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신의 땅

by 남킹


운명의 톱니바퀴, 그 아난케(Ananke)의 바퀴는 예고 없이, 그리고 소리 없이 돌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낡은 횡단 열차의 규칙적인 덜컹거림 속에서 존재론적 불안감에 휩싸인 채, <신의 땅> 국경을 넘기 직전이었다.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주기적인 소음은 마치 시간의 메트로놈처럼 내 심박을 조율했고, 차창 밖으로는 황량하지만 어딘가 스피노자의 범신론(汎神論)적 신성이 깃든 듯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 존재의 은밀한 연장선과도 같았던 암호화된 통신 장치가 짧지만 단호하게 진동했다. 나의 오랜 벗이자 비밀 결사 단체 <사피엔티아(Sapientia)>의 세 번째 형제, <사리>에게서 온 긴급 메시지였다. 사리. 그의 이름은 이미 디지털 세계의 그림자 속에 신화처럼 떠도는 존재,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었다. 나는 릴리안 나리가 그녀의 역저에서 그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떠올렸다. 그 문장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영혼을 조각한 부조(浮彫)와 같았다.

‘사리는 언어의 비밀을 파헤치는 기호학자이자, 디지털 세계의 카오스 속에서 코스모스를 창조하는 데미우르고스(Demiurge), 즉 해커였다. 군사 비밀 협정 유출이라는, 국가의 존립을 뒤흔든 중대한 스파이 혐의로 그가 차가운 감옥의 어둠 속에 갇혔을 때, <가우타>가 한 줄기 빛처럼 그를 찾아왔다. 가우타는 빛바랜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내용은 영원히 베일에 가려졌으나, 기록된 것은 단 하나, 사리가 어린아이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뿐이다. 그날 이후, 그는 사피엔티아의 형제가 되어 어둠 속에서 빛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 (<릴리안 나리>의 <천년 왕국의 기록> <구원 편> 17장 99절)

메시지는 짧았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묵시록(默示錄)의 예언처럼 무겁고 단호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심하세요. 추적이 가능한 곳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세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 사피엔티아 형제들 사이의 암구호이자, 언제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스토아학파적 경고였다. 심장이 차가운 얼음덩이처럼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급격히 퍼져나가며 시야가 순간적으로 좁아졌다. 열차는 실시간 위치 추적이 가능한 구시대의 유물, 움직이는 관(棺)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정거장을 확인했다. <뷔징겐> 역. 3분 이내 도착 예정. 숨 돌릴 틈도 없이, <환락의 땅> 남쪽 항구도시에 있는 호텔의 직장 동료에게서도 다급한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그는 나의 정체를 모르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무대 위에 함께 섰던 동료일 뿐이었다.

‘세자 씨! 지금 호텔 로비에 <파더스> 경찰대원 수십 명이 들이닥쳤어요! 당신을 찾고 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뱀처럼 기어 내려왔다. 척추를 따라 흐르는 차가운 감각이 공포를 증폭시켰다. 나는 즉시 모든 연락 가능한 스마트 기기의 전원을 차단했다. 이제부터는 오직 사피엔티아 내부 통신망, 우리의 유일한 생명줄만을 사용해야 했다. 심장이 불안으로 조여왔다. 나는 재빨리 사리에게 답신을 보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 암호 키를 누르는 것조차 버거웠다.

‘메멘토 모리. 열차에서 곧 하차합니다. 뷔징겐 역. 메멘토 모리.’

잠시 후, 사피엔티아 그룹 전체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황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시스템 전체가 붕괴 직전에 놓인, 엔트로피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메멘토 모리. 수보티, 게른타 형제 체포됨. 생사 불명. 모든 형제는 최대한 빨리 신의 땅으로 피신하기 바람. 메멘토 모리.’

기차가 뷔징겐 역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쇠가 긁히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벌떼처럼 윙윙거리는 수십 대의 추적 드론이 플랫폼 근처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금속성의 차가운 눈들이 먹잇감을 찾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때, 사리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았다.

‘메멘토 모리. 주차장에서 마틴(Martin)을 찾기 바람. 선글라스 착용 필수. 메멘토 모리.’

플랫폼 내부는 비행 금지 구역이었지만, 드론들은 역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었다. 놈들의 시선, 그 기계적인 감시의 눈길을 피해야 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소독약 냄새와 오물이 뒤섞인 역겨운 공기 속, 낡고 지저분한 칸막이 안에서 변기 뚜껑 위에 배낭을 펼쳤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배낭 깊숙이 숨겨두었던 <복합인지 위장용 조끼>를 꺼내 입었다. 최첨단 광학 섬유와 미세 센서로 만들어진 이 조끼는 착용자의 생체 신호와 외형적 특징을 미묘하게 교란하여 드론의 안면 인식 및 생체 스캔 시스템을 속일 수 있는, 일종의 기술적 분신술이었다. 다시 겉옷을 걸치고,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화장실을 나섰다. 열차 대기실을 빠져나오면서 특수 편광 렌즈가 장착된 검은 선글라스를 꼈다. 세상이 한 톤 어두워졌다. 몇 대의 드론이 잠시 나를 따라붙는 듯했으나, 이내 혼란스러운 듯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효과가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마치 길 잃은 순례자처럼 두리번거리며 주차된 차량들을 훑어보았다. 마침내, 먼지 쌓인 낡은 세단의 앞 유리에 희미하게 <마틴>이라고 쓰인 글자를 발견했다. 나는 선글라스를 벗어 주머니에 찔러 넣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엔진이 힘겹게 기침하듯 덜컥거렸다. 무척 오래되고 낡은 차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신 차량들은 인공지능(AI)이 기본 탑재되어 있어, 땅속으로 숨지 않는 한 모든 이동 경로가 실시간으로 추적당할 수 있었다.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이 도시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문명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수동 운전 모드로 전환하고 가속 페달을 깊숙이 밟았다. 차는 한번 크게 요동치더니, 이내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따라 30분쯤 정신없이 달렸을 때, 사리에게서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목적지 좌표가 전송되었다.

