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답답함에 눈을 떴다. 언제나처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좁고 위태로우며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방 안에서 불안한 눈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이 익숙한 감각은 실존적 불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존재의 근원적 조건에 가까웠다. 맞은편, 둥근 창문을 반쯤 가린 낡은 커튼이 밤새 열어둔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힘없이, 마치 사형수의 마지막 숨결처럼 파르르 떨며 춤을 추고 있었다. 창밖 하늘은 더없이 높고 투명한 코발트블루 빛을 띠었지만, 유독 산 정상 부근에만 짙은 뭉게구름이 솜이불처럼 몰려들어, 마치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처럼 게으르게 흐르며 변화하고 있었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천장의 작은 타원형 창문으로는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방 안을 비추며, 아주 느리고 조용하게, 마치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선율처럼 아침의 시작을 속삭였다. 나는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힘겹게, 마치 라자루스가 무덤에서 일어나듯 몸을 일으켜 신발을 신고, 구부정한 자세로 간신히 방을 빠져나왔다. 내 앞에는 가파르고 어둠에 잠긴,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이 마치 단테의 지옥으로 향하는 길처럼 놓여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마치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죄책감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1층에 다다르자, 어디선가 빵 굽는 듯한 향긋한 냄새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희미하게 풍겨와 잠자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자극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낯선 세상을 살폈다. 높은 산은 여전히 짙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장막에 덮여 신비로운 자태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발밑으로는, 낮은 언덕을 따라 펼쳐진 마을이 무정형의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허기가 몰려왔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이 실존의 미로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막막했다. 주머니는 동전 한 닢 없이 텅 비었고, 등에 짊어진 배낭 속에는 잡동사니뿐이었다. 내 앞에 놓인 세 갈래 길, 헤르메스의 삼거리. 나는 그중에서 그나마 오르막이 덜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길, 어쩌면 내 무의식이 이끄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완만한 언덕과 낮은 돌담집들이 이어졌다. 몸은 여전히 천근만근 무거웠고, 가슴은 불안과 피로로 고통스럽게, 마치 조난 신호를 보내는 모르스 부호처럼 뛰었다.
발의 통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높고 가파른 언덕 위에 바벨탑처럼 우뚝 솟은 검은 수도원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이 사리가 알려준 <가르니에> 수도원이라는 사실이, 지친 나그네에게는 작은 위안과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고아였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선민의 자격을 얻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대부분 성인이 될 때까지 서쪽 정령의 땅에 있는 수녀원에서 평민으로 길러졌다. 나의 유년 시절 역시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므로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와 끊임없는 기도, 엄격한 예절과 예법, 낮은 속삭임과 평화로운 성가 속에서, <평온한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했다. 나는 굳게 닫힌 육중한 철제 문을 톡톡, 세 번 가볍게 두드리고, 나지막이 수녀원에서 배운 <하마르의 평화송> 첫 구절을 불렀다. 그 노래는 내 영혼의 일부이자, 과거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수고로움에 지친 이들이여, 너의 앞은 따스함이 깃들고’
‘버려짐이 없는 대지에, 무척 귀한 열매로 맺음이니’
‘경배하고 속삭여라, 사랑으로 들뜬 당신의 고운 목소리’
‘평화를 기원하고 높은 곳으로 눈 돌려 행복을 소원하니’
‘그리운 이들이 낯선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딘가에 놓인, 알알이 맺힌 보랏빛 포도송이에’
‘누군가는 깃들어 안식을 찾으리….’
잠시 후, 문에 달린 작은 창이 열리며, 앳된 얼굴의 소녀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같은 미소를 보였다.
“저는 정령의 땅, <나스라딘> 수녀원 출신의 나그네입니다. 고된 여정에 지쳐 잠시 숨을 돌리고, 가능하다면 원장님을 알현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부디 저의 간청을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평화.”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늘 기쁨. 삶을 이끄는 해방의 기운이, 은자의 고독한 세상을 살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하물며 미천한 벌레조차 그의 생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와 양식은 늘 갖추는 법. 부디 당신께서 걸어오신 길 위에 놓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여유를 내어 주신다면, 비록 소생은 이 수도원의 허드렛일을 맡은 낮고 가벼운 자에 불과하지만, 경청하여 듣고 마음에 새겨 보람으로 가득 찬 기록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운 경외.” 소녀는 두 손바닥을 곱게 펼쳐 가슴 앞에 모으고, 지긋한 눈길과 청아한 목소리로, 이곳의 예법에 따라 화답했다. 그녀의 말투와 몸짓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신앙심과 지성이, 마치 잘 연마된 보석처럼 배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혹시 <글 씀을 이끄는 기록자>들의 공간인가요? 낮은 보살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이곳 가르니에 수도원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모으고 기록하며 보존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정신을 잇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저는 헬라스라고 합니다. 영원한 아름다움.”
