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태어나 기억하는 하늘은 회색이었다. 짙은 회색 혹은 옅은 회색. 그것뿐이었다. 파랑과 붉음. 혹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하늘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로 믿지 않았다. 심지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릴리안 나리>의 <호모 사피엔스 기록> <대멸종 편> 13장 66절)
낡은 도로
나는 회색 젤라바 차림으로 차에 올랐다. 그리고 낡은 마스크를 착용했다. 눈과 입만 도드라진 모습이 흐린 창에 어른거렸다. 익숙하지만 언제나 낯설었다. 진한 한숨을 가래와 함께 뱉었다. 먼지 냄새가 섞였다. 나는 시동을 걸고 페달을 밟았다.
육중한 차체가 부르르 떤다. 동시에 경유 탄 냄새가 퍼졌다. 나의 하관도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기계는 천천히 힘겹게 움직였다. 벗겨진 아스팔트 도로가 눈앞에 서서히 들어왔다. 휘어지고 갈라진, 황폐한 길이, 온통 찌그러진 세상 사이로 곤죽이 되어 널브러져 있다. 낡은 차는 발작적인 딸꾹질을 하듯 한 번씩 킁킁거렸다.
그와 십 년을 같이 했다. 케케묵은 창고에 벌겋게 녹이 슨 3.5t 트럭을 발견했을 때, 나는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한 달을 꼬박 매달려 결국 그 쇳덩이에 생명줄을 넣었다. 아울러 아내도 생명을 잉태했다.
아들은 드물게 성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기쁨이자 고통이었다. 삶의 목적이 하나로 고정되어 버렸다. 살아야 할 당위성이 생긴 것이다. 아들이 제대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아주 큰 욕망이 작은 욕구를 모두 삼켜버렸다.
라르렌 숲에서 날아온 듯한 참나무 잎이, 바짝 마른 채, 백미러에 걸려 바람에 건들거렸다. 숲이 사라진 이후, 한 세대가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대지는 뭉근한 불에 싸여있다. 태양은 가렸지만, 땅은 더 뜨거워졌다. 화염에 탄 재들이 사방으로 뭉쳐 다녔다.
불과 연기, 마른 먼지로 뒤덮인 공간은, 극소수의 살아남은 자에게는 저주였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온전하지 않았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이었다.
나는 가속 페달을 꾹 눌렀다. 차는 비포장이나 다름없는 거친 도로를 힘겹게 달리기 시작했다. 앉은자리는 지나치게 건들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심하게 흔들렸다. 회색 먼지. 검은 구름. 메마른 땅. 사방에 널브러진 잔해. 그리고 외로움이 포개어졌다.
아내를 일 년 가까이 보지 못했다. 언제나 그녀 생각뿐이었다. 내 인생의 바닥짐과 같은 존재. 구름이 낮은 어느 적막한 마을. 세상의 오염이 생명을 마구잡이로 앗아가던 시절. 나는 피폭으로 한쪽 눈을 잃은 채, 거친 광야를 헤매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인은 낯선 이에게 선뜻 생선 죽을 내놓았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낡아 빠진 배를 정성껏 수리하였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다. 나는 죽음의 바다에서 삶을 건졌다.
하지만 아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빠를 부르는 순간, 나는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길 때가 오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남은 청정구역. 젖과 꿀이 흐른다는 땅. 극소수의 선택된 자만이 산다는 곳.
노아의 둠으로 아들을 보내야만 했다. 카펜타닐이 필요했다.
돈은 그냥 종잇조각이었다. 보석도 그냥 돌덩이가 된 지 오래였다. 세상의 통화는 마약이 대신했다. 그중에 중국산 카펜타닐은 압도적으로 귀한 존재였다. 한순간이라도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
그것이 삶이 되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병이 들었다. 아이는 인두염을 달고 살았다. 그렁그렁, 가래가 가득한 목소리.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 충혈된 눈. 바이러스는 인간보다 훨씬 강했다. 황열이, 몇 안 되는 살아남은 어린 자식의 숨통을 끊기 시작했다.
아들은 용케 극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백신이 사라진 세상의 어린이는, 변종 바이러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바이러스성 뇌막염이 창궐하였다. 티푸스가 한 마을 주민을 몰살하기도 하였다.
가속이 붙을수록 차는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운전대를 꽉 잡은 채, 먼지로 뒤덮인 세상을 바라봤다. 앞으로 1,200km. 도로를 식별할 수 있는 한, 쉴 새 없이 달려야 한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곳은 그야말로 무법지대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외로움이 앞선다. 차라리 딴죽을 걸거나, 엄포를 놓던 동료라도 이 순간은 그립다. 전쟁이 남긴 것은 긴 침묵이었다. 어디를 가나 버려진 것뿐이었다. 짐칸에는 잡동사니가 들어있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무척 귀한 물건이 담겨있다.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설령 내가 납치되어 고문받고 죽더라도, 물건은 되찾을 수 있기 위한 카르텔의 조치다.
