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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를 바라보며

by 남킹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길: 역사의 갈림길에서 지도자의 무게를 묻다

역사의 장대한 태피스트리는 무수한 실로 짜여 있다. 그 실들은 때로는 영광스러운 황금빛으로, 때로는 처절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거대한 직물의 무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지도자의 선택이다. 한 사람의 혜안이 민족을 번영의 길로 이끌기도 하고, 한 사람의 어리석음이 국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보여준 외교적 성과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지도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만약 역사의 가정이 실현되어 다른 리더십 아래 이 회의가 진행되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마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역사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는 엄중한 교훈이다.

지도자의 무능과 오판이 한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파멸로 이끌었는지, 그 처절한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준엄한 경고를 들어야 한다.

네로, 황금 궁전의 광기와 로마의 비명

서기 1세기 로마, "세계의 수도"라 불리며 지중해를 호령하던 대제국은 네로라는 젊은 황제를 맞이했다. 그의 치세 초기에는 스승 세네카와 같은 현인들의 보좌 아래 제국은 안정을 누리는 듯했다. 그러나 젊은 황제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예술가적 광기와 편집증적 잔혹함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라 칭하며 국정을 소홀히 하고, 원로원을 무시했으며,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무참히 살해하는 폭정을 저질렀다.

서기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상당 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 비극 앞에서 네로는 "타오르는 로마를 보며 트로이의 최후를 노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화재의 원인이 네로 자신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그는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떠넘겨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다. 그는 화재로 폐허가 된 부지에 자신의 황금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를 건설하며 국민의 고통을 외면했다.

결국, 계속되는 폭정과 사치, 그리고 군대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원로원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고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자, 네로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 이후 로마는 '네 명의 황제 해'라 불리는 극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한 지도자의 광기가 위대한 로마 제국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비극이었다.

선조, 무능한 군주와 임진왜란의 참화

16세기 말 조선, 동아시아의 안정된 왕국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 앞에서 조선의 군주 선조는 무력함과 비겁함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하는 신하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당파 싸움에만 몰두했다.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챙겼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소식은 백성들에게 깊은 절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노비 문서를 태우기도 했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선조는 이순신과 같은 유능한 장수를 시기하고 의심하여 파직시키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 뻔했다. 그의 질투와 무능은 조선 수군을 칠천량 해전의 참패로 이끌었다.

임진왜란은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활약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극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공신 책봉 과정에서 자신의 몽진을 도운 이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의병장들은 역모로 몰아 숙청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지도자의 무능과 이기심이 나라와 백성을 얼마나 큰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선조의 사례는 뼈아픈 교훈을 남긴다.

루이 16세, 단두대의 이슬과 프랑스 혁명의 불꽃

18세기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가 구축한 절대왕정의 영광은 그 후손인 루이 16세에 이르러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선량했지만 우유부단했고, 국가를 통치하기보다는 사냥과 자물쇠 만들기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당시 프랑스는 계속된 전쟁과 왕실의 사치로 인해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대다수 국민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로 상징되듯, 민중의 고통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쌓여가는 불만 속에서 루이 16세는 개혁의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그는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했고,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제3신분의 요구를 외면하면서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1789년,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루이 16세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해외로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는 등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결국 그는 국민을 배신한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1793년 파리의 혁명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민심을 외면했을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광기와 야망이 빚어낸 인류의 재앙

20세기, 인류는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대전을 겪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한 독재자의 광기 어린 야망에서 비롯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 그리고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 속에서 독일 국민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국민적 좌절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부르짖으며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통해 국민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그의 광적인 인종주의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참극을 낳았고,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히틀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레벤스라움(생활 공간)" 확보를 명분으로 주변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전 세계를 화염에 휩싸이게 했고,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수많은 도시가 폐허로 변했으며, 인류의 문명은 파괴되었다. 결국 패전이 임박하자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죽음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그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인류의 역사에 깊은 흉터로 남아있다. 잘못된 이념과 증오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국가와 세계를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히틀러는 명백히 보여주었다.

지도자의 무게, 역사의 갈림길에서

이처럼 역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한 나라의 운명은 지도자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의 선택이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이다. 네로의 광기, 선조의 무능,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함, 그리고 히틀러의 광적인 야망은 모두 국가를 파멸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를 통해 우리가 목도한 것은 단순히 성공적인 외교 행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지키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어떠한 리더십이 필요한지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현명하고 용기 있으며, 무엇보다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선택하고 지지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안고 있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와 같은 지도자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어둠을 헤치고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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