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 - 조지 고든 바이런
시골의 아침은 옅은 안개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햇살은 좀 더 선명하고 투명해졌다.
장막이 걷힌 무대는, 어제는 미처 깨닫지 못한 다른 사물과 공간, 배경을 남겼다.
낯섦 속으로 라후라는 발걸음을 뗐다.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유럽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을 표현했다.
낡은 카페와 허름한 빵집.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빙 둘러쓴 성당.
아담한 광장.
그곳에 어울리는 조그마한 분수대.
구불구불한 좁은 돌길과 계단.
바싹 마르고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걷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들뜬 새소리. 느긋한 자동차 소리.
마치 실재하는 갈등을 모두 흡수한 판타지 세상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모든 현실의 일들은 아무 의미도 없고, 그의 과거가 외롭고 비련 하거나 혹은 절망적일지라도,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 초기화라도 한 듯 텅 빈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아무 거치적거릴 것 없는 투명한 물속을 부유하는 듯 가벼워졌다.
그의 발걸음은, 부정적인 사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본능대로 거리를 지나, 점점 좁고 가팔라지는 계단 길을 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등이 축축하였다.
눈에도 짠 물이 맺혔다.
아주 가끔 눈에 띄는 주민들과 눈인사가 이어졌다.
표정은 심통 하지만 미소가 배어있었다.
도시의 판매상에게서 느끼는 서글픈 억지 미소는 아니었다.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직조한, 살아 있는 것을 위한 스웨터 같은 거였다.
발바닥의 통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그는 낡고 좁은 유리문이 여러 개 성기게 박힌 문 앞에 멈췄다.
맥이 다 빠진 듯 몸이 휘청거렸다.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결코, 닫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땀이 들어간 눈이 시렸다.
로마네스크식 성당의 둥근 천장이나 입구를 이루는 아치처럼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앉아 더워진 몸을 식히며 이곳을 감상했다.
지금껏 마주한 유럽의 신전이나 사원 대부분은 어둡고 썰렁하였다.
그리고 전례 음악은 엄숙하고 비장하였다.
사제는 순교자들의 수난을 기리기 위하여 검은 옷을 입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모로 보나 지극히 종교적인 마음가짐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숙연함이 느껴졌다.
가벼운 차림의 여행객이라도 선뜻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약간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수도사가 발소리를 잊은 채 지나갔다.
정적이 한결 더 깊어졌다.
조금 안쪽에 짙은 색의 우단이 덮인 기도대 같은 게 보였다.
햇살이 살짝 비켜 머물렀다.
그리고 덧보태지 않은 단순한 장식들이, 어둠에 익숙하게 된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순식간에 중세 시대로 돌아갔다.
사실, 멀리서 쳐다본 수도원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화강암이 제멋대로 솟은 암산에 덧댄 조형물처럼 거북살스러웠다.
하지만 눈앞에 맞이한 내부는, 서늘하고 신비한 공기가 속을 채운, 정돈된 차분함을 나타내는 묘한 끌림을 선사했다.
그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천천히 속으로 들어갔다.
크고 둥근 홀이 나타났다. 홀을 중심으로 열주가 좌우로 뻗어있다.
어느 곳을 보던 똑같은 모습이지만, 한 걸음만 더 열주에 가까이 가면 장식된 문양이 제각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열주 양쪽에는 측량이 붙어 있다.
열주가 끝난 곳에는 작지만 둥근 홀처럼 생긴 익랑이 나타났다.
그는 익랑의 중심에 서서 천천히 사방을 둘러봤다.
가장 환하고 눈에 띄는 성가대와 제단은 유럽 어디를 가던 볼 수 있는 특색 없는 모습이었지만, 가로보다 세로가 지나치게 긴 십자가와 지극히 단순한 모습의 예수상은, 종교에 심드렁한 방문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푸근했다.
신이라는 관념 말이다.
이 관념은 어느 날 생겨난 뒤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전파되어 왔으며, 복음과 경전, 음악과 미술 등을 통해서 중계되고 확대됐다.
