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상념
그녀가 꽂아준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음악들은 대체로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재즈풍의 여성 솔로 곡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팝이나 가요들도 있었고, 실험적인 인디 음악이나 심지어 사이키델릭 풍의 연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다양했다. 그녀는 곡이 바뀔 때마다, 자신이 채집한 노래의 정보를 들려줬다.
"<Sinead O'Connor>의 <Nothing Compares 2U>라는 곡이죠." 그리고 그녀의 느낌을 말해주었다.
"막연한 열망이나 슬픔 같은 게 느껴져요……. 음……. 뭐랄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안타까움이라고 해야겠네요." 그리고 그녀는 노래 가사를 방심한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눈을 감은 채. 투명한 봄볕에 반짝거리는 그녀의 조그맣고 빨간 입술이 오물오물하는 모습을, 나는 따스하게 지켜보았다. 그해 봄은 특이하게, 더울 만큼 맑은 하늘이 많았다. 누군가는, 지난겨울의 지독한 눈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우리는 그 많아진 날들만큼 자주 음악 산책을 즐겼다.
그녀는 재즈 싱어인 <Diana Krall>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가수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는데, 재즈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로서는, 처음 얼마 동안은 그저 심드렁하게 듣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기억나는 거라고는, 그 가수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뿐이었다. 또 한 가지를 들자면, 이건 순전히 나의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데, 나는 그 여성 재즈 가수가 흑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안나가 이메일로 보내준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는 그녀가 금발의 백인이라는 사실에 적이 놀라고 말았다.
'<Diana Krall>의 <The Look of Love>라는 곡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죠. 당연히. 하지만 음악에만 빠지세요……. 그녀의 미모에는 절대로 빠지지 마시고요……. 크크크 송안나 드림'
나는 언젠가 그녀에게 왜 이 가수를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입술을 뾰족하게 하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즉답을 피하고는, 내게 반농담식으로 숙제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다음날 내게 USB를 하나 주었다. 그녀와 예전에 같이 들었던 노래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이젠 귀에 익숙하게 된 음악들이었다. 나는 내 노트북에 <안나의 음악>이라는 폴더를 만들어 그곳에 음악 파일들을 저장하고 휴대폰에도 복사를 해 두었다.
그리고 이제 십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떠났지만, 그 폴더는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신기하게도 폴더가 살아남았다.
나는 늙어 가는 만큼의 강도로 점점 더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혼자 사는 10평 크기의 원룸에는 단 하나의 가구, 옷장만 있다. 그리고 각각 한 개씩의 냉장고, TV, 세탁기, 매트리스, 이불, 베게, 밥상 겸 책상, 노트북, 다리미가 있다. 하얀 모든 벽면에는 액자 하나 없이 깨끗하다. 냉장고 문에 가족사진 한 장만 붙어 있다. 대부분 소모품이나 생활용품들도 한 개씩만 가지고 있다. 치약, 칫솔, 샴푸, 수저, 밥공기, 국그릇, 냄비, 프라이팬, 걸레, 휴지, 보온병, 커피잔, 운동화, 구두 등등. 그나마 중복으로 가진 것은 속옷과 양말뿐이다. 매일 하루에 한 개씩 일주일 치 해서 각각 7개가 있다. 이를테면 일요일 오전에, 세탁기에 매일 한 개씩 벗어둔 속옷과 양말들을 한꺼번에 세탁하고, 월요일부터 다시 한 장씩 소모하는 것이다. 잠바, 양복, 셔츠, 넥타이, 티셔츠, 잠옷 모두 한 개씩만 두었다. 잠바는 6개월에 한 번씩 바꾸었다. 즉, 가을이 되면 가장 저렴하고 두툼한 잠바를 산 뒤, 겨우내 입고 버린 뒤, 봄이 되면 가장 싸면서 얇은 잠바를 사서 가을까지 입고 버렸다. 냉장고도 텅 비었다. 기껏해야 이틀 치 정도의 양식거리만 딱 들어있다. 반찬도 없다. 내가 집에서 해 먹는 메뉴는 단 하나, 비빔밥뿐이다. 모든 재료를 섞어서 물과 함께 먹었다.
나의 스마트 폰에는 기본 앱 외에 단 3개의 앱만 추가되어 있다. 메신저와 음악 그리고 도서. 나의 노트북 바탕화면에는 남태평양의 어느 아름다운 섬 사진과 아래쪽 작업표시줄에 있는 4개의 빠른 실행 버튼만 있다. 탐색기, 브라우저, 도서 그리고 워드. 그리고 나의 윈도 탐색기 디렉터리는 아주 단순하다. 기본적으로 생성된 중요 폴더들은 모두 숨김으로써 감추어 버렸고, 단 2개의 폴더만 추가하였다. <도서>와 <음악>. 그리고 그 음악 폴더에는 <안나의 음악> 단 하나의 폴더만 존재한다. 예전에는 몇 개의 음악 폴더가 존재했었다. 예를 들면, <포스트 록 모음>, <프로그레시브 록 모음>, <인디 베스트 모음> 등등. 하지만 다 지웠다. 요즈음에는 음악을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주로 듣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최 뭘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더 큰 작용을 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나는 자의든 타의든 버리거나 떠나 보내게 됨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타고난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안나의 음악>은 몇 번의 망설인 끝에 그냥 남겨뒀다.
그리고 그녀가 뉴욕으로 돌아간 그 날 이후, 오랫동안 나는 그녀를 애써 잊고 살았다. 적어도, 지난봄,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자그마한 재즈바를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