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과 사람과 샛별과 가로수 불빛을 다정하게 쳐다본다. 시간은 지나치게 상대적이다. 기다림은, 시간을 아주 가늘고 진득한 고무줄처럼 길게 길게 잡아 늘이고 있다.
그 전에 나는, 내 여인의 도시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훑어볼 생각이다.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상상하고, 그녀가 걸터앉은 카페 의자를 추리하고, 그녀가 피우다 흘린 담뱃재를 품은 바람을 맞을 생각이다. 나의 눈과 코와 귀, 피부는 일련의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으로 예민해진다.
날래고 눈치 빠르고 꾀바른 새들이 무리를 지어 가로수와 가로수를 이어간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인조 그대로의 냄새가 느린 발자국 사이에 어우러진다. 그리움이 나의 걸음을 규정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쉽게도 내가 들여다본 시간은 거의 정지한 듯하다. 하지만 어둑어둑해진 도시는 이미 내 곁에서 온기를 가져간다.
우리는 가끔 서로의 사진을 교환하기도 했다. 나는 그중에 가장 멋진 그녀의 사진을 인화하여 스와로브스키 둥근 액자에 담아 두었다.
제냐는 야외 카페에 앉아있다. 갈색의 둥근 테이블. 투명한 하늘. 박하 잎 아이스 복숭아 벨리니 칵테일이 담긴 유리컵, 포크와 나이프. 그것을 감싼 쥐색 종이 냅킨. 두툼한 녹색 잎과 붉은 꽃을 단 투박한 선인장 화분. 여자는 배에 두 손을 모은 채 은은한 미소를 보낸다. 미소진 볼에 주름이 보인다.
당신의 예전 사랑은 어땠나요?
비참했죠. 경박한 바람둥이를 만났거든요. 여자와 하는 이상한 줄다리기에 빠진 인간이었어요. 아마도 여자가 그에게 넘어오는 순간, 그는 자기 삶에 대한 당위성을 얻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절교를 한 건가요?
사실 절교도 필요치 않았어요. 그냥 눈에 띄지 않으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꽤 많은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도 느끼겠죠. 우리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구나 하고. 아무튼 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느낄 때쯤 해서 저는 무척 바쁜 일들을 심하게 처리하면서 다녔어요.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결국 헤어졌군요?
모르겠어요. 오래전 일이라…. 그렇게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런데, 갈등이 사라지니 그것마저 그리워지더군요. 물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바람이 곁을 지킨다. 속삭이듯 연하고, 수줍은 듯 주춤거리며 다가오다 문득,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멀어진 듯하더니 다시 돌아온다.
강을 품은 바람 냄새가 나곤 해요. 인적이 드문 골목에 서면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좋은 냄새 말이에요. 당신에게 주고픈 향기 말이에요.
너무 차갑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늘 당신은 그게 걱정이죠. 알아요. 선한 마음은 그냥 아무 말 없음에도 묻어나곤 하죠. 하물며 우리가 본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이렇게 따스함을 느끼잖아요.
분홍빛, 노랑, 하얀색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이 휘다 반듯하고, 좁았다 넓어지기도 한다.
그냥 골목골목을 휘젓고 다니죠. 익숙한 곳이지만 늘 새롭게 나타나죠. 미처 보지 못한 것일 수도 혹은 그냥 내 기억에 사라진 것들도 있겠죠. 어쩌면 조물주가 장난삼아 하나 정도는 살짝 순식간에 집어넣은 것일 수도 있고요.
신의 존재를 믿는가요?
아뇨, 믿지 않아요. 그냥 우연히 태어났고 그렇게 사라질 거로 생각해요. 사실 제가 생각하는 이것도 머릿속 어딘가의 화학작용에 기인한 결과일 뿐이죠.
그거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닌가요?
아뇨, 오히려 반대로 편안해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가장 거추장스러웠던 남들의 시선도 이젠 다정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규칙, 규정, 관습, 걱정, 불안, 미련 같은 용어들이 제게 남지 않아요. 그 대신 늘 사랑을 꿈꾸죠.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고요.
그리움이 가슴을 옥죈다. 걸음 마다에 갈증이 붙어있다. 한패의 남녀가 쾌활한 웃음을 흘린다. 정감을 담은 눈길이 마주치고 미소가 뒤를 따른다. 행복을 품은 인사가 다가온다.
할로. 할로. 할로.
좁은 골목이 끝나고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물소리가 들리고 다양한 소음이 퍼진다. 요란한 분수대가 나타났다. 제냐의 모습이 영상 속에 펼쳐진다.
햇빛과 반사되는 물안개 속에 그녀는 환한 미소로 삶을 즐긴다. 따사로운 여름 햇살. 그녀는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속에서 짓궂은 표정으로,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쾌활하다.
도시에 오면 꼭 이 분수에 들러 주세요.
꽤 독특하군요.
재밌고 신나요. 혼란스럽고 산만하잖아요. 어릴 적 제 방처럼요. 어쩌면 질서정연함은 우주의 근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것은 대혼란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물론 제 머릿속은 아직도 혼돈으로 가득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요. 제가 이렇게 되리라곤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요?
