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
et implevi eum spiritu Dei, sapientia et intellegentia et scientia in omni opere (Biblia Sacra Vulgata, Liber Exodus, 31 31:3)
그를 하느님의 영으로, 곧 재능과 총명과 온갖 일솜씨로 채워 주겠다. (불가타 성경, 탈출기, 31장 31:3)
서늘한 기운에 잠을 깼다.
밖은 소란스럽고 안은 얼었다.
아난다는 맞은편 벽에 붙은 온도계를 쳐다봤다.
영하 5도. 며칠 새 2도 더워졌다. 좋은 징조다.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탁한 물방울이 얼은, 작은 창으로 옅은 햇살이 반사되고 있다.
새벽 2시 17분.
오랜만에 긴 잠을 잤다.
킹조지섬에 도착한 후 일주일 만이다.
완전히 차단된 세상의 안락함을 느꼈다.
그는 검은 방한복을 걸치고 모든 창의 커튼을 조심스레 천천히 걷어 젖혔다.
바싹 마른 이파리 하나가 유리에 앙상하게 붙어있다.
좁은 컨테이너가 윤곽을 드러냈다.
그는 사방에 난 둥근 창을 통하여 바깥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태양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하늘에 박혀있다.
세상은 눈부시게 맑다.
구름이 없는 텅 빈 곳.
사실, 섬에 도착하여 흐린 날을 맞은 기억이 없다.
대지는 붉은 먼지와 연기로 가득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부유물.
제주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추레한 곳에 있는 이 섬에, 지금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아메리카 땅끝에서,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혹은 아프리카 남단에서, 끝도 없이 피난민들이 밀려들고 있다.
남극.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대륙.
하지만 이제 이곳이 인류가 구원받을 마지막 비상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아직은.
그는 길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이곳에서 꼬박 20시간을 보냈다.
먹지도 않은 채.
사실, 배고픔보다 더한 고통은 수면 부족이었다.
안전 가옥을 발견하기까지 꼬박 닷새가 걸렸다.
그동안 한순간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공포가 세상에 깔렸다.
무법천지.
그야말로 세상은 살아 있는 지옥이 되었다.
오염된 세상에서 살기 위해 도망쳐 온 이들은, 이곳에서 매일 작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무정부 상태.
수많은 국적의 다양한 인종이 좁은 곳에 모여, 살려고 발버둥 쳤다.
턱없이 부족한 음식.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허기진 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동족까지도.
그는 긴장을 멈추지 않은 채, 마스크를 쓰고, 문의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딸각하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열린 틈새로 찬바람이 몰려왔다.
하지만 따스하다고 느꼈다.
여름이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한여름에 이곳에 왔다면, 사흘을 넘기기가 힘들게 얼어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흑야(黑夜) 속에 굶주려 죽었거나.
새벽이지만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어둠이 없는 세상.
한때 남극의 맨해튼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이제 홍콩의 야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무질서와 소음이 흘러넘쳤다.
대기는 각종 냄새로 카랑카랑하게 메워졌고, 포장되지 않은 마른땅에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먼지가 풀썩거리며 올라왔다.
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헬케크>라는 방독 마스크를 언제나 쓰고 다녔다.
거의 모든 얼굴 부분이 투명 변종 아크릴로 가려졌다.
그래서 사실, 수많은 인종이 지나가지만 모두 반짝거릴 뿐, 낯설기만 하다.
동시에 모두 낯이 익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은 지나다니는 거리로만 경유지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은 항상 외투 주머니에 꽂혀있다.
주머니에는 <콜트 아나콘다> 권총이 장전된 채 들어있다.
아직 사용해보지는 않았다.
사실, 누군가의 서재 벽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던 거라 발사되는지조차 모른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그를 지켜 줄 유일한 도구임은 틀림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언덕바지가 나타났다.
‘세렝게의드탑’ 그가 기억하는 장소였다.
그는 그곳을 바라보며 줄곧 왼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바다가 나타났다.
남극의 바다.
아직은 그 짙은 푸른빛을 간직한 채, 눈이 아플 정도로 번뜩거렸다.
하지만 시간문제였다.
곧 어둠이 덮칠 것이다.
음울한 허탈감이 어느새 다가왔다.
점점 사람과 자동차, 바람 속에 붕붕 대며 날아가는 드론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는 가장 번잡한 곳에 있는 대형 야외 레스토랑에 이윽고 발길을 멈췄다.
그의 목적지.
하지만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산만하고 높았다.
녹슨 철골과 목재가 사방을 빙 둘러 거칠게 둘러싸고 있어 차라리 요새처럼 느껴졌다.
조잡한 식당 간판이 없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 틀림없다.
<엉클 톰스 캐빈 레스토랑>
입구에는 건장한 흑인들이 무장한 채, 머뭇거리는 행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섬뜩한 경고문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경고: 수상한 행동 시 바로 골로 보냄.>
<이유 없이 오래 머뭇거리는 자, 바로 발포함.>
<무기 발견 시 바로 대응 사격함.>
<죽기 싫으면 그냥 지나갈 것.>
<너를 위한 고기는 없다. 다만 네가 고기가 될 뿐.>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얼핏 설핏 흘러나왔다.
미치도록 향긋한 냄새였다.