“그렇다면… 헬라스님, 혹시 이곳의 모든 분들이…?”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었다.
“네, 나그네께서 추측하신 바가 맞습니다. 이곳은 모두 여자 수녀님들만 계시는 곳입니다. 이리로 따라오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시장하실 터이니, 부족하지만 저희가 마련한 아침 식사를 제공하겠습니다. 늘 겸손함.”
헬라스는 머리에 쓴 두건을 벗어 정갈하게 접은 뒤, 손을 들어 두 번의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맑은 눈빛을 찰랑이며 겸손한 미소와 사뿐한 발걸음으로, 허기지고 지친 나그네를 넓은 식당으로 안내했다.
홀은 천장이 높고 넓었지만, 식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예상보다 적었다. 배식을 담당하는 중년의 수녀는 낯선 방문객인 나에게 세 번 고개를 숙여 존경과 환영의 뜻을 표했다. 내가 나무 식기와 수저를 들고 다가가자, 그녀는 짙푸른 색의 알 수 없는 채소 스튜와 희멀건 죽을 그릇에 담아 주었다. 나는 빈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곳의 예법에 따라 <생각과 사고의 청결함>을 기원하는 짧은 묵상 의식을 행한 뒤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음식 냄새는 구수했지만, 극심한 피로와 불안감 때문인지 그다지 식욕이 동하지는 않았다. 나는 죽 한 숟가락으로 겨우 마른 목을 적시고, 조용히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식사하는 이들 중 누구도 수도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옷차림은 남루했고, 얼굴에는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은 듯한 깊은 고단함이 서려 있었다. 즉,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은 방문객, 혹은 피난민들이었다. 씁쓸함이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하긴, 작금의 세상은 어딜 가나 파괴와 고통의 흔적뿐이었다.
천 년간 이어져 온 고귀한 왕위 계승과 평화의 시대는 파더스 가문의 탐욕스러운 반란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더러운 권력욕에 눈먼 전쟁광들의 야욕이 천년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나마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신의 땅만이 전쟁의 화마를 피해 간 마지막 보루였다. 신들과 수도사들의 땅. 세상의 고요한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내려와 탐스러운 정신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 땅이, 이제 마지막 남은 피난처, 노아의 방주가 된 것이다.
식사를 거의 마칠 때쯤 헬라스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수도원의 하루 일정이 담긴 작은 표식을 건넸다. 표식에는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의 빛줄기가 홀로그램처럼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는데, 각각 활동의 종류(노동, 기도, 학습 등), 시간, 장소를 나타냈다. 첫날 방문객은 의무적으로 따라야 할 일정이 없으므로, 이 중 어떤 것을 선택해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해도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즉, 하루 종일 잠만 잘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아난다 원장과의 대담>이 예정된 노란색 빛줄기를 택했다. 사리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아난다 원장을 찾아라. 그녀가 도울 것이다.’ 나는 그 만남에 합당한 준비를 하기 위해 우선, 몸의 더러움과 마음의 번뇌를 씻어낼 수 있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푸석거리는 남루한 옷가지를 모두 벗어 곱게 개어 세탁실로 향하는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잠시 <정화의 기도>를 읊조렸다. 넓은 탕에는 이미 여러 명의 입욕자들이 조용히 몸을 담그고 있었다. 수온이 적당함을 알리는 푸른색 알람이 울릴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바닥에 깔린 따뜻한 자갈을 밟으며 탕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 절차는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10분씩 이어지는 각기 다른 온도의 탕과 증기실 이동은 일곱 번씩, 총 세 차례의 반복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자비(慈悲)의 기도송>을 열두 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욕을 마친 자들이 모이는 회당은, 아치형의 높은 천장이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듯한 옥빛 반투명 돔으로 덮여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은 기도나 명상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소리는 사방의 벽에 부딪혀 부드러운 반향을 이루었다. 나는 깨끗한 가운을 걸치고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워,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을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햇빛인가. 내가 거쳐온 지역과 국경, 그 잿빛 대지와 일그러진 지평선은 온통 매캐한 연기와 흙먼지, 처참하게 부서진 건물 잔해들로 뒤덮여 검은 회색 하늘 아래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투명하고 푸른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그 자체로 축복이고 기쁨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질적인 불면증에 시달렸고, 오랜 여정의 피곤함이 몸속 깊숙이 스며들어 마치 무거운 쇳덩이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 속에 살았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침대에 닿자마자,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의 번민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깊은 잠 속으로, 마치 죽음과도 같은 평온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손목에 찬 표식의 부드러운 진동에 잠에서 깼다. 혼란스러운 꿈의 잔상이 아직도 머릿속을 떠돌며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잠에서 깨어나는 이 순간은 늘 답답하고 불쾌했다. 나는 작은 액정에 표시된 숫자를 확인했다. 12. 아난다 원장과의 면담 시간이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탁된 옷을 찾아 입었다. 옷에서는 은은한 햇볕 냄새와 약초 향이 났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회당 안내자의 인도를 따라 좁고 긴 복도를 지나 마침내 원장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를 알현했다.
