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어찌 내가 편히 쉬며, 어찌 내가 평화를 누리랴?
절망이 내 마음속에 있거늘!
내 형제가 지금 된 것을 보라. 나 또한 죽고 나면 이같이 될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
- <길가메시 서사시> 중에서
식당은 밝고 좁았다.
의자는 낡았지만, 식탁은 반짝거렸다.
원형 식탁 중앙에 눈부시게 밝은 리튬 강화 형광등이 사과 형상으로 빛을 발하였다.
아난다는 변호사의 맞은편 자리로 안내되었다.
보스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녀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음식이 나왔다.
그동안 잊혔던 음식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대체 <아마겟돈> 후, 채소와 과일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아난다의 눈앞에 야채샐러드와 노란 호박죽이 놓였다.
순간, 꿈을 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흥분과 기대, 감탄과 조급함이 뒤섞인 묘한 환영 속에 갇힌 듯하였다.
그의 허기진 육체가 음식 향기에 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라지고 입속이 침으로 가득했다.
배고픔은 인간의 동물적 특성을 극대화한다.
고상한 문화적 취향이나 예술적 감흥은 이미 종말을 고하였다.
“자 우선, 들게나···.”
아난다는 잽싸게 숟가락을 쥐고 호박죽이 담긴 그릇을 한 손으로 잡은 뒤, 빠르게 퍼먹기 시작했다.
놀라운 맛. 세상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맛이다!
“통조림 제품이라 그다지 맛은 없을 거야.”
프라이스의 말은 마치 빈정거리는 듯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냐?
지금 그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
한 그릇의 탄수화물이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불분명한 탐식의 즐거움을 끄집어냈다.
오래전, 가족의 식탁을 당연하게 채우던 음식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해서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사소한 것 한 가지가, 지금 그를 휘어잡고 기쁨 속으로 이끈 것이다.
아난다는 입에 담긴 죽을 음미 하며, 어느새 야채샐러드에 줄곧 눈을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신기한 듯 손으로 샐러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거의 원형에 가까운 육지의 채소를 본다는 것은, 작금의 상황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남극은 물론 이려니와 그가 가까스로 탈출하였던 해상 도시 베네치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베네치아>는 바다에 세워진 배의 도시답게, 거의 모든 음식이 생선, 조개류 그리고 해초류로 이루어졌다.
사실, 극단적으로 작은 크기의 땅에 서 있기조차 힘들 만큼의 무수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으니, 땅을 일구어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의 삶은 수렵과 채취였다.
물고기를 낚고 천혜의 산호초 바다를 마구 파헤쳐 단백질 덩이를 구했다.
물론 약탈도 성행했다.
선상에서 매일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인근 바다의 자원이 점점 고갈되면서 그 강도는 더해갔다.
그런데도 도시의 크기는 급속도로 커졌다.
아난다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도시가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져 버린 뒤였다.
베네치아는 아비규환이었다.
하긴, 이제 세상은 어디를 간들 모두 지옥이었다.
그가 탄 배는 태평양에서 40일을 표류하였다.
방향은 남쪽이었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운 좋게 덜 오염된 땅을 만나기만 소원하였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5월의 꽃(五月之花)>이라는, 다소 매력적인 이름의 배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몰래 승선할 수 있었다.
도시에 도착하였을 때, 배에 탄 102명의 인원 중 절반만이 살았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생존자는 도착하자마자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아난다는 멸망이 시작된 후, 줄곧 혼자였다.
두려운 인간은 뭉치기 마련이다.
세력을 조금이라도 더 키워 생존 확률을 높이려고, 본능적으로 적과 아군으로 편을 가르고 선택을 하거나 강요받았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의 이십 대는 혼란과 광기 혹은 까닭 모를 슬픔과 절망을 경험하며, 소위 <이기적인 자아 상실>을 자행하였지만, 서른 즈음에는 욕심을 내려두고 내면의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함을 애써 보듬을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하였다.