‘메멘토 모리. 목적지: <가르니에 수도원>. 도착 후 <아난다> 원장을 찾기 바람. 그녀가 도울 것임. 메멘토 모리.’

가르니에 수도원. 아난다 원장. 나는 차량 내비게이션에 목적지 주소를 입력했다. 구형 모델이라 외부 추적은 불가능했지만, 내부 기록은 남을 수 있었다. 나는 자동 운전 모드로 전환하고, 옵션으로 <오로지 좁은 도로 및 비포장도로 이용>을 선택했다. 그리고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어느새 차는 꽤 깊은 산중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원시림이 펼쳐졌다. 더 이상 드론의 위협적인 윙윙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자동차 시트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누워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온통 나탈리아 걱정뿐이었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사피엔티아 내부 통신망을 통해 주고받는, 그녀의 <생체 인식 동기화 표시>에 여전히 <생존>을 알리는 희미한 녹색등이 깜빡이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사피엔티아의 두 번째 형제이자 핵심 멤버인 나탈리아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대부분은 사피엔티아의 설립자이자 첫 번째 형제인 <가우타 로터스>와 함께 극비 임무를 수행 중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답답하고 미칠 노릇은, 지금 당장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펼쳐질 불길한 예감들이, 마치 먹구름처럼 몰려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적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집요하게 우리 곁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천년 왕국의 평화, 그 유토피아적 이상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몇 시간을 더 달려, 나는 마침내 <신의 땅> 경계에 도착했다. 이곳은 외부 세계와의 물리적, 기술적 단절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경계선 부근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나는 사리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 완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메멘토 모리.’ 그리고 차 안에 모든 통신 장비와 스마트 기기, 심지어 위장용 조끼까지 남겨두고 내렸다. 신의 땅에서는 어떤 현대적인 교통수단이나 통신 수단도 허용되지 않았다. 화려한 장식품이나 사치품조차 지닐 수 없었다. 오직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이 허락될 뿐이었다.

이 엄격한 규율은 이 땅의 시조(始祖)이신 <프라이스 다즈> 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세 번째 대멸종 이후, 그는 하늘(궤도 정거장과 인공위성 도시들), 그리고 다른 행성과 그 위성 식민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던, 신을 경외하는 선한 이들을 이끌고 폐허가 된 지구로 귀환했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신선하고 푸른 대지 위에서, 그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듯 새로운 인류 문명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지구를 정확히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각 구역의 역할과 의미를 규정했다. 중앙의 광활한 사막은 <텅 빈 땅>으로 남겨두었고, 동쪽은 <신의 땅>(철학, 신학, 인문 지식), 서쪽은 <정령의 땅>(죽음, 형벌, 고아 관리), 남쪽은 <환락의 땅>(예술, 문화, 관광, 인간적 쾌락), 북쪽은 <문명의 땅>(정치, 경제, 과학, 사회 발전)으로 명명했다. 국가의 통치와 경제, 과학 발전은 문명의 땅에서 이루어지되, 신의 땅은 절대 불가침의 성역으로 규정되었다. 환락의 땅은 인간의 디오니소스적 욕망을 보장하고, 정령의 땅은 삶의 시작(고아)과 끝(죽음), 그리고 질서 유지를 위한 형벌을 관장하는 구역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프라이스 다즈는 인간을 두 부류, 즉 다수인 <평민>과 소수인 <선민>으로 나누었다. 평민은 이 땅 어디에서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선민의 삶은 달랐다. 그들의 삶은 오롯이 평민을 위한 봉사와 희생에 맞춰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구현체였다. 선민의 자녀로 태어난 아이는 서쪽 정령의 땅에서 유년기 10년을 보내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배우고, 동쪽 신의 땅에서 청년기까지 신학과 지식을 쌓으며 정신을 단련했다. 이후 남쪽 환락의 땅에서 젊음의 유혹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한 자만이 중년이 되어 북쪽 문명의 땅으로 건너가 국가 운영에 참여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노년에는 다시 서쪽 정령의 땅으로 돌아가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규정되었다. 선민의 모든 삶의 궤적은 투명하게 공개되고 엄격하게 평가되었으며, 사소한 실수나 잘못으로도 그 신분을 박탈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 경제, 국방, 과학, 문화, 예술 등 모든 중요한 분야의 책임자로 살아가야 했지만, 사유 재산 소유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선민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를 왕으로 옹립하여 천년 왕국을 이끌게 했다.