원장은 그림 속 성녀처럼 단아하고 고요한 모습이었다. 중년으로 보였지만,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눈빛과 평온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꼿꼿한 자세와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미소를 머금고, 이름 없는 방문자의 사소한 이야기조차 귀 기울여 듣고 세상의 기록으로 남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고된 여정의 피로는 충분히 푸셨는지요? 수행자님. 끝없는 사랑.”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듣는 이를 편안하게 했다.
“네, 원장님의 배려 덕분에 잠시나마 안식을 찾았습니다. 저는 <세르게이 세브르자>라고 합니다. 다들 편하게 <세자>라고 부릅니다. 출생지는 정령의 땅 서쪽 끝, <햇살마저 검게 물든 언덕>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흔히 노년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버려진 아이들이나 고아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므로, 어찌 보면 생명의 처음(알파)과 끝(오메가)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묵상.”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답했다.
“반갑습니다, 세자님. 저는 지식과 진리의 기록을 통해 신성(神性)의 다가섬을 수행하는 이곳 가르니에 수도원의 원장, 아난다입니다. 듣자 하니 정령의 땅은 전쟁의 참화가 가장 극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도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나요? 서글픈 탐욕.” 아난다 원장은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쟁은 가장 먼저 그곳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총성은 멎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고, 여전히 파더스 가문의 삼엄한 통치 아래 놓여 있습니다. 거리에는 슬픔과 절망이 넘쳐흐르고, 사람들의 눈빛에서는 희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즉, 비극과 고통이 만연한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비참한 탄식.”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슬픔의 소식만이 바람을 타고 들려옵니다. 가엾은 세자님. 오늘 저를 찾아온 다른 분들의 사연 역시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행복보다는 고통이 넘쳐나는 세상의 단면을 제게 던져주고 갔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울한 심연.” 원장의 얼굴에 깊은 슬픔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죄송합니다, 서글프신 원장님. 저 또한, 마음과 정신, 육체와 제가 맺어온 모든 관계가 산산조각 난 상태로 간신히 이곳 신의 땅 국경을 넘었습니다. 신이 깃든 성역이라 불리는 이곳조차, 언제까지나 전쟁의 화마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정성이라고는, 세상에 다시 평화의 빛이 퍼지는 그날까지 간절히 기도하고 묵묵히 수행하는 도리밖에는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곳은 기록자의 회당. 내가 뱉는 모든 말은 어딘가에 영원히 기록으로 남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며, 무거운 책임을 수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비겁한 겁쟁이로, 나의 비천한 몸뚱이 하나 겨우 건사하며 위태롭게 버텨왔다. 그러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몸이 움츠러들고 가슴이 졸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자님. 이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포용하고, 모든 상처를 용서하며, 모든 지친 영혼에게 따스함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조급해하거나 불안을 느끼실 필요가 없습니다. 편안히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둔 이야기를 털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지속적인 희망.” 아난다 원장은 이미 나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의 관용 가득한 미소가 얼어붙었던 나의 마음을 다시 부드러운 편안함으로 이끌었다.
