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그림자, 혹은 향기

by 남킹


제주, 그 푸른 섬을 등지기 직전, 예기치 않은 불운이 내 왼쪽 눈을 덮쳤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코딱지만 한 소형차의 비좁은 트렁크 속으로 몇 안 되는 가방들을 욱여넣던 순간이었다. 억지로 밀어 넣던 가방 모서리가 하필이면 섬세한 각막을 할퀴고 지나갔다.

내 나이 마흔. 불혹이라 불리는 나이에 맞이한 이혼의 상흔은 깊었고,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제주의 품으로 흘러들었다. 게임 개발이라는 지난날의 치열함은 지긋지긋한 악몽처럼 떨쳐내고 싶었다. 섬에서의 삶은 느리고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어주리라 믿었건만, 현실은 냉혹했다. 고독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고, 생계의 무게는 여전히 고달팠다. 결국, 나는 섬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수도권 식당들에 주방 보조 자리를 알아보며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몇 곳에서 희미한 희망의 신호가 도착했다.

뭍으로 나서는 배가 완도항에 닻을 내렸을 때, 왼쪽 눈의 통증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박힌 듯, 매 순간 신경을 찌르는 고통은 시야마저 흐릿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한쪽 눈에 의지해 위태로운 곡예 운전을 하며, 나는 겨우 근처 안과를 찾아냈다. 낡고 빛바랜 간판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는 시골 병원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대기실을 채운 환자들까지 모두 희끗한 머리의 노인들이었다. 건물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퇴락했고, 의료 시설이라곤 구색만 갖춘 듯한 최소한의 것들뿐이었다. 이 불안한 공간에 내 소중한 눈을 온전히 맡겨도 될까. 의구심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내일 아침부터 줄줄이 잡힌 면접들을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밤새 서울까지 차를 몰아야 했다.

진료실의 공기는 묵직했고, 의사의 손길은 투박했다. 눈에는 안대를 대신할 보호용 콘택트렌즈가 삽입되었고, 일주일 치의 약 봉투가 손에 쥐어졌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를 되새기며, 나는 근처 허름한 다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적어도 몇 시간은 이 고통스러운 눈을 쉬게 해야 했다.

다방 안은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었다. 벽에는 낡아빠진 괘종시계가 멈춘 채 매달려 있었고, 80년대의 풍미를 물씬 풍기는 가수들의 빛바랜 브로마이드가 그 시절의 추억을 희미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손글씨로 적힌 ‘쌍화차, 유자차, 미숫가루’ 메뉴판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걸려 있었고, 작은 브라운관 TV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화질 낮은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나는 주저 없이 커피를 주문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아니면 이곳의 일상인지, 다방 안에는 나 홀로였다. 낡은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바람이 낮고 쓸쓸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주인장은 느릿한 동작으로 일어나 카운터 뒤편, 어둠이 드리워진 공간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짙은 갈색으로 착색된 두꺼운 유리잔에 담긴 커피가 내 앞에 놓였다. 희미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커피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한 모금 머금자, 프림과 설탕이 아낌없이 들어간,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약 기운이 온몸으로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눈의 격렬했던 통증이 점차 잦아들면서, 기분 좋은 나른함이 온몸을 감쌌다. 나는 감았던 눈을 더욱 편안하게 내린 채, 낡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모든 긴장이 스르르 풀려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맞은편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젊은 오빠! 혼자 왔어?”

그곳에는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묘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앉아 있었다. 화장은 짙었지만, 그 인공적인 가면 아래로 세월의 잔주름이 엷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손끝에서 우아하게 빙글빙글 돌리더니, 천천히 붉은 입술 새로 가져가 물었다. 라이터 불꽃이 어둠 속에서 잠시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희뿌연 담배 연기가 그녀의 얼굴 윤곽을 부드럽게 감싸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무너졌던 자세를 황급히 가다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맛 어때요? 우리 다방 신상품인데…”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며, 어딘가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이 오래된 다방의 분위기처럼, 모든 것이 한 박자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독특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더 음미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가볍게 웃더니, 허리를 뒤로 젖히며 창밖을 무심히 힐끗 바라보았다. 낡은 창문 너머로, 잿빛 바다가 잔잔한 수면 위로 햇살을 받아 낮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빠, 저도 커피 한 잔만 사주면 안 될까?”

