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 카뮈, <페스트> 중에서
정문을 지나자 텅 빈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의외의 광경이었다.
야외 식탁에 빙 둘러앉아 숯불에 갓 구워낸 고기를 허겁지겁 뜯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적어도 식탁이나 주방은 갖추어져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다.
그냥 먼지 나는 공간일 뿐이다.
‘도대체 식당 입구에서 맡았던 향긋한 바비큐 향기는 뭐란 말이냐?
가짜였나?’
순간, 낭패감을 동반한 절망이 솟구쳐올랐다.
그의 다리가 심하게 휘청거렸다.
뒤따르던 안내원이 부축하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난다는 그에게 의지한 채, 비정형으로 흩어져 있는 컨테이너형 안전 가옥 중 한 곳에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은 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맞은편 사람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중간에 앉은 이를 알고 있다.
자세가 꼿꼿하고 엄격하다.
그리고 좌우에 흰머리가 한 움큼씩 덮여있다.
그가 이곳의 우두머리임이 틀림없다.
아난다는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그라면 충분히 지옥에서라도 살아남을 위인이었다.
<프라이스 다즈>.
일명 <검은 곱사등>.
기형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고 뉴욕 뒷골목을 전전하던 그는, 뉴욕 최대 마피아 중간 보스 따까리가 되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살인까지도.
그는 영리하여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여 보스의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보스의 죄를 대신하여 감옥행을 자처하는 대단한 충성심을 보였다.
교도소에서 글을 깨우친 그는, 도서관 책장 절반을 덮고 있는 법률 서적과 판례집을 몽땅 읽어 버렸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등장했다.
그는 동료의 법률적 자문을 아낌없이 제공하여 신뢰를 쌓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하여 명성을 구축하였으며, 언론을 이용하여 유명인으로 등극하였다.
7년 뒤, 모범수로 출소한 그는 이미 스타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며칠을 굶은 거지?” 보기 드물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가 물었다.
냉담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일주일 전 여기 온 이후로 쭉···.” 그는 잠시 아난다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그의 앞에 반쯤 탄 고기 한 덩어리, 나이프, 포크가 놓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보스를 쳐다봤다.
“사람고기는 아니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난다는 고기를 손으로 꽉 집어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접시를 비우는 데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고기 한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텅 빈 접시만큼 이 세상에 고통스러운 게 있을까?
그는 접시에 미련을 거두지 못한 채 프라이스를 애원하듯 쳐다봤다.
“정보가 있다고?” 그의 목소리는 전문 변호사답게 명료하고 깐깐하였다.
이제 먹은 밥값을 제공할 차례가 된 것이다.
아난다는 가슴 주머니에서 간이 <3D 프로젝터>를 꺼내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 붉은 버튼을 누르고 공간 인증키에 두 손바닥을 살며시 댔다.
잠시 딸깍거리더니 녹색 광선이 접시에서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한 장의 사진이 공간에 띄워졌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돌무더기 중앙에 콘크리트로 된 길쭉한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화성의 초기 개척 사진처럼 보였다.
아난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음, 보시는 사진은 북극의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스피츠베르겐섬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입니다.
일명 <북극의 노아의 방주> 혹은 <최후의 날 저장고>로 불리고 있습니다.
약 500만 개의 지구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고 추산됩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유일한 저장고입니다.” 변호사는 그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저장고가 있다는 말인가?” 아난다는 잠시 뜸을 들이며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을 보시죠.
엘리아! 다음 화면.” 이번에는 유선형의 길고 아름다운 배가 공간에 띄워졌다.
대형 유조선의 축소 모형이었다.
“선박명 : <게으른 바다>.
2044년 4월 4일에 코리아 현대 중공업에서 극비리에 건조된 <세비어 7724 모델>.
백만 톤에 육박하는 재화중량톤. 동력은 원자력. 58년 주기의 핵연료 교체···.”
“요점이 뭔가?” 변호사의 표정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당신이 잘 알고 있는 배니까.
당신이 탈취한 그 배니까.
“아 네, 엘리아! 다음 화면.” 프로젝터는 잠시 깜빡이더니 한 장의 문서를 공간에 띄웠다.
그곳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복잡한 지도가 뒤섞여 표시되어 있다.
줄과 선, 그림과 글이 혼재한 공간.
아난다는 그 공간의 한곳을 찍으며 말했다.
“엘리아! 확대. 좀 더 확대. 그리고 마크.” 이제 좌중의 어느 누가 봐도 선명한 두 개의 숫자가 굵은 글씨로 나타났다.
‘-71.377282, -4.783315’
“뭔가?” 프라이스는 조급한 듯, 얼굴을 화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선박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경도와 위도죠. 엘리아. 다음 화면.” 화면은 이제 하얀 대륙으로 변환되었다.
눈으로 덮인 남극 대륙.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큰 땅.
남극점을 중심으로 화면은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대륙의 한 곳.
그곳이 붉은 점으로 깜빡거렸다.
“저곳은?” 변호사는 성마르게 아난다를 쳐다봤다.
“그렇죠. 선박의 최종 목적지는 남극 대륙의 한 절벽 해안입니다.
당신이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공해상에서 마주친 배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간 게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냉혹한 전문가의 표정에 놀라움과 당혹함이 섞여 있다.
“배는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도시 <우슈아이야>에서 남극으로만 항해했습니다.
그동안 줄곧.
20년이 넘도록.
어마어마한 식품과 유용한 장비를 싣고 말이죠.
한마디로 남극의 노아의 방주죠.” 드디어 변호사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이게 사실이란 말인가?”
“네, 적어도 제가 얻은 정보는 그렇습니다.” 아난다는 흔들리는 몸을 곧추세우며 확신을 주어 말을 했다.
“확인이 필요한 것은 당연히 알겠지?” 프라이스의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 메아리쳤다.
“네.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보스는 급히 부하를 주변으로 불러 모으더니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명령이 떨어진 듯 그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문서에 표시된 좌표를 복사하더니 서둘러 나가 버렸다.
부하가 모두 사라지자 그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아난다에게 펼쳤다.
“우리가 가진 비행 장비로 한 30분 정도면 그곳에 도착하여 확인 작업을 할 수 있을 걸세.
자, 마침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해 둔 만찬이 있다네.
자네를 초대하고 싶네. 나를 따라오게.
식탁으로 안내하지.”
프라이스는 앞선 듯 가더니 갑자기 멈칫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아, 참. 자네 이름이 뭔가?”
“본명은 예지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