이렇게 세워진 왕국은 설립자의 숭고한 의도에 따라, 천 년 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다. 적어도 북쪽 문명의 땅에서 막강한 경제력과 첨단 기술력, 그리고 태양계 식민지 대부분을 장악한 <파더스 가문>이 탐욕에 눈이 멀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의 야욕은 천년의 평화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몇 시간 더 걸었다. 발바닥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침내 시야가 트이면서,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자리 잡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투명하게 푸른 하늘 아래, 건물들은 오래되었지만 정갈하게 관리된 듯했고, 어딘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우선, 나 같은 외부 방문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좁은 골목길은 미로처럼 얽혀 경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했고, 돌길이 끝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졌다. 포도밭은 언덕 전체를 부드럽게 휘감으며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이어졌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고 해서, 혹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고 해서 그곳의 가치를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이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고,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비경이 수줍게 모습을 감춘 채, 우연히 찾아온 방문객에게 경이로운 놀라움을 선사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가파른 언덕 꼭대기를 온통 뒤덮고 있는 검은 회색빛 수도원이 마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이 풍경은, 비록 낡은 차량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준 곳이지만, 꽤 깊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을의 분위기는 그곳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드물게 눈에 띈 농부든, 수도사든 그들의 걸음걸이는 놀라울 정도로 느렸다. 마치 달 표면을 걷는 우주인처럼, 혹은 시간이 다른 차원으로 흐르는 듯했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환락의 땅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곳은 비정형과 불규칙, 끊임없는 가속과 예측 불가능함, 과시적인 드러냄과 은밀한 탐닉이 뒤섞여 들끓는 도가니였다. 넓게 뚫린 대로와 쓰레기가 쌓인 어두운 골목, 작은 혼돈들이 뭉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곳.

나는 폐부 깊숙이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낯선 환경이 주는 미묘한 불안감을 애써 떨쳐내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뜻하지 않은 공간에서 마주하는 생경함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존재다. 호기심은 때로 자기 보호 본능보다 더 강렬하고 충동적이다. 조금 전,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탐구심을 건드렸다. 나는 이곳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우선 지친 몸을 누일 숙소를 찾아야 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 산마루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빠르게 내려앉고 있었다.

두꺼운 슬레이트 지붕이 유난히 낮게 내려앉은 건물. 호텔임을 알리는 간판은 눈에 띄지 않게 작고 소박했다. 반질거리는 조약돌이 깔린 작은 공터를 지나자 비로소 입구가 나타났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구슬픈 클라브생 선율이 귓가를 맴돌았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인 듯했다. 안내대는 허름한 나무 칸막이 하나로 겨우 구분되어 있었다.

텅 빈 공간. 아무도 없었다. 손님은커녕 주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낡은 마호가니 서랍장만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벽지는 모서리마다 습기에 얼룩지고 부풀어 올라 있었다. 두꺼운 벨벳 커튼은 오랫동안 한 번도 펼쳐지지 않은 듯, 묵직하게 묶인 채 창문을 암울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 윤곽 위에는 회색빛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고, 창틀 구석에는 죽은 좀나방 몇 마리가 을씨년스럽게 붙어 있었다. 창문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은 피곤함과 불안감으로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호젓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한 이곳에서, 인간은 언제나 혼자였다. 나는 발길을 돌리려다 망설였다. 이 근처에서 다른 숙소를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여주인이 나타났을 때, 나는 낡은 소파에 기대앉아 <릴리안 나리>의 <호모 사피엔스 기록> <고대 철학 편>을 읽고 있었다. 벌써 한 달째 붙들고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아직 절반도 넘기지 못했다. 나는 유난히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나오면, 마치 고장 난 테이프처럼, 지칠 때까지 그 문장 주변을 맴돌며 곱씹어야 했다. 특히 이 책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난해했다. 마치 낱장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차라리 멍하니 기다리는 편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기다리는 동안 겨우 한 장 반을 더 읽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삼켰다. 수수한 마실꾼 차림의 여주인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신의 땅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술인 <하이드로멜리> 한 잔을 내 앞에 따라 주었다. 벌꿀과 물, 효모로 빚은,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향이 나는 술이었다. 그리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벽에 걸린 여러 개의 열쇠 꾸러미 중에서 하나를 내밀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희미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알아듣기 힘든 동부 억양이 심하게 섞인 공용어였다.

“301호예요. 3층 복도 맨 끝 방.”

“실례지만, 방값은…?” 나는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주머니 사정은 뻔했다.

“알아서 내요. 어차피 당신이 오늘 유일한 손님이니까.” 주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툭 내뱉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남겨진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시큼하면서도 톡 쏘는 향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그 순간, 헤어지기 전 아내와 보냈던 마지막 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욕망과 슬픔이 뒤섞인 그 밤의 기억이 왈칵 솟구쳤다. 나는 주머니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동전들을 모두 털어 낡은 안내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으며, 어둠 속으로, 나의 고독 속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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