그녀의 말끝에는 가느다란 애원의 그림자가 실려 있었다. 마치 오래되어 바늘이 튀는 낡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살짝 긁히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기는 음성이었다. 나는 또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만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매끄럽게 빛나는 살색 스타킹 아래로, 아찔한 높이의 검은 하이힐이 그녀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룻바닥이 낮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창문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이 낡은 커튼을 부드럽게 흔들며 그녀의 실루엣을 잠시 가렸다.

잠시 후, 그녀는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맞은편이 아니라, 주저 없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낡은 소파가 그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살짝 기울며 다시 한번 삐걱이는 소리를 내자, 그녀가 낮게 웃었다. 그 순간, 지독하리만치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나를 포위하듯 덮쳐왔다.

장미의 농염함과 머스크의 동물적인 관능미가 뒤섞인 듯한 짙은 향기, 오래된 분첩에서 풍길 법한 파우더 냄새, 그리고 그녀의 체취와 희미하게 밴 담배 냄새가 한데 엉켜 있었다. 그 복합적인 향기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나를 붙잡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농밀한 향기가 내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몸을 채워나갔다. 그녀는 커피 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내 팔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그 미묘한 접촉의 예감만으로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오빠는 무슨 일로 이 외딴 바닷가까지 내려온 거야?”

그녀는 커피 잔을 가볍게 흔들며, 인조 속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채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척 보니 서울 양반 같은데? 이런 시골까지 낚시하러 온 것 같지는 않고…”

그녀의 말끝이 뱀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는 다시 담배를 입술에 물었다. 하얀 연기가 실타래처럼 천천히 피어오르며 우리 사이를 희미하게 가로막았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에 제주도에서 배 타고 건너왔어요.”

그 한마디에 그녀의 손놀림이 순간 멈췄다. 놀란 듯 동그래진 그녀의 눈가에 밝은 빛이 번졌다. 그리고 이내 몸을 좀 더 내게로 바싹 기울이며,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 내 귓불에 나직이 말했다.

“게메, 제주도가 집이우꽈? 아이고, 기여? 그럼 반갑수다! 나도 제주사름이우다.”

순간, 너무나도 익숙한 제주 특유의 억양이 고막을 부드럽게 간질이며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말은 따스한 숨결과 함께 내 가슴속으로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그 찰나, 창밖에서 불어오던 바닷바람이 더욱 짙고 농밀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처럼, 따뜻한 눈빛을 교환하며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 함께 마셨다. 낯선 땅, 낯선 다방에서 만난 뜻밖의 동향인.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다방 한쪽 구석, 어둠 속에 숨겨진 듯한 쪽문을 통해 나는 홀린 듯 그녀를 따라 침실로 들어섰다. 그녀의 하이힐이 낡은 마룻바닥을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비밀스러운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낮은 북소리처럼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었다. 문턱을 넘으며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다방 안의 희뿌옇고 나른한 공기가 문틈 사이로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현실 세계에서 꿈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선 같았다.

방은 예상대로 어둡고 협소했다.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스탠드에서 번져 나오는 붉고 농염한 조명이 방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 요염한 빛은 마치 오래된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벽과 가구들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며 모든 사물에 비밀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벽 한쪽에는 낡은 화장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놓인 거울은 어슴푸레한 붉은빛을 반사하며 부서진 조각처럼 빛나고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온갖 종류의 향수병과 립스틱, 그리고 크고 작은 화장품들이 마치 제례의 도구처럼 어지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창문은 두텁고 무거운 커튼으로 단단히 틀어막혀 있어, 바깥세상의 소란함은 이곳까지 전혀 닿지 않았다. 오직 방 안에 감도는 두 사람의 미세한 숨결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고동 소리, 그리고 마치 밀랍처럼 천천히 흘러내리는 듯한 시간의 무게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스탠드의 붉은 조명이 그녀의 얼굴 윤곽을 스치며 부드럽고도 관능적인 그림자를 만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끝이 내 셔츠의 첫 번째 단추 위에서 잠시 맴돌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능숙한,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손길이었다.

