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창조한 유일한 형태의 삶은 순전히 파괴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모습을 통해서 삶을 만드는 것이죠.” - 스티븐 호킹
벽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였다. 절벽 전체가 온통 흰 벽이었다. 그리고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틀림없이 그냥 눈으로 덮인 해안 절벽이었다. 하긴, 감히 누가 이런 극한의 오지에 인조 구조물이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변호사 일행과 아난다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들 앞에 펼쳐진 9층으로 나누어진 거대한 작품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거친 바람이 그들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누구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감상만 할건가?” 보스는 싱긋이 웃으며 아난다의 어깨를 툭 쳤다. 그들은 서둘러 벽 가까이 걸어갔다. 선발대가 그곳에 있었다. 그들 모두 들떠 있었다. 일행은 기쁨으로 모두 얼싸안았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이가 오랫동안 배불리 먹어도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 감히 어느 누가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냉장고. <절망의 시대>에 이것보다 더 희망적인 게 있을 수 있을까?
“들어가는 방법은 찾았소?” 변호사는 무전기를 든 부하에게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아뇨. 아직….” 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둘러 보스 일행을 문 앞으로 인도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벽과는 달리, 문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고 좁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문은, 마치 중앙은행의 대형 금고처럼 단단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중앙에 둥근 원이 있고 그 속에 두 개의 손바닥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다이얼도, 손잡이도 없었다.
“자네는 방법을 아는가?” 보스는 다급하게 아난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제가 아는 것은 위치뿐입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며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폭파를 해야 할 듯합니다.” 누군가 외쳤다. 하지만 다른 이의 반박이 곧바로 돌아왔다.
“그건 위험합니다. 위를 보십시오. 온통 얼음 계곡입니다. 폭파와 동시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릅니다.”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거대한 높이의 계곡을 쳐다봤다. 수만 년 동안 눈과 얼음으로 형성된 거대한 빙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태하게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순, 모두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이 사라졌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그저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굳게 닫힌 좁은 문. 끝도 없이 불어오는 폭풍 같은 찬바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아난다는 곁눈질로 보스를 쳐다봤다.
얼어붙은 무리 속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빙벽을 반사한 강렬한 태양 빛에 물들어,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무리의 시선도, 갈구하듯, 대부분 프라이스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햇살과 오싹하리만큼 차가운 바람 속에, 그는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듯, 아난다의 손을 잡고 천천히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단언컨대, 세상에 나만큼 절망 속에 살아나는 법을 체득한 이는 없을게요.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고, 온갖 악의 소굴에서 용케도 생명줄을 유지하였으며, 이제 지옥으로 변한 세상에서도 이렇게 잘 버티고 있지 않소? 나는 남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성실하고, 더 노력하고, 더 영악하다는 것에 일종의 자긍심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소. 뭐, 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곱사등이가 아니겠소.” 그는 아난다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싱긋이 희고 큰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왠지 모를 쾌락 같은 게 느껴진단 말이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려움, 곤란, 무서움, 공포 같은 것들이 내게 부여하는 삶의 의미 말이요.”
“그렇다면?” 예지수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당신들이 나를 지목한 이유가 뭐겠소? 나를 이 거대한 창고로 인도한 이유가 뭐겠소?” 그는 이제 확신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친 바람 속에 유난히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난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종말의 시대를 거뜬히 헤쳐나갈 지도자.’
그는 이제 천천히, 그가 잡은 예지수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터득한 지혜라고나 할까? 내 주위의 적과 친구를 구별하기 위하여, 나는 무척이나 섬세하게 상대방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소. 만찬에서 나의 주의를 끈 것 중 하나는, 당신의 오른손이오.” 그는 아난다의 오른손을 들어 펴보였다.
유난히 휘어진 새끼손가락이 드러났다.
“자, 이제 문에 새겨진 문양을 한번 보기 바라오. 어떻게 생겼는지?” 놀랍게도, 문에 그려진 손바닥 문양에도 새끼손가락이 휘어져 있었다. 좌중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아난다였다.
