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영혼

by 남킹
희대의 천재이자 조현병 환자였던 아놀드 내시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검은 세력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음을 인지하고, 가우타의 비밀 계정을 해킹하였다.
그는 스스로 사피엔티아가 되기를 원했고, 가우타는 그에게 12의 형제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모든 정보를 가우타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가 사는 인구 10만도 되지 않는 도시에 첫 번째 핵폭탄이 터졌다.
아니룻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구 천만 이하의 도시에 떨어진 유일한 핵폭탄이었다.
그는 아마겟돈에서 희생된 첫 번째 사피엔티아다. (<릴리안 나리>의 <호모 사피엔스 기록> <대멸종 편> 66장 99절)


이야기는 조각처럼 이어졌다.

각 사건의 단락은 뒤틀리고 휘어졌지만 추리는 비약하지 않았다.

4층 버튼을 누른 남녀는 지나치게 야하고 속물다웠다.

남자는 끈적거리는 더러운 손으로 여자를 끌어당기며 흐물거린다.

안티노오스의 얼굴.

여자는 붉은 입술을 한껏 벌리고 숨을 내뱉는다.

4와 13 버튼만 불을 밝힌 엘리베이터 안.

아니룻의 시선이 멈춘 천장.

번질거리는 노란 빛에 벌레가 가득하다.


싸구려 화장품과 값싼 위스키 향이 공간을 채운다.

여자가 꿈틀댄다.

게을러터진 승강기.

16층 오피스텔.

2개의 엘리베이터.

4개의 패널.

그는 오른쪽 엘리베이터를 탔어야 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알았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4층 방을 유일하게 사용하는 그녀가 탔다는 사실을.


멍청한 시공사는, 이곳이 온갖 잡동사니 인종들이 섞여 있는 우범지역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급 오피스텔을 지었다.

날이 갈수록 고상한 사람들이 떠났다.

언제나 적막한 복도. 넋들이 서성거린다.

당연하게도 성한 게 남아날 리가 없다.

모든 가치 있는 것은 뜯어지고 사라졌다.

공동묘지처럼 썰렁한 빌딩은 이제 누더기로 붙여 이어졌다.


막바지에 몰린 인간들이 터를 잡는다.

만일 그가 재기할 생각이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파멸이 눈앞에 있다.

이것만이 명백한 사실이다.


낮고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췄다.

아니 추측했다.

오른쪽 패널에는 4가 없다.

5번 버튼이 깜빡인다.

그리고 왼쪽 패널에는 13이 없다.

그가 사는 12층을 가기 위해 그는 종종 13을 눌러야 한다.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16층 오피스텔에 4와 13이 하나씩 만 없는 패널을 가진 2개의 엘리베이터.


왼쪽 엘리베이터는 코너를 디귿으로 돌아야 나타난다.

그리고 정확히 오른쪽 엘리베이터와 반대다.

13과 4가 하나씩 빠진 패널.

문이 억지로 열린다.

여자가 크게 하품하며 내린다.

남자가 쓰러질 듯이 흔들거리며 뒤따른다.

문이 닫힌다.

낡은 쇳덩이는 흔들리고 기우뚱거리더니 부르르 떤다.

기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오르기 시작한다.


긁히고 갉힌 벽에 붙은, 오래된 거울이 간당간당 달려있다.

텅 빈 거울.

반사되지 않는 물건.

구석을 가득 채운 쓰레기.

쓸모를 잃은 것들.

이곳을 장식한 모든 낡음은 소멸을 심미적으로 표현한다.

자포자기가 바닥을 채웠다.

그는 이제 어떤 행동에도 삶의 의지가 없다.

그는 자기의 영혼을 흩뿌릴 속셈이다.

순환을 거부하고 살아 숨 쉬는 개체로서의 잉태 가능성을 막을 것이다.


오른쪽 13번 버튼과 왼쪽 12번 버튼이 반짝인다.

엘리베이터가 정지한다.

잠시 기계는 자신을 음미한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텅 빈 복도.

자욱하게 번진 어두움.

바람이 몰고 간 비닐.

노란 번득임이 까딱거린다.

형태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

무관심이 방치되어 있다.

그 속을 헤치며 그는 1214호에 멈췄다.

1213호는 없다.

하지만 뜯겨 나간 자국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이곳이 원래 1213호였다는 것을.


낡은 문.

녹슨 손잡이.

그는 버튼식 현관문에 손을 가져간다.

8.8.8.8.

그가 기억하는 유일한 숫자.

1214를 모두 합쳐 만든 번호.

그는 현관을 점령한 낡은 신발 무더기를 헤치고 들어간다.

어지러운 방. 갈가리 찢어진 그의 삶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들.

자취를 감춘 기억 더미.

버려진 물건에는 유령조차 스며들지 않는다.

갈라지고 으깨어지고 파이고 마모되고 더러워진 것들.

한때 그의 욕망에 이용되었던 가여운 것들.


그는 세상 무엇보다 가볍다.

오래된 침대에 몸을 뉘어도 먼지조차 반응이 없다.