첫 번째 단추가 힘없이 풀렸다. 뒤이어 그녀의 손길은 주저함 없이 서서히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공간에 흐르는 농밀한 공기와 체온에서 비롯된 미묘한 온기, 그리고 그녀의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손길이 이 작은 방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 혹은 깊은 꿈속을 헤매는 듯, 그저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결혼 생활 이후, 돈을 지불하고 여인의 몸을 탐하는 것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흉곽 안에서 미친 듯이 퍼덕였다. 마치 갇힌 새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억누를 수 없는 격렬한 파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숨이 가빠지고, 혈관 속의 피가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이성의 끈은 이미 녹아내려 흔적도 없었다. 오직 원초적인 본능만이 남아, 나를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그녀의 손끝이 내 맨살에 스치는 순간, 작은 불꽃이 파밧, 하고 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따스한 살결이 내 몸에 닿는 순간, 내 안에 깊이 숨죽이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야수처럼 거칠게 반응하며 깨어났다.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뜨겁고도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 감촉, 가쁘게 떨리는 미세한 호흡,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거친 숨결의 열기. 그 모든 것이 나를 어둡고 깊은 쾌락의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옷가지들이 하나둘씩 힘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허물처럼, 혹은 낡은 껍질처럼. 실처럼 가늘게 이어지던 마지막 이성의 저항선이 속절없이 사라지고, 마침내 두 개의 벌거벗은 몸이 어둠 속에서 온전히 마주했다. 맨살과 맨살이 부딪치는 순간, 숨이 멎을 듯한 강렬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솟구쳐 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원초적인 욕망이 화산처럼 한순간에 폭발하며 터져 나왔다.

이성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녹아내려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순수한 본능뿐이었다. 짙어진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몸을 굶주린 짐승처럼 탐했다. 그녀의 노련한 손길이 나를 능숙하게 휘감았고, 나 역시 걷잡을 수 없이 그녀의 유혹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이 작은 공간을 짓누르던 무거운 적막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늘고 날카로운 신음과 심장의 거친 고동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오직 온몸으로 타오르는 강렬한 감각만이 남아, 거칠고도 격렬하게 우리 두 사람을 남김없이 삼켜버렸다.

낯선 도시, 안산의 시내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새벽 3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들은 마치 거대한 캔버스 위에 번진 물감처럼, 혹은 만성적인 피로감처럼 도로 위에 희미하게 스며들어 있었고, 간간이 새벽의 어둠을 헤매는 택시들의 노란 불빛과 편의점 앞을 하릴없이 서성이는 그림자들이 가로등 아래 길고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길고도 농밀한 하루였다. 푸른 제주도의 항구를 떠나, 완도항의 비릿한 공기를 마시고, 시골 병원의 어색하고 불안한 공기와 낡은 다방의 묵은 커피 향을 지나, 낯선 여인의 품속에서 지독한 열기와 관능을 삼킨 뒤, 다시 한쪽 눈의 통증을 애써 참으며 밤새도록 고속도로를 달려왔다. 차창 틈으로 스며든 새벽 공기는 칼날처럼 차갑고도 무거웠으며, 마치 내면의 공허를 파고드는 듯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피로가 마치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온몸에 겹겹이 엉겨 붙어 있었다. 장거리 여행과 낯선 길 위에서의 야간 운전이 가져온 여독, 그리고 잠시 잠깐 탐닉했던 육체의 향연이 동반한 깊은 탈진감이, 차창 밖의 짙은 어둠처럼 나를 송두리째 덮쳐왔다. 온몸의 근육은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었고, 신경은 희미하게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처럼 가냘픈 피로 속에서 겨우 깨어 있는 듯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겁게 감겨왔다. 뒷목을 주무르며 천천히 뻐근한 고개를 풀어 보았지만, 피로는 더욱 끈적하게 살갗 깊숙이 스며들 뿐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거친 파도와 싸우다 겨우 육지에 발을 디딘 늙은 선원이, 발밑에서 흔들리는 땅의 감각에 어지러워하며 기진맥진 쓰러지는 것처럼, 내 몸뚱이도 길게 이어진 피로의 늪 속으로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위태롭게 차를 갓길에 세우고, 폐부 깊숙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엔진의 낮은 포효가 잦아들자마자, 주변은 낯선 도시 특유의 생경한 정적 속으로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이대로 잠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공포감에 억지로 다시 번쩍 떴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억지로 생각을 짜내기 시작했다.