손바닥 모양뿐만 아니라 크기, 손금까지, 복사한 듯, 정확하게 같아 보였다.
‘어떻게 나의 손바닥이 저곳에 그려져 있단 말인가?’ 여러 개의 의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왜?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자, 이제 서둘러 당신의 손을 저 문양에 일치시켜 보기 바라오.” 그는 성급한 아이처럼 재촉했다. 하지만 아난다는 주춤거렸다. 믿기지 않는 우연의 일치에 머릿속이 타들어 갈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주위의 눈빛은 강렬하고 냉혹했다.
그들은 예지수의 두 손을 잘라서라도 저곳에 갖다 대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할 인간들이었다. 굶주림은 인간이 단지 동물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난다는 천천히 문 앞에 다가가 그의 두 손바닥을 문양에 조심스레 갖다 대었다. 면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머릿속을 채우던 온갖 의문들이 삽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이의 동작이 긴장으로 멈추었다. 혹한의 바람 속에 그대로 얼어버린 듯하였다.
잠깐의 정적이 공간을 지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왔다. 딱딱하기만 하던 차가운 면이 어느새 따뜻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물컹거리며 액체로 변하더니 그의 손을 감싸며 손등으로 손목으로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아난다는 급히 손을 빼보려 하였지만, 완전히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손이 문 안쪽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그는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곁의 누군가가 예지수의 어깨를 잡았지만 격렬한 스파크와 함께 그는 멀찌감치 튕겨 나가 버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쌓인 채,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삽시간에 일어난 충격으로, 누구 하나 감히 그를 도울 생각을 못 하였다.
그 사이, 흐물거리는 뜨거운 액체는 점점 그의 몸을 둘러싸더니, 두툼한 방한복을 조각조각 찢어버리고는, 그를 깊은 구멍 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마치 중력이 사라진 골짜기를 흐르듯 통통거리며, 검은 공간을 떠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움이 사라졌다. 움직임도 멈추었다.
그의 몸은 액체 속에 굳은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공포가 전신을 덮쳐왔다. 그는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은 벌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수술 중 각성> 상태에 빠져 버린 듯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사라지고 주위가 밝아졌다.
그는 마치 투명 보석 속에 갇힌 벌레처럼 느껴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보스 일행이 어른거리며 보이기 시작했다. 문에 난 틈새로 조심스레 그들이 나타났다. 보스는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아난다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발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이제 자신을 발견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들은 모두 그냥 스쳐 갔다. 마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이.
아난다는 절망적인 눈길로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들이 다시 예지수의 시야에 잡혔을 때는, 무거운 식품 상자를 모두 짊어진 채였다. 그들은 모두 축제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부재를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쓸쓸함을 느꼈다. 일행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서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 사라진 틈으로 남극의 눈보라가 일정하게 들어왔다. 그는 한동안 그곳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여전히 꼼짝달싹할 수 없게 갇혀있었지만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난다는 이제 그의 앞에 반사된 흐릿한 그를 볼 수 있었다. <라이브 싱크>의 마지막 점멸등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사고가 조용히 흩어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난다는 점점 안정되었다. 느낌이 줄어들고 고통이 사라졌다.
행복감이 들어오고 그를 누르던 세상의 기우들이 벗겨지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는 이제 기억이 모두 사라지기 전, 가방 속에 들어있던 내 형제의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Memento mori>. 슬퍼하지 마라 아난다여. 나의 형제여. 모든 것은 예정되었네. 세상은 다시 태어날 걸세. 오래전 그때처럼. <Memento mori>.’
그는 그때 깨달았다. 그의 12 형제들이 가까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어떤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9개의 계단이 모두 열리고, 세상의 오염이 모두 걷힌 날, 누군가 우리를 냉동고에서 꺼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리셋된 세상으로.
아난다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뜻대로 되었나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