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40억 년의 지구 역사에서 5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6500만 년 전, 5번째 대멸종, K-Pg 멸종에서 공룡이 모조리 사라졌다. 지구에 운석이 충돌하면서 모든 게 변했다. 생태계는 완전히 리셋되었다.
저명한 생태학자 폴 에를리히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는 2015년 “인류에 의해 제6의 대멸종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라고 경고했다.
아난다 앞의 음식이 어느새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처음, 눈으로 마주한 음식은 무척 많은 양이었다. 마르고 작기까지 한 그가 아무리 열심히 내 몸에 채워 넣어도 십 분지 일도 못 넣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척 많은 날 동안 굶주릴 수 있다는 것을. 집요하게 배고픔의 신호를 보내왔다.
그는 이제 취기도 느꼈다. 비록 와인 몇 잔이었지만, 영양 결핍으로 부실해진 육체는 약간의 알코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제 포만감과 배고픔, 알딸딸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보스의 귀에 낮은 소리로 속삭이며 아난다를 유심히 쳐다봤다. 눈빛이 섬뜩하게 위압적이었다. 변호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년은 빠른 발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쿵’하고 닫힌 문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한동안 문을 바라보더니 내게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우수가 느껴졌다.
“잘 알다시피, 식품을 가득 담은 배가 우리 해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소? 게다가 피난민 대부분은 굶주리고 있고….”
“그렇다면?” 아난다의 질문에 프라이스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소. 지키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소. 턱없이 부족한 식량. 세상의 생존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몰리고 있으니, 그들 모두의 목표는 오직 하나. 우리란 말이오. 매일 총질이지. 당연하게도. 지키는 자와 뺏으려는 자.” 그는 와인을 거칠게 그의 잔에 따르더니 쭉 들이켰다.
“조금 전에 부하 2명이 사망했소. 이번 주에만 4명이 죽었소.” 보스의 빈 잔은 급하게 다시 채워졌다.
“패러독스. 이건 분명한 패러독스요. 우리가 가진 음식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남은 식품을 급속히 소진하고 있소.”
“그렇다면?” 아난다는 이제 또렷하게 그의 눈을 주시했다. 변호사가 그의 질문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현명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렇소. 나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만찬을 준비했소. 8의 형제, 라후라를 위해서 말이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번은 그가 나를 찾을 것으로 믿었소. 어쩌면 나를 다시 살려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오. 그가 어디 있는지 아시오?” 아난다는 씹는 행위를 멈추었다. 포크와 수저도 고스란히 식탁에 곱게 놓았다.
“그는….” 갑자기 아난다의 목이 메었다.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죽었군요?”
“네.” 그는 가까스로 힘없는 답을 이어갔다.
“그럼?”
“네. 제가 모임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본적도 만난 적도 없다는 멤버들을?” 아난다는 방한복의 지퍼를 열고 셔츠를 가슴까지 올렸다.
“<라이브 싱크>?” 프라이스는 그를 보며 조용히 외쳤다.
“네.” 아난다는 가슴에 박힌 <실시간 다중 생체 신호 싱크 장비>를 그에게 보였다. 13개의 점멸등 중 오직 한 개만 반짝였다. 마지막 13번째만.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예지수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게 어떻게 여태 작동이 되는가? 지상의 모든 통신 시설은 파괴되거나 끊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상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네. 지구 궤도에는 여전히 26,666개의 인공위성, 4개의 우주 정거장이 운행 중입니다. 달에는 9개의 유인 기지가 있고요. 화성에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그곳에?”
“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존해있습니다. 우주에.”
소수의 돈과 권력, 기술을 가졌던 인간들은, 지구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진작에 감지한 듯, 어느 날부터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우선 지구 궤도를 도는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달에 그들의 첫 식민지를 세웠다.
그들의 두 번째 식민지는 화성이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태양계에 5개의 식민지를 더 건설하였다.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 그리고 토성의 위성인 엔켈라두스, 타이탄이었다. 그들은 각 식민지에 배타적인 공화국을 설립하고, 지구와의 완전 분리를 선언하였다. 즉, 허락된 소수의 인간과 그들이 만든 인조인간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아마겟돈>이 시작되기 한 달 전에 그들은 우주로 모두 이주하였다. 마치 <대멸종>을 알기라도 한 듯.
소수의 선택된 인간은 다음의 7개 비밀 조직과 알려지지 않은 2개의 단체 중 적어도 한 곳에 속하였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스컬 앤 본즈>, <장미 십자단>, <빌더버그>, <시온파> 그리고 <성당 기사단>.
“자네는 그들 편이었나?” 아난다는 찬찬히 보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니었구나. 그러니 죽임을….” 그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시에 죽임을 당했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적어도 열흘 전까지 <8의 형제>는 살아 있었습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태평양의 한가운데. 생존자들의 배를 묶어 만든 거대한 인공 섬. <베네치아>에 그가 생존해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비록 그와의 모든 통신 수단은 끊어졌지만, 그는 유무형의 방법으로 나를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아난다는 라후라를 모른다. 그의 본명도 모른다. 그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으니 설령 옆을 스치더라도 알아볼 재간이 없다. 하지만 라후라는 아난다를 알고 있다. 라후라는 예지수가 어설픈 해커 시절부터 줄곧 그를 지켜보았고, 그를 모임에 추천하였으며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했다.
아난다는 라후라를 알고 있다. 그는 비범하고 순수하였다. 그는 인간이 세상에 해한 악을 알고 있고 괴로워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치유의 손길은 작고 외로웠지만, 그는 주저 없이 행하였다. 그는 아주 많은 것을 가진 이가 더욱 큰 것을 원한다는 것에 분노하고 저항하였다.
라후라는 알고 있었다. <풍요의 시대>가 한순간에 사라질 정도의 지나치게 많은 폭력이 세상 곳곳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배들의 섬>에서 3주를 보낸 어느 날, 아난다는 그의 잠자리에 누군가 몰래 두고 간 가방을 발견했다. 가방에는 한 권의 책도 들어있었다. <제목 : 거리의 부랑아에서 최고 변호사가 되기까지> <저자 : 프라이스 다즈> 책을 펼치자 구부정한 등을 한 흑인이 꼿꼿하게 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나를 찾아왔는가? 설마 빵 한 조각 얻어먹으려고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때였다. 쉭 거리는 잡음과 함께 무전기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들리는가? 쉭. 보스. 들리는가? 쉭. 오버.” 변호사는 황급히 무전기를 잡고 볼륨 다이얼을 올리면서 큰소리를 말하였다.
“잘 들린다. 제임스. 쉭. 그래 그곳에 뭐가 보이는가? 오버.”
“네. 보스. 벽입니다. 거대한 벽이 있습니다. 9층으로 된 벽이 있습니다. 쉭. 오버.”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난다를 바라봤다.
“나를 다시 살리려고 왔구나? 틀림없이 나를 살리려고? 왜 나인가? 비열하고 천한 나를 살리려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난다는 그의 외침 속에 비친 눈물을 보았다.
아난다는 앞에 놓인 빵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