첫 면접은 오전 10시. 지금 당장 인근 모텔에 방을 잡는다 해도, 고작해야 서너 시간밖에 눈을 붙일 수 없다. 그마저도 침대에 채 눕기도 전에 알람이 울려 퍼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더군다나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온전한 숙박비를 지불하는 것은 어딘가 부당하고 아깝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찜질방을 찾아 뜨끈한 불가마에 지친 몸을 지지며 늘어지게 시간을 때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뜨거운 열기에 얼마간이라도 이 지독한 피로가 풀릴 수 있을 테지. 아니면, 이보다 더 나은, 더 효율적인 방법이 과연 뭐가 있을까? 그때, 무심코 고개를 들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내 흐릿한 시야 속으로 강렬하게 파고드는 어떤 광경.

붉고 푸른, 때로는 현란한 녹색의 네온사인들이 깊은 어둠을 날카롭게 가르며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도시의 혈관처럼, 건물마다 일렬로 늘어선 간판들 위로 ‘마사지’, ‘휴식’, ‘릴렉스’, ‘전통 관리’ 따위의 단어들이 새벽 공기 속에서 유혹적인 파동처럼 번져나갔다. 깊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나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의 손짓이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온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껏 내려앉은 눈꺼풀 위로, 네온사인의 현란한 빛줄기가 도로 위에 길게 번지면서, 마치 나를 그곳으로 부드럽게 이끄는 마법의 길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치 비밀스러운 의식에 참여하는 신도처럼, ‘남성 전문 휴식 센터’라고 적힌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문 위쪽에 달린 작은 종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하면서도 어딘가 인공적인 향기가 코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라벤더의 평온함과 백단향의 묵직함이 절묘하게 뒤섞인 듯한, 나른하고도 차분한 향기였다. 온기가 안개처럼 감도는 실내는 바깥의 싸늘하고 거친 새벽 공기와는 완전히 다른, 격리된 별천지처럼 느껴졌다.

카운터 뒤편에서 중년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따스하고도 능숙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의 눈빛에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손님의 필요를 간파하는 듯한 예리함이 스며 있었다.

"혹시… 아침까지 잠시 머물 수 있을까요?" 나는 최대한 무심하고 건조한 어투로 물었다. 내 목소리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

"물론입니다, 손님." 그는 대리석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며, 카운터 뒤쪽 벽에 정갈하게 걸린 고급스러운 메뉴판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어떤 서비스를 원하시겠습니까? 저희 센터는 고객님의 완벽한 휴식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신사 전용 힐링 센터 - 섬세한 손길, 깊은 휴식: 안마, 마사지 & 프리미엄 목욕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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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하게 나열된 메뉴를 응시하는 순간, 내 입가에서 자조적인 쓴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지만, 그 물을 마시기 위해 복잡한 암호를 풀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젠장할! 이토록 현란하고 복잡한 선택지들은 또 뭔가. 마치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을 이곳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군.'

이미 하루 동안 겪은 온갖 사건의 무게로 납덩이처럼 짓눌린 내 사고는, 이 화려하고 다양한 옵션들의 미로 앞에서 더욱 방향을 잃고 무거워져 갔다. 피로가 뼛속까지 시리게 스며든 지금, 이런 세세한 항목들을 비교하고 결정하는 행위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저는 그냥… 정말이지 그냥… 잠시 눈 좀 붙였다가 가고 싶을 뿐입니다." 내 목소리는 마치 오랜 가뭄 끝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마르고 힘없이 새어 나왔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떤 호화로운 서비스도, 정교하고 섬세한 마사지도 아니었다. 그저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조용하고 작은 방, 타인의 시선이나 방해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은신처,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의식의 끈을 놓아버릴 수 있는 깊고 안온한 침묵의 공간만이 절실했다.