공허함이 공간을 채웠다.

검은 얼룩이 굴곡으로 그려진 천장.

무정형으로 번진 자국이 소음을 삼킨 듯 음울하다.


그는 변덕스럽다.

즐거움과 우울함이 공존한다.

누른 한 줄기 햇빛은 고통이고, 가녀린 주황색 햇살은 안락함이다.

밤에는 웃고 낮에는 두렵다.

그는 매번 절벽을 뛰어드는 발작에 깨지만 허공을 지탱할 손잡이는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미궁.

빈 곳은 좁아진다.

날이 갈수록 그는 위축된다.

머뭇거림과 서성거림이 더해진다.

떠날 수 없는 가여운 영혼.


“...”

음성이 들린다.

지나치게 얇은 벽.

여자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전해온다.

신음. 삐끗거리는 녹슨 침대. 거친 호흡.

익숙한 그녀의 음성.

사방으로 흩어지는 날카로운 소리.

그는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가까이에 그녀가 있다.

4층을 독차지한 여자.

녀석과 정사를 펼치고 있다.

공기 전체를 흔드는 진동.

손끝이 떨린다.

여자는 틀림없이 4층에 내렸다.

내 눈으로 똑똑히 관찰하지 않았는가!

늘어진 철문이 힘들게 닫히던 그 순간을.


혼란과 두려움이 엉킨다.

세상이 삐딱하게 어긋난다.

그의 공간이 그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되었다.

그의 몸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때도 이러진 않았다.

현실이 상상을 누른다.

이어지는 소음.

찢어질 듯 앙칼진 비명.

이건 절정의 순간을 수식하는 메아리가 아니다.


벽에 부딪히는 둔탁함. 사랑과 절망이 공존하는 역설. 높낮이가 거칠게 바뀌는 호흡.

묵은 기억이 풀어지며 흐느적거린다.

여느 때 같지 않은 마지막 여정.


그러다 절망적인 목소리가 벽을 타고 할퀸다.

낮은 소음.

<아무것도 없음>으로 돌아가는 낯선 여정.

색깔과 소리가 사라진 세계.

어둠은 온갖 색상을 포용한다.


그는 기억한다.

모든 햇살이 꽉 들어찬 오후의 공원.

황량한 그를 뛰게 만들던 여인. 그가 보는 모든 것은 사랑스러움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들어왔다.

마치 그의 몸은 빈 것으로 된 듯, 처음에는 평온함이, 잠시 뜸을 들인 뒤, 결국에는 행복감이 구석구석을 채운다.

비로소 그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원칙이 전혀 없어 보여요.” 그래서 여자가 그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색의 날들은 꿈처럼 이어진다.

환함과 조화로움이 형상되어 눈 앞에 펼쳐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을 찾은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내 모두에 당신이 있겠니?”

“터져버릴 지경이야.” 숨이 턱 끝에 걸려 대롱거린다.

여인은 눈을 맞추고 그의 입술에 손을 댄다.

어리석은 관념은 떨쳐야 한다.

불길하고 천한 현실은 애써 던져버려야 한다.


두텁고 녹슨 창문이 갈색 바람을 쏟아 낸다.

끄덕 끄덕거리며 열림과 닫힘을 반복한다.

그는 무기력하다.

가냘픈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모든 보임은 수동적이고, 바람은 의지와 상관없이 놓여있다.

가녀린 길에 놓인 낮은 하늘. 공포와 절망이 덮친 대지. 개인의 행복 따위는 용납하지 않는 법.

지구에서 언제나 인간은 낯선 존재였다.


진실하지 않은 게 더 진실 같은 이상한 고등 동물.

거짓과 탐욕, 폭력과 파멸이 온 세상을 덮었다.

지성과 선한 철학은 어둠에 덮였다.

동족을 파괴하는 기이한 생물. 멸종이 와서야 비로소 지나간 것들이 처절하게 아름답다.

아내는 눈물을 흘린다.


‘내 슬픔의 모든 것. 결국, 당신뿐이었다. 늘 당신의 사랑을 갈구하였다.’ 그는 뺨을 적신 피를 닦는다.

낡은 건물이 흔들린다.

사방의 갈라짐에서 먼지가 피어오른다.

특정한 곡선과 직선이 삐걱거린다.

회색으로 포장한 색들이 빛 속을 유영한다.


따사로운 감정의 흔적들.

경이로운 과거.

미천한 현재.

암울한 미래.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그의 영혼이 따스하게 녹는다.

“죽음이 끝이 아니잖아요. 단지 당신을 보지 못한다는 게 슬플 뿐이에요.” 그의 영혼이 서성거린다.

당신이 사라진 공간.

가녀린 길에 놓인 우중충한 하늘.


종말은 영혼만 남겨두었다.

서성거리는 불쌍한 관념. 폐허가 된 도시.

그는 여전히 아내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2066년이 저문다.

오염된 검은 바람이 다시 분다.

방사능 낙진이 피어오른다.


남킹의 문장 1 (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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