드론
한참을 달렸다. 그동안 바람 소리와 낡은 타이어가 내는 신음만 들려왔다. 나는 내 머리에 남은 낡은 추억들을 들추려고 애를 썼다. 기억은 사람들이 고독이라고 말하는 고통을 이겨내는 야릇한 피난처와 같았다. 나의 행복은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어느 날 밤까지만 이어진다.
그날 밤, 아버지는 모든 문을 잠그고, 창문을 두꺼운 판자로 가렸다. 그로부터 세상이 회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렸고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나는 심한 탈수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그저 누워만 있었다.
지독한 졸음이 몰려왔다. 거의 비몽사몽 간을 헤매며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길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6시간을 달렸지만, 아직 차 한 대 보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주위에 무엇인가 움직인다는 것은 곧 긴장을 나타냈다.
마침내 도시로 접어들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여전히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높은 빌딩들이 옆을 스친다. 한때 세상의 중심이었던 곳. 기고만장한 인간들의 요란한 놀이터. 하지만 이제 지푸라기보다 약한 존재가 되었다.
낡고 앙상한 빌딩 사이로 붉은 회색빛이 암울한 도시를 덮기 시작했다.
나는 속도를 늦추고 차를 외진 곳에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칙칙하고 어두운 곳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시야를 확보하고 나를 숨길 수 있는 곳.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사이를 비집고 솟은 녹색 생명을 생뚱스럽게 쳐다봤다.
인간이 만든 재앙을 극복하는 그들을.
곧 어둠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밝아 올 때 나는 서둘러 출발했다. 짙은 구름은 여전하고 바람도 거세었다. 나는 최대한 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먹다 남은 부스러기 하나까지 모두 땅에 묻었다. 그리고 돌과 건초를 주워다 주위에 듬성듬성 뿌렸다. 모든 게 자연스러워야 했다. 인위적인 흔적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나를 지워야 내가 산다.
침울하게 뻗은 도로. 먼지가 더디게 몰려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뼈다귀만 남은 건물 사이로 지평선을 바라봤다. 벙커 같은 언덕은 회색빛 햇살로 덮였다.
모든 것이 정지된 낡은 그림 같았다.
어느 정도 갔을까? 갑자기 기계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지만 꿈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두 번 더 엔진 소리 같은 게 울렸다.
날은 밝았다.
후방 모니터를 주시했다. 몇 대의 드론이 보였다.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졌다. 긴장이 가슴을 옥죄기 시작하였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있는 힘껏 꾹 밟았다. 거친 도로를 쿵쾅거리며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기계는 어느새 낡은 트럭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내려앉으며 트럭 구석구석에 달라붙었다.
나는 핸들을 심하게 몇 번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몇몇 드론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대부분은 찰싹 달라붙은 채, 차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구멍이 군데군데 생겼다. 곧이어 센서가 달린 촉수를, 꿈틀거리며 그 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짐칸에서 심한 소리가 들렸다. 드론이 거칠게 잡동사니를 뒤적거리는 듯 보였다. 이윽고 검은 드론이 차창밖에 바싹 달라붙었다. 뭔가 냄새를 맡은 것처럼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른 드론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있었다.
등 뒤에서 불현듯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용접기에서 나는 불꽃을 튀기며 뒷면에 큰 구멍을 내고 있었다. 일부 드론은 윈치를 이용하여 두터운 문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트럭을 산산조각 낼 참이었다.
그사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의 속도를 올리며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것뿐이었다. 절망과 좌절, 공포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천장에 쐐기처럼 박혀있던 나사들이 후두두 떨어져 나갔다. 탁한 바람이 거칠게 몰려들었다. 폴리프로필렌을 녹여서 만든 저장 용기가 삐죽이 삐져나온 게 보였다.
그러더니 카펜타닐이 눈보라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배낭을 뒤져 방독면을 착용했다. 그리고 노출된 모든 피부를 닥치는 대로 감싸기 시작했다.
“젠장 천장에다가 숨겼구먼….”
4세대 카펜타닐의 독성은 그야말로 지독하다. 모든 유기물을 태워버린다. 드론이 삽시간에 천장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밋밋한 차 지붕을 다 뜯어내고는 마약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서랍에서 총을 꺼내었다.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한이 들더니 이내 고통이 사라졌다.
환희와 행복감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들이 보였다. 푸른 초원과 눈부신 하늘. 파도 소리 요란한 바다. 아들이 결코 보지 못한 투명한 푸르름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나는 먼지처럼 가벼워졌다. 페가수스처럼 풀풀 날기 시작했다.
내 앞에 고추를 넣은 파파야 샐러드와 파넹 소스를 얹은 쇠고기 요리가 갑자기 펼쳐졌다. 책에서만 보았던 그 맛난 음식들…. 나는 연미복을 입고, 붉은 드레스의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정갈하고 환한 천국이었다.
언제나 해맑은 당신의 미소에 키스했다. 모든 것은 정오의 햇살처럼 밝고 반듯했다. 싱그러움이 여름의 정원을 덮었고, 의기충천한 산들바람이 살아 있음을 축복해 주었다.
내가 보내는, 당신을 향한 사랑의 메아리가 언젠가는 행복으로 돌아오리라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