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cm 안에는 약 1억 개의 수소 원자를 일렬로 쭉 늘어놓을 수 있다. 수소 원자의 중앙에는 원자 크기의 1만분의 1에 불과한 핵이 있다. 그리고 이 핵보다 10억분의 1이나 작은 어떤 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7억 년 전 갓 태어난 우주의 크기였다. 여기에서 수천억 개의 은하가 탄생했다. 그 은하 중 하나의 변방에 태양계가 있다. 그 태양을 도는 작고 푸른 행성이 지구다. 우리는 대부분 지구에 살고 있다. 아마겟돈 이전이든 이후든….
아니룻이 매번 화성의 유인기지, 라스둠 시티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무척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미로처럼 뻗어나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도로와 마주치곤 하는데, 그 끝에는 대부분 기계 로봇인 하드롯의 건설 현장이 펼쳐져 있다. 아니룻은 무척 많은 시간을 기웃거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녀는 3D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도 거의 모든 도로와 건물, 인공호수와 공원들을 외우고 다녔다. 이러한 특성은 태생적 환경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녀는 생후 6개월부터 고아로 자랐으며 여러 군데의 탁아소, 위탁 가정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그녀는 아무리 울어도 누군가가 그녀의 입에 젖병을 물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달았으며, 나 스스로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현실도 무척 어린 나이에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그녀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에 익숙했고 집착에 가까운 인내심을 키웠으며 위험한 것에 대한 내구성을 축적했다.
그녀의 첫 직장은 중소 도시의 중견 신문사였다. 그 신문은 주로 시사와 경제, 사회에 관한 기사를 다루었는데, 그녀는 입사한 지 육 개월도 지나지 않아 종군기자를 자처했다. 아마겟돈이 있기 20년 전, 2046년 봄이었다. 대규모 전쟁의 암울한 기운이 전 유럽과 아시아, 북미 대륙을 집어삼키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작은 2020년대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된 중국과 미국의 패권 싸움이었다. 서로 간의 무역전쟁, 보복 관세 등이 이어지고, 국지적인 다툼이 세계 곳곳에 걸쳐서 일어났다. 주로 힘없고 가난한 동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 지역이었다. 대리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2030년대부터는 EU와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수위와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제삼 세계는 이제 어느 편에 서든지 크고 작은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2040년이 되자 세계는 이제 2개의 큰 세력으로 편 갈이가 되었다. 중국, 러시아, 인도가 손을 잡은 아러 연합(AR Union)과 유럽, 아메리카 대륙이 연합한 유아 연합(EA Union)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만 하였다. 2050년이 되자 200억이 되었다. 더불어 자원 고갈은 절정에 달했다.
지구는 45억 년 동안 숱한 변화를 겪었다. 기후 변화, 지각 활동, 운석 충돌 등 다양한 원인이 지구를 얼음별 혹은 우림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환경이 바뀔 때마다 지구를 지배하는 생물도 바뀌었다. 2051년 10월 인간은 현 지질시대를, 30년 전에 국제지질학 연합이 주장한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의 변화가 1만 2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직후의 변화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홀로세(Holocene)가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다.
이러한 선언의 이면에는 핵이 있었다. 비극의 실마리는 핵폭탄 개발이었다. 인간 자신을 스스로 파멸로 인도할 이 무기는 이후 모든 나라가 탐하는 최고 가치의 물건이 되었다. 인간이 땅끝까지 지배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야생이었다.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 무한한 지배욕을 성취하기 위한 대량 파괴 무기는 이제 지구를 수십 번 산산조각 내고도 남을 정도로 커졌다.
아니룻은 동유럽과 중국, 멕시코와 미국, 중동과 인도를 누비고 다녔다.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전쟁이 발생한 지역이면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인간 내비게이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놀라운 지리에 대한 암기력이었다.
그녀는 한번 찾아간 지역은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종군기자로서 맹활약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었다.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곧 살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높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병적인 수준의 집착력을 보였다. 그녀는 왜 인간이 폭력적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온통 휩싸인 채, 총알이 하늘을 뒤덮은 대지를 종일 뛰어다녔다.
곧 그녀의 이름은 유명세를 치렀다. 그녀는 미국 최대 유튜브 방송국 기자가 되었고 세상의 모든 전쟁을 배경으로,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을 두꺼운 방탄모에 숨긴 채 숨 막히는 톤으로, 인간의 비극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2065년 그녀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동영상은 30억 뷰에 육박했다. 그리고 그때쯤, 그녀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그녀는 사리엔의 전쟁 지역을 이동하던 중, 대인지뢰를 밟고 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