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고 성긴 그물들이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들 사이로 까만 탑들이 보였다. 비둘기가 무리 지어 후드득 날고 그 사이로 아기가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뛰어간다. 평화롭다. 마음은 언제나 생각을 조정한다. 조작된 생각은 꾸밈이 주는 행복에 가끔 취해버린다. 따스한 초저녁이다. 나는 내 인생의 겨울에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일종의 반전 드라마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별이 이어지고 낙담다운 징조가 늘 뚜렷하게 따라왔다. 낮게 드리운 무거운 구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세월의 무게만큼 쌓였고, 차츰 뚜렷한 절망으로 변해가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냥 방전된 배터리로 간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리기 전에 혹시나 해서 끼워 플래시를 켜 보니 눈부시게 환한 감정이 밝아왔다. 놀랍고 좋았다. 버리지 않고 모아두길 잘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과 스마트 폰, 앱의 탄생이 내 삶의 은인이다. 타자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외롭기 그지없는 존재. 자신의 코나투스 보존에 이처럼 살뜰하게 좋은 수단이 있었을까?
투명한 녹색 눈을 반짝이는 프로필 사진을 줄곧 쳐다봤다. 몇 장은 극단적인 명암 대비 효과를 적절하게 집어넣었다. 서른 살에 걸맞은 아름다움을 걸치고, 미소에는 삶의 기쁨이 배어 있다. 이목구비가 선명하다. 그리고 무척 가늘었다. 홀쭉한 목선을 따라 보라색 혈관이 도드라진다. 가슴은 착 달라붙었고 사타구니는 주먹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넓었다. 둥근 티타늄 안경. 금색 머리는 말총으로 묶여있다.
광장 포석에서 옅은 치마를 날리며 입술을 닫은 채, 웃고 있는 모습. 잘 된 작품에는 경련을 일으킬 것 같은 치밀한 환상이 흘러넘친다. 나는 그 속을 즐거이 유영한다. 첫 2주 동안 우리는 매일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향한 알 수 없는 감정선이 높고 깊어졌다.
가까이에 사는 것 같은데…. 차로 한 2시간 정도…
네, 그래서요?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뭐, 사랑하거나 좋아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죠. 당연히 만나야겠죠.
그럼 저 좋아해요?
네.
그럼 만나도 되겠네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만나서 같이 잘 수 있어요?
자는 게 목적인가요?
사랑이 목적입니다.
사랑을 빙자한 욕망 추구는 아니고요?
아름다움 혹은 사랑이 선사하는 육체적 끌림에 단지 충실할 뿐입니다. 추잡한 남자의 뻔한 욕망이라고만 깎아내리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노력하지만 그저 퉁명하게 질문할 수밖에 없군요. 변태인가요?
당신이 그렇게 규정한다면 그렇다고 봐야겠죠. 단어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저 당신은 섹스를 위해 피상적인 만남을 가지려는군요.
제가 누굴 탓하겠습니까? 사랑을 지나치게 고상하게 만든 옛사람들의 잘못인데. 장담하건대, 한 100년쯤 지나면 거리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섹스하는 세상이 될 겁니다. 지금 길거리에서 키스하듯이.
하하하.
하하하. 수긍의 답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세상 사람이 이 만남 앱에서 목적하는 바를 세세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거의 모든 인간이 속물스럽기 짝이 없는 변태일 겁니다. 저는 그냥 성의 굴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다지 절절하게 분노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무척 따사로운 표현이군요. 뭔가 좀 애잔하기도 하고요. 성의 굴절. 에둘러서 표현한 당신의 욕정. 쌉싸래한 맛이 느껴지는군요. 무용의 유용성 같은 것인가요?
저는 단지 사랑으로 부푼 가슴속에 잠들고 싶을 뿐입니다. 바로 당신 품속에….
‘하지만 아직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