“네, 그럼, 원장님께 저의 이야기를 감히, 한 치의 거짓이나 꾸밈없이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의 봄은, 천 년 왕조의 평화와 번영이 온 누리에 가득했던 마지막 황금기였습니다. 현명하고 자애로우신 군주로 칭송받던 현제(玄帝) 세푸르 님께서는, 어느 날 이름 없는 농부의 딸, 나탈리아가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이 왕조의 멸망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백성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리라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예언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왕과 대신들은 진노했고, 그 예언의 진위를 따져보기도 전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 모두를 수도로 압송하여 문초한 뒤, 머나먼 정령의 땅 귀양지로 보내버렸습니다. 제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는 열다섯 살 때부터 죄수들과 범죄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귀양촌에서 온갖 궂은일을 하며 제 용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럼, 결국 그 불길한 예언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는 말씀이시군요? 피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
“네, 그렇습니다, 아난다 원장님. 비록 예언의 내용이 불분명한 어휘와 은유적인 묘사, 암시로 가득하여 그 정확한 의미를 꿰뚫어 보는 데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의 참혹한 상황을 돌이켜보면, 그때 그 예언을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보고 깊이 숙고하지 않았던 것이 왕조 몰락의 가장 큰 불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아쉬운 후회.”
“그래서 세자님은 그 예언자의 딸, 나탈리아와 친구가 되셨군요? 어둠 속에서 만난 거룩한 우정.”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저처럼 외동딸이었고,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글을 배우고 지식을 탐독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늘 외톨이였습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깊이 끌렸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끌림은 자연스럽게 우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뜨거운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제 인생 가장 황홀했던 기쁨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럼, 나탈리아가 바로 그 예언가인가요? 무한한 지식의 소유자?” 원장은 숨겨왔던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조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예언자는 나탈리아의 아버지 니콜라스입니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의 말을 충실히 기록한 기록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기록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나탈리아는 글쓰기를 사랑했고, 저는 그녀의 글 읽기를 즐겼습니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아버지의 예언이 마치 일상의 풍경처럼 종종 등장하곤 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3년을 채워갔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탈리아의 가족은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가끔, 발신자 불명의 암호화된 편지를 보내올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듬해, 정령의 땅 어느 외딴 섬에 있는 연구소에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악명 높은 <쉐임 박사>의 인공지능(AI) 초기 개발팀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정령의 땅에서 끔찍한 <왕자 시해 사건>이 발생하면서, 우리가 흔히 <파더스의 난>이라고 부르는 기나긴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녀의 편지에 적힌 예언 그대로였습니다. 시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이후 벌어진 분쟁은 참혹함을 넘어선 저주스러운 형벌 그 자체였습니다. 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철저히 파괴되고 사라졌습니다. 어제의 평화는 잿더미 속에 묻혔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게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 여인, 나탈리아를 찾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저의 유일한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저와의 사랑보다 더 크고 무거운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언의 해석과 실천, 그리고 종국에는 이 비극적인 전쟁을 마무리해야 할 책무 말입니다. 우리는 운명처럼 다시 만났지만, 그녀는 또다시 제 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행방은 물론이고 작은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꺼지지 않는 생체 신호만이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려줄 뿐입니다. 가슴 시린 서글픈 그리움.”
“무척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세자님. 당신께서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의 기쁨과 평온한 삶을 하루빨리 되찾으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지극한 정성.” 원장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시고, 미천한 인간의 육신을 고귀한 정신으로 깨닫게 하시는 신의 가호가 이 땅의 모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고루 미치기를 소원합니다. 간절한 기도.”
“당신의 뜻대로… 주관을 살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부디 가엾은 영혼들을 굽어 살피소서….” 원장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속세의 간청>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녀의 깊은 신앙심과 연민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세자님,” 살포시 눈을 뜬 원장은 여전히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응시하며, 슬픔 속에서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혹시 예언가로 알려진 나탈리아의 아버지, 니콜라스에 대하여 저에게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봉인된 궁금한 진실.”
“네, 원장님. 저는 제가 듣고 읽고 직접 본 대로, 제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이야기들을 원장님께 기꺼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스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저는 먼저 <파더스 가문>과 <로터스 가문>의 복잡하고 뒤얽힌 관계, 그 셰익스피어 비극과도 같은 서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번 전쟁의 원흉이자 여전히 세상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는 파더스 가문과, 이에 맞서 <사피엔티아>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로터스 가문이 실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놀라운 사실과, <가우타 로터스>로 알려진 저항 세력의 지도자와 제 연인 나탈리아의 운명적인 만남이 바로 아버지 니콜라스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으며, 이 만남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중대한 함의를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하고도 무서운 예언.”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더 깊은 심연으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