물론, 가족 - 부모와 여섯 동생 – 과의 헤어짐은, 무엇보다 큰 아픔과 상실이었다.
그는 가족을 생각하며 지독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그리고 모두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궁금했다.
차가운 구치소 면회실에서의 마지막 대면 후, 그는 줄곧 그녀의 영롱한 눈길에 맺힌 따스한 사랑의 눈길을 갈구하였다.
내면의 선한 마음을 일깨워주던 그 아름다움 말이다.
“지수야, 내일은 그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도록 노력해주겠니?”
어머니는 그에게 따스한 빵조각이 든 접시를 내밀며 지긋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학창 시절, 아난다는 어린 동생이 당하는 불의를 결코 참지 못하였다.
그는 다소 과격하고 어느 정도 폭력적이었으며 좀 더 집요하였다.
어느 날, 동생의 지능 헬멧과 스마트 폰이 망가진 걸 목격했다.
하지만 동생은 두려운 듯, 그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절대 불지 않았다.
범인을 찾는 일은, 솔직히, 그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는 15살이 되기 전부터 해커였다.
과정은 간단하였다.
또래의 다른 이들처럼, 온라인 3D 게임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그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는 무적의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나중에는 궁금하였다.
그는 집요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떠돌아다니는 간단한 해킹 정보부터 시작하여, 점점 고단위의 기술을 습득해나갔다.
그리고 한 달쯤 뒤, 게임 서버에 마침내 침투한 그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무적의 상대는, 당연하게도, 관리자 계정이었다.
물론, 그의 계정도 관리자 등급으로 몰래 올렸다.
며칠은 즐거웠다.
하지만 그의 속을 가득 채우던 게임의 즐거움이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겪고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혼란은 당혹감으로 다가왔고, 뒤죽박죽인 상태로 며칠을 보낸 뒤, 마침내 그는 그가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건, 시스템 침투. 해킹 그 자체였다.
아난다는 동생의 스마트 폰을 분석하였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범인이 나왔다.
녀석은 한 학기 내내 동생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우선, 녀석의 계정에 침투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기를 사용 불능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학교 시스템에 침투하여 녀석의 모든 성적을 낙제점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아난다는, 녀석이 다니는 스포츠 클럽에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고는 절대 내 동생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 내고 말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발견한 사실이지만, 얼마나 세게 주먹을 휘둘렀던지,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져있었다.
하지만 감히 병원에 갈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이 일로 한 달간의 정학 처분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다행인 건, 폭행만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분노를 산 것이다.
아버지는 지역의 명망 있는 도의원이었다.
그리고 다음 선거가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악재였다.
경쟁 후보자들의 공세가 나날이 거세졌다.
하루아침에 그는 지역의 망나니로 사람들의 입밖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아버지의 엄명으로, 그는 한 달 동안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마침내, 정학이 풀리고 선거도 끝났으며 – 아버지는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 주변의 관심도 멀어졌을 때쯤, 그는 집 밖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묘한 해방감과 아울러 그가 가진, 남들과 뭔가 다른 재능에 벅차오르는 환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집에서 보낸 한 달은,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우선, 그는 아버지의 재선을 살짝 도왔다.
침투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선거 시스템을 그는 3주 만에 풀었다.
그리고 약간의 필터링을 통하여 결과를 유리하게 바꾸었다.
물론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선거 판세가 거의 박빙이었기에, 누가 이겨도 그다지 의심이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의 해킹 지식은 한 달 전보다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해킹 모임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그가 열여섯이 되던 시점부터 줄곧 지켜보았고, 평가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은 오프라인을 제외한,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방법으로, 지식 공유의 즐거움을 함께하였다.
모임의 메시지 처음과 끝은, 항상 <Memento mori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제목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난다는 13번째 회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초청장 마지막 글귀에서, 그가 모임의 공식적인 마지막 회원이 됨을 짐작할 수 있었다.
‘... 비로소 오랜 기다림 끝에 완전한 모임이 완성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를 위대한 붓다의 제자 아난다로 명명합니다. <Memento 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