또, 이 관념은 사제들을 통하여 재생산됐고 사제들이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에 맞도록 재해석되어 왔다.
밝은 빛을 따라 나온 곳은, 딱딱한 바닥 돌이 엉성하게 박힌 열린 공간이었다.
몇 군데 뜰을 지나자 광장으로 보기에는 작았고, 뒷마당으로 보기에는 다소 넓은 곳이 나왔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함>은 거북하였다.
정면과 양옆으로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건물이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육중하고 낡은, 각각의 외짝으로 된 문에는 다른 색의 배경에 다른 모습의 성인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좌측은, 푸른색 하늘에 갈색 수도 복장의 성인이 눈동자와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정면은, 짙은 노란색으로 물든 대지를 화려한 복장의 성인이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우측은 붉은색의 태양을 등진 채, 두 팔을 양옆으로 쭉 편, 흰색 복장의 성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등장인물이 모두 성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둥근 후광이 모두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광장 중앙에 마련된 돌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고, 가련한 그의 발에 휴식을 잠시 부여했다.
후눅한 바람에 고린내가 살살 올라왔다.
축축하게 젖어 살에 찰싹 달라붙은 셔츠에서도 땀에 찌든 냄새가 났다.
조금 기진맥진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잠시, 지극히 청아한 하늘을 쳐다봤다.
무엇과도 견주기 어려울 만큼 순수했다.
어디선가 눈을 찌르는 듯한 그을음 냄새가 훅하고 들어왔다.
그는 바닥의 돌을 유심히 쳐다봤다.
산에서 경험한 것을 응용하기로 생각했다.
길은 사람이나 동물이 가장 많이 다닌 곳으로 나기 마련이다.
딱딱한 돌이지만 좀 더 닳아서 윤기가 나는 곳을 살펴봤다.
정면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문에 난 쇠로 된 손잡이를 잡고 힘있게 밀었다.
공간은 넓었다.
그리고 갈색 조명 아래 무수하게 많은 책이 꽂혀있었다.
오래된 냄새가 났다.
흩날린 적이 없는, 무겁고도 탁하며 지식을 내포한 공기가 폭넓게 깔려있었다.
그는 그 육중한 무게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내부에 깃든 어지러움이 만져졌다.
순간 달음박질치고 싶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잿빛의 긴장된 얼굴을 한 수도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만 모든 충동이 분해되어 버렸다.
그는 푹 파인 관자놀이 위로 편안한 미소를 띠며 낯선 방문자를 끌어당겼다.
그는 무겁고 맥없는 표정으로, 산만한 미소를 남발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테이블을 점령한 수도사들 곁을 조용히 지나갔다.
창문은 널찍한 격벽으로 되어 일정한 간격으로 열려있었다.
자연 채광이 질서정연하게 보였다.
모든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갖추어져 있는 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보였다.
에테르 냄새가 났다.
같은 공간의 두 번째 실에 들어서자 일반인이 눈에 띄었다.
얼룩덜룩하였다. 마치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뀐 느낌이다.
다양한 모습의 인간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텅 비어 있고, 아무런 감정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덧정이 뚝 떨어지는 광경이지만, 그런 모습이 묘하게 안정감을 심어주었다.
양 벽에는 유화가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다.
그 속에 슬픔을 담은 성녀가 눈에 띄었다.
보라색 실루엣이 거친 질료와 어우러져, 기묘한 그림자로 여인의 봉긋한 가슴을 가렸다.
모든 것은 규칙적이었다.
희미하게 비추는 램프는 일정한 간격의 책상에 중앙을 차지하고 달빛처럼 고아하다.
그는 몽롱한 자태로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모서리가 잔뜩 닳은 고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친숙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한국인, 멀어도 중국인 정도로 보였다.
흐리멍덩하게 슬픈 듯한 옆 모습. 단색의 옅은 머플러가 옷깃 주위에 헐렁하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쪽 발을 들들 거리고 있었다.