그녀는 가슴을 출렁거리며 한껏 요염한 뒤태를 보인다.
이 영상 저를 위해 찍은 거는 아니겠죠?
하하하. 물론 아니에요. 당신을 알기 꽤 오래전에 촬영했거든요. 제 동생의 손과 풋풋한 미소를 보세요? 지금은 아주 징그럽게 커졌어요. 냄새도 나고요. 하하하. 정말이지 징글징글하게 말도 안 듣고요.
화려하고 복잡한 로코코 양식 위에 걸터앉아 무진장하게 넓고 잘 정돈된 정원을 배경으로 소녀는 무척 밝게 웃고 있다. 그러다 어느새 시장 짚단 속에, 푸석한 먼지에 파묻혀, 낡고 오래된 것들에 둘러싸여, 흐린 미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동안 당신은 몇 번이나 사랑에 빠졌나요?
솔직한 대답을 원하나요?
네. 어차피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비난하거나 욕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런 사이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문제죠. 미래 어느 시점에 말입니다. 운명처럼.
하하하. 뭐 그렇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도 사랑에 관하여, 세상의 하찮기 짝이 없는 도덕과 관습, 규율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많아요. 무척 많아요. 셀 수도 없이 많아요.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 지나치는 여인에게 홀딱 빠질 때도 있어요. 물론 찰나와 다름없지만.
음…. 제가 질문을 잘못 드린 것 같군요.
아뇨, 제가 죄송합니다. 현문우답. 헤헤헤.
그럼, 첫사랑은 언제였나요?
사실, 첫사랑이 명백하지 않습니다. 남녀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몇몇 여인들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첫 경험은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건 잊을 수가 없죠.
좋았나요?
그저 총각 딱지를 떼게 한 바람 같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페가수스를 탄 듯 황홀했죠. 틀림없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니까. 정갈하고 환한 천국이라 생각했어요. 다만 칙칙하고 어두운 골방 같은 창고여서 좀 그다지 낭만답지는 않았어요.
여러 번 한 거예요?
처음이니까. 당연하게도. 모두 다 그래요.
첫날은 원래 많이 하는 건가요?
시작은 원래 그래요. 새로움은 신비롭고….
그래서?
음…. 의기충천하게 되지요. 재치도 번득이고.
재치?
응. 어릴 때 무척 낮은 존재감으로 살았거든요. 세상의 모든 연인을 시기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재치와 무슨 상관이에요? 정말 두서없이 말을 하는 것 같군요. 크크크.
음…. 맞아요. 딱히 재치가 적합한 단어는 아닌 것 같군요. 뭐랄까??? 뭔가 적합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러고는 또 뭐가 생각나세요?
아팠어요.
몸이? 마음이?
둘 다요. 여자가 힘들고 지치고 아픈 듯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봤어요. 경박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누워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뭐 나도 많이 지쳤으니까. 모든 황홀함 뒤에는 쓸쓸함이 느껴지고는 하잖아요. 동시에 삶의 척박함을 그 기준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오한이 들기 시작했고요. 사흘을 꼼짝없이 누워 있었어요.
또 기억나는 거는요?
또 다른 관계를 이루기 위한 숱한 시간 낭비가 있었죠. 하지만 기억은 중독으로 이어지죠. 오로지 향기와 피부의 마찰을 통해서만 영감을 받았거든요. 내 삶 대부분의 불행은 권태로움에서 비롯되었어요. 그래서 여자를 심하게 쫓아다녔어요. 만남이 아찔한 경이가 되던 시절이었죠.
전, 그런 관계에 관해 무지막지하게 많은 것들이 알려졌으므로 인해 좀 시큰둥한 편이에요.
사랑이란,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었던 것, 하면 안 되는 것까지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 들어 본 적 있어요?
하하하. 혹시 주위에서 당신을 속물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만약 제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그대로 글로 나타내는 기계가 있다면 전 틀림없이 파렴치한 성애 주의자로 낙인이 찍혔을 겁니다. 아마.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인간은 다 저와 같을 거라고. 단지 얼마나 잘 숨기고 아닌척하느냐 하는 차이뿐이죠.
와, 당신의 솔직함에 경의를.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음…. 모든 사랑의 순간은 단 한 번뿐이라는 거죠. 다시 돌아오지 않죠. 그러한 사실을 완전히 깨우쳐야만 진정한 사랑이 성립된다고 봅니다. 괜히 좋아하는 척, 황홀한 척할 필욘 없죠. 그건 그냥 교묘히 피해 가려는 수작일 뿐이잖아요. 진지하게 그냥 맞닥뜨려야 해요. 두려워할 게 전혀 없죠. 어차피 우린 지푸라기처럼 약한 존재니까. 세상의 이목? 아무것도 지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봐요. 그냥 저지르고 보는 거죠. 그러면 된다고 봅니다. 그것뿐입니다.
음…. 본능적으로는 당신의 제법 공격적인 생각에 반기를 들고 싶은데….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용기에는 손뼉을 쳐주고 싶네요. 아무튼, 첫 만남부터 우린 아주 오랜 연인처럼 속마음을 속삭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