냄새에 사로잡힌 수많은 이들이 유혹을 참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그들 대부분은 후리후리하고 마른 몸매였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다.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간, 총알로 벌집투성이가 된 채, 누군가의 스테이크용 고기로 식탁에 오를 것이다.
음식을 받으려면 가치 있는 뭔가를 제시하여야만 하였다.
돈은 소용이 없다.
휴지나 마찬가지였다.
귀금속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그냥 반짝이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모든 금융 시스템은 파괴되었다.
물물교환만이 남았다.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음식을 먹으려면 뭔가를 재배하거나 사냥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은 남극이다.
땅 대부분은 평균 1.6km 두께의 얼음 속에 갇혀있다.
그나마 땅이 드러난 극소수의 몇 안 되는 지역은, 일 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이다.
재배할 수 없는 곳.
결국, 사냥밖에 남지 않는다.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남극을 삶의 터전으로 살았던 수많은 생물이 사냥감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쉽게 포획할 수 있는 펭귄, 물개, 바다표범, 바다사자가 우선 사라졌다.
뒤이어 대형 고래가 자취를 감췄다.
남극을 풍요의 바다로 수놓았던 크릴도 거의 씨가 말랐다.
뒤이어 크릴을 주식으로 하는 물고기 대부분이 자취를 감췄다.
텅 빈 바다가 된 것이다.
인간이 머문 자리는 언제나 죽음과 황폐함이 대신했다.
음식의 풍요 속에 늘어나는 몸무게를 걱정하던 세상은, 불과 1년 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이 오염되고 황폐해졌다.
모든 것은 갑자기 한꺼번에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인구 천만 이상을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카라치, 상하이, 델리, 라고스, 이스탄불, 도쿄, 뭄바이, 모스크바, 상파울루, 베이징, 톈진, 킨샤사, 광저우, 선전, 카이로, 자카르타, 라호르, 서울, 멕시코시티, 벵갈루루, 뉴욕, 런던, 방콕에 핵폭탄이, 13분 간격으로, 차례로 터졌다.
2066년 6월 6일이었다.
100억의 인류가 풍요롭게 살던 지구는, 한순간에 치명적인 방사능으로 뒤덮였다.
다음날, 인구 백만 이상의 모든 도시에 울긋불긋한 풍선들이 수도 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늘을 빼곡히 뒤덮은 풍선들.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에 펼쳐진 대단한 장관을 지켜봤다.
그리고 한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풍선이 터졌다.
어린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독가스가 내려왔다.
신경가스인 사린, 타분, 소만이 온 도시를 강타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거리는 시체와 그들이 남긴 분비물로 범벅이 되었다.
사흘째, 숲이 있는 모든 지역에 드론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흘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 노란 액체를 뿜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변종 에볼라 바이러스였다.
바이러스는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공기를 통하여 쉽게 전염되었다.
감염된 대부분 인간이 사흘 안으로 죽었다.
엿새째, 지구는 이제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었다.
모든 죽은 것은 썩고 악취를 풍겼다.
잊혔던 전염병이 다시 창궐했다.
디프테리아, 성홍열, 장티푸스, 콜레라, 탄저병, 파라티푸스, 파상풍, 패혈증, 페스트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사능과 독가스, 치명적 바이러스가 대륙 대부분을 덮었다.
오염물질은 바람을 타고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남은 청정 대륙. 남극으로.
이레째, 지구는 누군가에 의해 완전 초토화되었다.
국가 대부분은 기능을 잃었다.
무정부 상태의 폭력과 약탈이 만연했다.
수많은 사람이 매일 살해하고 살해되었다.
지구 생물 대부분이 멸족하였다.
인간도 예외 없이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공포가 모두를 통제하고 혼란과 반목, 약탈과 은둔, 반성과 냉혈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이 <종말의 일주일>을 <아마겟돈>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엑소더스>가 시작되었다. 바다로 나갔다.
사람들은 살육과 오염된 대륙을 벗어나기 위하여 무작정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누구도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단지 오염이 덜 된 곳으로만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굶주림과 탈수, 풍랑으로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본능적으로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 정착했다.
하지만 난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땅이 부족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묶기 시작했다.
그리고 얕은 곳을 중심으로 주거 공간을 세우기 시작했다.
길도 만들었다.
소문은 빠르게 번졌다.
세상의 바다를 떠돌던 이들이 앞다투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흉측하지만 거대한 해상 도시가 건설되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이곳을 물의 도시 <베네치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식당 입구 손잡이를 잡았다.
극도의 배고픔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흑인 한 명이 총구를 그에게 향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턱없이 부족한 음식. 세상은 이제 음식을 가진 자가 권력이 되었다.
소문이 맞는다면, 이 식당을 운영하는 이들은, 식료품이 가득한 컨테이너 배를 강탈한 해적들이다.
“볼 일이 있는 거야?” 녀석은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총구를 그의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아크릴에 반사된 빛이 아난다의 눈을 강하게 쑤셨다.
“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정보를···.”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꽉 주며 버티고 섰다.
살려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니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석유, 무기, 여자 혹은 그와 맞먹는 정보.
“정보라? 무슨 정보지?” 놈은 이제 총구를 그의 헬케크에 바싹 갖다 붙인 채,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요량으로 째려보고 있다.
“엄청난 양의 식품에 관한···.”
순간, 녀석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스치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섬에 도착 후, 첫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