"그러시다면… 손님…" 그의 목소리는 한 톤 낮아지며, 마치 은밀한 비밀을 나누는 듯한 묘한 친밀감을 띠었다.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저희가 특별히 준비한 서비스가 하나 있습니다만… 특히 새벽녘에 찾아주시는 지친 손님들께만 암암리에 제공하는 겁니다만… 한번 받아 보시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노골적이지 않지만 분명한, 어떤 종류의 제안이 안개처럼 스며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선택의 무게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무겁게 가라앉은 고개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끄덕였다.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네… 아무거나… 그걸로… 네…" 내 목소리는 지친 파도가 해변에 거의 닿을 듯 말 듯, 희미하게 부서지며 퍼져나갔다.

"그거로… 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줄기가 밤새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던 근육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따스한 온기가 피부 깊숙이 스며드는 동안, 복잡하게 얽혀 있던 머릿속은 서서히 비워져 갔다. 샤워실의 차가운 백색 타일 위에 방울방울 맺혔던 물방울들은, 마치 내 혼란스럽고 무거웠던 생각들처럼, 중력에 이끌려 서서히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리며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물기를 닦고 가운을 걸친 나는 안내받은 7호 방문 앞에 섰다. 짙은 검은색 마호가니 나무로 된 묵직한 문은, 부드러우면서도 중후한 감촉과 함께 내 앞에 새로운, 미지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방 안은 눈이 편안할 정도의 은은한 간접 조명이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중앙에 놓인 킹사이즈 침대는 마치 지친 나그네에게 안식을 약속하는 고요한 성소처럼 나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마치 꿈속을 거닐듯 걸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최고급 구스다운을 사용한 듯한 매트리스는 내 체중을 정확히 감지하며 완벽하게 반응했고, 구름 위에 앉은 듯 나를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그 순간, 온몸을 짓누르던 모든 긴장과 피로가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섬세하게 정돈된 순백의 호텔식 시트 위로,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친 몸을 뉘었다. 텅 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깊고 느린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서야 이 공간에 아주 옅게 스며있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섬세하게 느껴졌다.

의식이 안개처럼 흐릿하게 멀어져 가며 잠의 경계선을 넘어서려는 바로 그 찰나, 문밖에서 아주 부드럽고 예의 바른 노크 소리가 두어 번 들려왔다. 나의 허락을 기다릴 새도 없이, 문은 소리 없이 조용히 열렸고, 그 열린 틈새로 한 여인의 우아한 실루엣이 방 안의 부드러운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들어왔다. 나는 완전히 깨어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잠들지도 않은 채, 반쯤 감긴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흐릿하게 좇았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는 마치 잘 짜인 안무를 추는 발레리나처럼 유려하고 기품이 넘쳤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섬세한 우아함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차갑게 식어 잠들어 있던 심장이 다시 미약한 생명력을 되찾은 듯, 느리게,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나를 짓누르던 지독한 피로와 세상만사에 대한 무관심은, 마치 밀물이 빠져나가듯 서서히 내 몸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감이 방 안의 공기를 미묘하게 바꾸면서, 내 온몸의 감각들은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처럼 하나둘 예민하게 깨어났다. 내 안의 모든 신경과 의식이 오롯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방 한쪽에 놓인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마치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의 의식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고 있던 실크 가운의 허리끈을 풀었다. 이윽고 드러난 브래지어의 어깨끈을 능숙하게 내리고, 등 뒤의 후크를 풀었다. 숙련되고 절제된 동작으로 그것을 벗어 정성스럽게 접어 옆 작은 선반 위에 올려놓는 모습에는,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조금의 수줍음도 없는 당당함과 우아함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은 마치 신성한 제례를 치르는 고대 여사제의 그것처럼 경건하면서도 지극히 관능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듯, 나를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왔다. 침대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아, 그녀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맨살에 처음 닿는 순간, 나는 마치 예리한 전류에 감전된 듯한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그 손길은 결코 서툴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나를 알고 지내왔던 것처럼, 혹은 내 몸의 모든 비밀스러운 지도를 이미 꿰뚫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내 몸의 지형을 따라 망설임 없이, 그러나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면의 가장 깊은 어둠과 가장 예민한 부분을 더듬어 찾아내는 듯한, 그녀의 그 익숙하고도 노련한 손길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서서히 나 자신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항이 아니라, 예견된 평온을 향한 기꺼운 침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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