태는 허상이며, 의식, 감각, 생각, 행동, 우리가 보는 색깔, 듣는 소리, 맡는 향, 느끼는 맛, 피부에 닿는 감촉, 그리고 법(法)이라 부르는 모든 현상과 경계, 심지어 늙고 죽어가는 것, 지혜와 깨달음조차도 모두 하나이며 동시에 다름이었다. 괴로움이 곧 기쁨의 다른 모습이며, 번뇌가 곧 극락의 그림자였다. 시간은 더 이상 고통의 흐름이 아니라, 앎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밀고 불교 의식에 참여했으며, 세상의 모든 지식을 탐독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적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변호사는 끊임없이 그녀의 사면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하여 서른다섯 살 되던 해,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의지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모두가 그녀가 북쪽 문명의 땅이나 동쪽 신의 땅, 혹은 서쪽 정령의 땅의 조용한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남쪽 환락의 도시, 삼가타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썩을 대로 썩은 사람들 속에서, 미쳐 날뛰는 허상과 감각의 노예가 되어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의식조차 메말라버린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이질적인 평온함과 자비를 품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구박했으며, 심지어 예전처럼 학대까지 서슴지 않았다. 출소 후 받은 얼마 되지 않는 적은 보상금마저 교활한 아첨꾼들에게 뜯기고, 그녀는 다시 더러운 길거리 위에 주저앉은 창녀처럼 서글픔 속에서 말라갔다. 견딜 수 없는 피곤이 몰려왔고, 깊은 잠이 쏟아졌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몽환적인 번뇌의 그림자가 어찌 이 연약한 여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그러다 만났다. 긴 수로를 따라 흙탕물이 넘실거리고, 무거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며, 차가운 바람이 얇은 옷깃을 세차게 때리던 어느 날. 생계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장사꾼들의 더러운 배들 사이에, 아슬하게 피어 있는 한 송이 연꽃. 칠흑 같은 어둠과 혼탁함 속에서도 홀로 순결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그 연꽃의 아름다움이 그녀의 얼어붙었던 가슴에 경탄과 함께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메마른 속이 넘쳐흐르는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비로소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각인되었던 반야심경의 구절들이, 세상의 허무함이 안겨준 절망조차 무아(無我)의 빛으로 승화시키니, 그녀는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붓다의 마지막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질퍽거리는 썩은 거리 위에서, 그녀는 연꽃을 피우고 그 씨앗을 뿌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서른여섯 살, 똥오줌으로 가득한 길모퉁이에 그녀가 세운 작고 허름한 집은, 버려진 고아들의 따뜻한 안식처가 되었고, 갈 곳 없는 미혼모들의 고향이 되었으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모든 이들의 마지막 위로가 되었다. 그녀의 선행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고,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들은 선하고 부유한 어떤 이가 깊이 감동하여 선뜻 거액의 후원을 약속했다. 그 후원으로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작은 집들이 환락의 도시 곳곳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바람을 타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한 기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전국에 방영되었고, 여인은 이제 훌쩍 자란 두 아들과 함께 이 땅 구석구석을 돌며, 연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나누는 집들을 만들어 나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연꽃의 성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의 악의는 끈질겼다. 서른여덟 살 되던 해, 다른 도시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탄 그녀는, 그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녀가 모은 후원금을 탐낸 자들이 몰래 탄 독약 든 음료수를 마시고 쓰러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여인은 인적이 드문 밤바다에 버려졌다. 피 냄새를 맡고 거친 상어 떼가 몰려들었다. 범인들은 그녀의 가방에 든 얼마 되지 않는 여행자 수표마저 빼앗아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모두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성녀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운명의 실을 잣는 모이라이 여신들은 그녀를 아직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제 막, 새로운 장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