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호 카드키를 받았다. 홀은 대리석으로 매끈하고 음악은 <프랑수아즈 아르디>로 상큼하다. 장식이 지나치게 큰 창에 무겁게 담겨있다. 시스티나 천장화 사진들이 손바닥 크기로 옆 벽면을 나란히 채우고 있다. 안팎 두 겹으로 매달려 올라간 비단 커튼이 가볍게 살랑거린다.
계단을 이용해 3층 복도로 올라갔다. 큰 걸개 사진이 눈에 띈다. 오래된 중세 수도원과 검은 땅에 자란 풍족한 포도밭이 언덕 전체를 끝도 없이 덮고 있다. 흥분 속에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두려움과 설렘이 시시각각으로 교차한다. 왼편 309호에서 맞은편 310호, 다시 맞은편 311호.
우리의 방으로 향하는, 발끝이 내딛는 곳마다 공간이 살짝살짝 흔들린다. 자신이 예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내밀한 세계에 푹 빠진 느낌이다.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의 방이었다. 침대 바로 위에는 <앙투안 바토>의 작품이 걸려있다.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Blauer Fluss Hotel Room 313
당신이 말한 호텔에 방을 잡았습니다. 와인도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올 때까지 영원히 기다릴 겁니다.’
답장은 곧 왔다.
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당신이 궁금해서라도 서둘러 가야겠네요. 고마워요.
샤워를 마친 나는, 화장실 옆 작은 창에 의자를 가져와 걸터앉아 검은 도시를 바라봤다. 적막과 한적함으로 둘러친 커튼이 바람을 안고 속삭인다. 옅은 어둠 사이로 가로등이 박혀 있다. 그리고 창을 반쯤 열었다. 어둑한 침실 끝에 반사된 거울 빛이 들어왔다. 밝지도 눈부시지도 않은 내 속에 그녀가 꿈틀댄다. 그냥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죽을 거. 그냥 성욕에 몸서리치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노란 전조등과 속도가 만든 도로의 선들이 수백 가지의 흐린 소음과 얽힌다. 차들은 뒤엉키고, 잠시 멈칫거리더니, 이내 빠르게 흐르다가, 다시 평온한 흐름으로 바뀌었다. 도시의 친근함에 빠져든다. 하지만 여전히 시간은 지독하리만큼 느리게 흐른다. 아직 4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애간장을 끓게 만드는 첫 만남의 신비. 나는 유튜브에서 <Archive>의 노래 <Again> Long version을 튼다. 그리고 새틴 웨딩드레스에 휘감긴 그녀를 상상한다.
이윽고 휴대전화 액정이 밝아진다. 그리고 익숙한 알림 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친구, 제냐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화면에 그려진 지도 속에 반짝이는 하트 이모티콘. 800m도 채 되지 않는 곳에 내 여자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나타난 그녀가 반갑기 그지없다. 나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옷을 다시 입는다.
나는 두 귀 있는 데까지 모자를 곽 눌러 고쳐 쓰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무심한 고즈넉함이 공간을 메웠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보름달은 벌써 흐릿한 구름 뒤로 사라졌다.
밤이 유리창을 모두 덮었다. 그렇게 누렇고 뿌연 도시가 자신을 감췄다. 바람은 한기를 머금었다. 걸을 때마다 바지가 사각거렸다.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거리의 소음이 커졌다. 해묵은 이미지가 보이는 구석구석을 채웠다. 그리고 제법 가까운 거리에 횃불이 하나둘씩 보였다. 그리고 하늘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지는 회색 연기가 무거운 춤을 췄다.
그런 날이 있었던 거야. 우리가 모두 그런 것처럼, 사랑이 새겨진 유전자가 어딘가에 박혀 있잖아. 지독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행위 말이야.
구불거리는 거리를 다시 지나친다. 점점 그녀와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화려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매혹적인 건물 앞에 다가선다. 마치 로만 바스(Roman Bath)를 연상케 한다. 커다란 아치 지붕과 테라스가 보인다. 외벽을 장식한 아름다운 대칭과 정교한 조각. 입구에는 로마 황제와 총독으로 보이는 하얀 동상이 서 있다. 만남 앱이 표시한 그녀와의 거리는 불과 20m.
그녀는 여기에 있는 게 틀림없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떤가요?
저의 어린 시절?
사람들의 굄을 늘 받기를 원했죠. 하지만 아시겠죠? 그렇지 않았기에 그러함에 갈증을 느끼는 상황을…그래서 그런지...어릴적부터 그다지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있어요. 목표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요. 그저 항상성을 유지하고 평형을 조절하는 거죠. 붓다가 그랬다고 그러더군요.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깨달음은 혼자 스스로 하는 거라고.
깨달음을 갈구하는군요?
아뇨. 정반대죠. 행복을 원합니다. 아주 행복하거나 황홀한 순간을 추구합니다. 사실 그 상태에서는 깨달음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어쩌면 깨달음은 끝없는 절망의 심연에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뭔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꿈, 미래 어느 것 하나 그다지 소원하지 않아요. 그냥 내 몸이 가는 데만 향할 생각이에요. 어쩌면 심하게 자유를 갈구한다고 봐야겠죠.
나는 건물 입구에 적힌 안내문을 바라봤다.
입장료 : 4시 이전에는 50유로, 이후에는 70유로
영업시간 : 일요일~화요일은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수요일부터 토요일은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나는 계산대에 가서 돈을 냈다. 여자는 생긋 웃으며 내 손목에 팔찌 띠를 채워준다. 그리고 키를 건넨다. 277번.
카운트를 지나 좁고 밝은 통로를 벗어나자 홀이 나타났다.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 여인들은 모두 알몸이었다. 나의 시선과 두뇌는 재빠르게 그들 하나하나를 스캔하고 평가한다. 지나치게 심장이 빨라진다. 신묘한 감미로움이 내 속을 채우고 넘쳐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 제냐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알람이 울렸다.
‘마침내 만나셨군요. 축하합니다. 행복한 시간이 되세요. 당신의 큐피드 보너스 점수 5만 점이 추가되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