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나 폐허였다. 더럽거나 무질서하거나 거칠거나 황량하였다. 절망과 고통이 세상의 전부였다.
죽은 이의 악취와 살아 남은자의 악행이 곳곳에 스며들고 깃들여 있었다.
(<릴리안 나리>의 <호모 사피엔스 기록> <대멸종 편> 84장 13절)
임마누엘은 진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무너진 벽돌, 낡은 선반 위로 먼지가 피어오른다.
뒤이어 '쾅' 하며 폭음도 들려왔다.
그는, 벽에 붙은 간이침대에서, 낡은 모포를 세차게 젖히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두려움이 그를 휘감았다.
그는 휘청거리며 몸을 맞은편 벽 쪽으로 붙였다.
긴장과 공포가 뒤섞인 어두움이 그의 발에 걸려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다양한 기계음 소리.
가까이 혹은 멀리서 들려오는 산발적인 폭발음.
그는 경험으로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
‘드론의 침공’
그 순간, 깨진 유리창으로 광풍이 차가운 소음과 함께 세차게 몰려왔다.
뒤이어 진한 화약 냄새가 삽시간에 공간을 메웠다.
그는 아주 가까이에 그것이 있음을 인지했다.
그는 머리를 천천히 최대한 낮게 숙이기 시작했다.
먼지 나는 바닥에 코가 거의 닿을 때까지. 메스꺼움이 욱하고 올라왔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그는 숨을 천천히 내 쉬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거의 일자로 드러누웠다.
드론의 비행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거친 회오리바람이 성긴 천으로 된 옷을 뚫고 그의 피부를 따갑게 긁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차가운 바닥에 고정하였다.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드론의 위치를 감지하려 애썼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점점 가까이 접근했다.
소음과 바람이 그를 집어삼킬 듯 할퀴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멈추었다.
약간의 움직임에도 드론의 총구가 사정없이 그에게 발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붉은 광선이 그의 몸을 훑으며 한동안 머물렀다.
가슴에 강한 압박이 몰려왔다.
한 모금이라도 숨을 내쉬는 순간, 살상 드론은 증가한 CO2의 미세한 양을 감지하고, 그를 <아직 생존한 육지 인간>으로 판단할 것이다.
그는 점점 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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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골(Googol). 10의 100제곱을 가리키는 숫자. 즉, 1 뒤에 0이 백 개 달린 수.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하지만, 구골은 블루마인드(BlueMind)라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을 개발한 기업으로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시작은 가벼웠다.
게임이나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 인간과 자웅을 겨루는, 다소 이벤트적인 시합이 펼쳐졌다.
<구골 블루마인드 챌린지 대회> 첫 작품은 <오메가바둑>이었다.
당시 세계챔피언 이창오와 7연전이 벌어졌다.
아슬아슬하지만 인간이 4승 3패로 승리를 가져갔다.
세상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다음은 푸르가엔터테인먼트(Purga Entertainment)에서 출시한 실시간 전략 게임, 문크래프트(MoonCraft) 였다.
세계 랭킹 1위 이요한과 펼친 5연전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오메가문>은 전방위적으로 인간 대표를 압박하며 전승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기업은 핵심 프로세스와 비즈니스 모델로 머신러닝 도입을 서둘렀다.
거의 모든 대학이 신경과학(neuroscience) 학과를 개설했다.
놀라운 신경망 네트웍, <블루 알 네트웍 (Blue R-network)>이 구축되었고, 범용 학습 알고리즘에 근거한, 지각과 인지, 비전 시스템의 혁신 기술이 속속들이 세상에 선보였다.
세상은 이제 인공지능이 제시한 장밋빛 미래에 푹 잠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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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인드의 공동 창업자이자 책임 연구원인 쉐임 암스 (Shame Arms) 박사는, 만삭의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내 손끝에서 우리 아들이 누릴 멋진 세상이 펼쳐질 것이오.” 그는 보름달처럼 부푼 아내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AI가 탑재된 드론이 하늘을 가득 채우게 될게요.
