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에든버러 공항은 아담하였다. 비행기 트랙에서 내리는 순간 훅하고 8월의 더운 바람이 세차게 몰려왔다. 하늘은 대체로 맑았다. 다양한 구름이 가까이에서 느껴진다. 아내는 가방에서 창이 넓은 검은색 플로피햇 모자를 꺼내어 썼다. 이탈리안 웨스턴 무비인 <황야의 무법자>에 등장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보였다. 입국 심사원에게, 프린지 페스티벌을 관람하러 왔고, 이틀 뒤 기차로 런던으로 갈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심사원은 스코틀랜드는 처음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동시에 “네”라고 답하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아내는 스코틀랜드 여행을 무척 기대하는 눈치였다. 떠나기 몇 주 전부터 입고 갈 옷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작 산 것은 크고 검은 선글라스였다. 아내는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썼던 것과 같은 모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깜찍한 단발머리 소녀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글라스를 끼고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를 보며, 도저히 이미지 매칭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매트릭스>의 여주인공 <캐리앤 모스>가 연상되었다.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우리는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시내가 있었다. “잘난 딸 덕분에 스코틀랜드도 구경해보네.” 아내가 버스 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도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안나는 한 달째 남자 친구와 영국을 돌아다니고 있다. 남자 친구는 안나와 같은 대학에서 실용음악학과를 다니는 헝가리계 독일인이다. 그의 이름은 마누엘이다.
안나는 부전공으로 재즈 피아노를 선택하였고, 그와 몇 번 합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는 7살 때부터 기타를 쳤다. 대학에서는 작곡을 전공하고 있다. 올해 초 그들은 밴드를 결성하고 몇 개의 데모 음원도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 달 전 그들은 영국의 도시들을 돌며 길거리 연주를 한다며 떠났다. 최종 목적지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였다.
45.
우리는 버스 승객들이 대부분 하차하는 곳에 따라 내렸다. <하이 스트리트>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북적거리는 관람객들 사이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상모돌리기를 하며 꽹과리를 치는 한국 청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열심히 영상을 담았다. 아내는 흥에 겨운 듯 연신 어깨를 들썩거리며 같이 춤을 췄다. 뒤이어 이번에는 젊은이 여럿이 소고를 들고 장단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추었다. 아내는 예외 없이 이번에도 그들 주변을 돌며 흉내를 냈다. 저 주체할 수 없는 끼를 지금까지 용케 참고 산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얼마 전 아내는 부부나 연인이 함께하는 라틴 댄스를 무척 배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작은 키와 어떤 동작을 해도 어울리지 않는 밋밋한 체형을 내세워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가 멋진 탱고를 추는 장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알파치노가 당신보다 무려 1cm나 작다니까. 글쎄.”
“하지만…”
“하지만 뭐?”
“하지만 얼굴이 많이 딸리잖아.” 나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에 아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남의 눈에 비칠 나의 초라한 모습에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특히 아내보다. 나는 아내와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풍겨오는 묘한 빈정거림 들 - 여자가 무척 아까운데 혹은 와이프는 아닌 것 같은데 –에 괜히 주눅이 들고는 하였다.
<팔리아멘트 스퀘어>에 이르니 중국 기예단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웃통을 벗고 서커스 묘기를 하고 있었다. 조각 같은 근육질 몸매에 아내의 탄성이 절로 터졌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우리는 이제 <헌터 스퀘어>로 접어들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흑인 청년이 농구공 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경쾌한 재즈 음악에 맞추어 쉴 새 없이 떠들면서, 농구공 3개를 다양한 모양으로 저글링 하였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꼬마들이 깡충깡충 뛰면서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나는 귀여운 꼬마들을 휴대폰에 담기 시작했다.
46.
“여보! 저기, 봐봐.” 갑자기 아내가 나의 손을 급히 잡아끌었다. 우리의 시선이 향한 곳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는 안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나와 마누엘 주변으로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녀는 찢어진 청바지와 하늘하늘해 보이는 체크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자그마한 전자 오르간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옆에 서서 전자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맑은 전자음과 기타의 노이즈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몽환적이고 부유하는 듯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안나의 노랫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하였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아내와 나는 인파 속을 살짝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연주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줄곧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슈게이징 밴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나왔고 그제야 꿈에서 깬 듯 그들은 관객들을 마주 보았다.
안나가 우리를 보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누엘도 우리를 알아채고 손을 살짝 흔들었다. 지난번 보았던, 말쑥한 정장 차림의 백인 청년이, 한 달간의 무전여행 탓으로, 덥수룩한 수염에 초췌한 모습의 히피족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크고 깊은 눈매는 여전하였다. 안나가 마이크를 잡더니 관객들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갑자기 우리를 소개하였다. 그러자 박수가 터져 나오고 우리는 얼떨결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나서 안나는 나에게 손짓을 하며 마이크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내가 주춤거리자 다시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안나 옆에 서게 되었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몰렸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안나는 가방에서 CD 한 장을 꺼내더니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마이크에 바짝 입을 대고 조용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이 CD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입니다. 캐나다의 서정 시인이자 뮤지션인 분이죠. 아마 너무도 유명하여 여러분들도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레너드 코헨입니다. 앨범 명은 <Various Positions>이고요. 어느 날 아버지가 선물로 제 방에 두고 가셨습니다. 저는 그날 밤 이 앨범을 무척 많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아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저는 내 의지로, 나 스스로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특히, 이 앨범의 마지막 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버지도 저만큼 젊었을 때 물론 가장 좋아하였던 곡이기도 하고요. <If it be Your will> 아버지와 함께 불러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간간이 박수가 나왔다. 기타리스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딸이 팔짱을 꼈다. 익숙한 음이 들려왔다. 맑은 기타 소리. 수백 번도 더 불러 본 너무도 익숙한 음이 들려왔다. 나는 떨리는 입을 마이크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아내를 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곱게 모아 하트를 표시했다. 나는 그 순간 아내의 댄스 파트너가 될 운명을 직감했다. 그리고 안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If it be your will
That I speak no more
And my voice be still
As it was before
I will speak no more
I shall abide until
I am spoken for
If it be your will
If it be your will
That a voice be true
From this broken hill
I will sing to you
From this broken hill
All your praises they shall ring
If it be your will
To let me sing
From this broken hill
All your praises they shall ring
If it be your will
To let me sing
If it be your will
If there is a choice
Let the rivers fill
Let the hills rejoice
Let your mercy spill
On all these burning hearts in hell
If it be your will
To make us well
And draw us near
And bind us tight
All your children here
In their rags of light
In our rags of light
All dressed to kill
And end this night
If it be your will
If it be your will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