그는 무슨 끌림처럼 그녀 맞은 편에 앉았다.
해면처럼 부드러운 먼지가 부유했다. 그녀의 이마가 조명에 반짝였다.
뜨뜻하고 푸르뎅뎅한 여드름이 잔뜩 붙었다.
타닥거리는 옅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얽히고설킨 사이처럼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몰아의 표정. 아무런 변화가 없는 얼굴은 마치 정지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 위쪽 여닫이 창문 틈으로 번지르르하게 빗은 붉은 햇살이 넘어왔다.
마침내 그녀가 눈을 들었다.
잠시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모가 난 듯 투박스러웠다.
그리고 쉼 없이 다리를 흔들었다.
라후라는 그녀에게 영어로 쓴 쪽지를 건넸다.
“한국인인가요?” 그러자 그녀가 속삭였다.
“국적, 태생, 혈통에 따라 다 달라요.”
“그럼 혈통이겠군요?” 그는 나직이 그녀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네. 그렇죠. 참고로 미국 태생에 프랑스 국적이죠.
혹시 데이트 신청할 생각이라면 하세요.
참고로, 입맛은 이탈리아입니다.” 여자가 속삭였다.
라후라는 조용히 가방에서 그녀가 저술한 <호모 사피엔스 기록>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릴리안 나리 교수님.”
그녀는 잠시 책을 바라본 뒤, 나직히 그에게 물었다.
“사피엔티아?”
“네. 8의 형제 라후라입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나요?”
“네.”
“이 마을에는 딱 하나의 카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시면 준비해서 나가겠습니다.”
라후라는 수도원을 나와 천천히 마을로 내려갔다.
그는 사방에 펼쳐진 목초지와 온갖 종류의 밭을 지나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광장과 코딱지만 한 시청, 잡화점 을 지나 마침내 카페를 발견했다.
그는 야외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이 정도라도 갖추어 진 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기다란 깔 때 모자와 붉은색이 감도는 슈미트 가방, 은색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그녀는 발을 녹색 발판에 문질러 구두에 묻은 흙을 털고는 성큼성큼 들어와 트렌치코트를 훌쩍 벗어 의자에 걸친 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까운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카페 주인과 무척 친한 듯,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으며, 에스프레소 더블을 주문하였다.
주문한 차가 나온 뒤, 라후라는 천천히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천천히 낮은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들의 침공이 시작되면, 이미 가우타님에게서 전달 받은 특수기기외의 모든 스마트 기기는 폐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교수님이 안전하게 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특수잠금장치의 해제 과정와 인정 절차를 곧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멸종이 시작되면, 많은 기록이 교수님에게로 전달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교수님이 보유하신 고대 언어 지식과 사리님께서 전달하신 특수 기호, 그리고 가우타님의 암호 해독 코드의 조합으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지금까지 개발된 어떤 양자 컴퓨터 혹은 인공지능도 해석을 못할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추적할 것입니다.
부디 안전하게 몸을 보존하시고 약간의 의심스러운 사건도 저희 형제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님의 안전이 저희들의 최고 우선순위입니다. 그리고···”
“네, 그리고?”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네, 뭔가요?”
“1의 형제인 사리님 말씀에 의하면, 이곳, 수도원 카타콤은 아마겟돈에 대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후라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서?”
“제 여인을 이곳에 보내도 될까요? 이름은 제냐 아프로디칸스키입니다.
인도 혈통의 폴란드인입니다.”
“당신의 여인? 아내는 아니군요?”
“언젠가는 될겁니다. 제 가슴속에는 이미...”
“그럼, 당신은 제냐와 같이 있지 않을 거군요?”
“네, 저는 한국으로 가야합니다. 사피엔티아의 마지막 형제, 아난다를 도와야 합니다.”
“아난다?”
“네, 교수님께서 해석하신 예언서 <나탈리의 일기장> 최종 페이지에 나오는 인물···”
“그럼?”
“네, 저는 믿고있습니다. 그가 바로 그 분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