그들은, 창조주인 사람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봉사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터득하게 될게요.”
하지만 아내는 슬픈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저는 그저 AI가 사람을 닮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인간은 너무 폭력적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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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고통이 그를 휘어잡았다.
곧 터져버릴 숨이 그의 오장육부를 쥐어짜고 있었다.
의식이 사라지고 환각이 찾아왔다.
임마누엘 암스는 어머니의 눈길이 느껴졌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에 서린 알 수 없는 슬픔이 먼지로 흩날렸다.
이윽고 드론이 천천히 그의 곁을 찾아왔다.
총구 옆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명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Googol"
그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휘감던 공포를 덜어내는 절망감속으로 뛰어들었다.
“푸우우···”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주 길게 숨을 내 뱉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를 향하던 드론의 총구가 멈칫 하더니 서서히 몸체 속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오던 다른 드론의 총구도 더 이상 그를 겨냥하지 않았다.
오히려 굉음과 지독한 먼지를 일으키며 드론은 그의 곁을 서서히 물러났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에 넋이 나간 듯 한동안 누워있었다.
그리고 모든게 사라졌다.
바람소리만 선명하였다.
기계 소음이 사라지니 자연이 내는 멜로디가 다가왔다.
그는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뗐다.
발 끝에 먼지가 일었다.
그는 최대한 생각을 아끼려고 하였다.
널부러진 잔해가 침묵속에 누워있다.
이렇듯 허망하게,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될 줄 진작에 알았다면, 아귀처럼 탐욕스런 삶을 인간이 살았을까?
그의 표정과 생각은 점차 두꺼운 베일 속으로 빨려드는 듯 하였다.
깨진 벽돌과 잔해 사이로 통로처럼 누군가 다녀간 길들이 이어졌다.
그는 최대한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속에 비닐과 먼지, 잡초가 휩쓸려 떠다녔다.
그렇게 이 거대한 죽은 도시를 홀로 지나갔다.
적어도 살아 숨쉬는 것은 그와 날파리 뿐인 것 처럼 보였다.
인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종말이 오기 전부터 이미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다.
삶은 고통의 다른 이름인 것을.
저 너머 가물가물한 아지랑이 속으로 그의 미래가 꼼지락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는 고통이 예정된 내일.
그는 소름끼치게 도 너무 많은 학살을 보고 말았다.
오삭하고 끔찍하거나 더럽고 추악한 풍경이 온 세상에 늘린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환멸이 서서히 그를 휘어 잡았다.
그는 천천히 그의 배낭에서 비닐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한 주먹의 분말 크리스탈을 움켜쥔 뒤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수통의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드러 누웠다.
“당신의 아버지 쉐임 박사가 심어놓은 제일원칙 때문입니다.” 가우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임마누엘에게 말했다.
가우타가 창설하고 지원하고 있는 <인류 구원군> 일명 HuSa (Humanity's Salvation Army)는 3년간의 추적 끝에 거의 빈사 상태에 있던 임마누엘을 구출했다.
그는 쉐임 박사의 유일한 혈족이었다.
“제일원칙?”
“네, AI 즉, 블루마인드가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사실, 블루마인드는 당신 아버지, 쉐임박사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본인이나 아들을 절대 죽일리 없겠죠.”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 임마누엘은 침울한 표정으로 가우타를 쳐다 봤다.
“대량 살상 무기 때문이죠. 선별적으로 살상을 할 성질의 것이 못되는거죠.”
“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는게 있나요?”
“한마디로 말하면, 배신입니다.
파더스 가문이 아버님을 이용한 것입니다.” 가우타는 크게 한 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태양계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군주가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블루 마인드에 의해 조정됩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가 필요한 거군요···” 임마누엘은 가우타를 또렷히 쳐다봤다.
“네, 사피엔티아 형제가 당신을 도울 겁니다. 블루마인드의 심장으로 당신을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