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징겐 (Büsingen)

by 남킹
붓다의 세상에서 이천오백 년이나 더 흘렀지만, 여전히 번뇌는 줄어들지 않고, 의식은 더욱 가벼워지기만 했고, 감각은 내면의 불안을 증식시키기만 한다.


제냐와 헤어진 그 날. 라후라는 사리에게서 중요한 메시지를 받았다.


열차를 타고 스위스 국경을 넘기 직전이었다.


‘<Memento mori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심하세요. 추적이 가능한 곳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세요. Memento mori>.’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2066년 5월 31일 오전 9시 29분.


그는 열차를 탑승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위치는 실시간 추적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다음 정거장을 확인했다.

뷔징겐 역.


3분이내에 도착 예정이었다.

그는 우선 아난다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사리에게 답신을 보냈다.


‘<Memento mori 열차에서 곧 하차합니다. 위치. 뷔징겐. Memento mori>.’


그는 연구소 동료에게서도 다급한 SNS 메시지를 받았다.

‘수십명의 경찰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이것을 받자마자 모든 연락가능한 스마트 기기의 전원을 껐다.


지금부터는 오직 사피엔티아와 연락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곧이어 형제 전체 메시지가 도착했다.

‘<Memento mori 수보티, 아난다 형제 체포됨. 그 날이 임박했슴. 준비한 절차 수행바람. Memento mori>.’


곧이어 사리에게서 긴급 메시지가 왔다.


‘<Memento mori 주차장에서 마틴 찾기 바람. 선글라스. Memento mori>.’


라후라는 기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하늘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수 십대의 추적 드론이 열차 플랫폼 근처를 비행하고 있었다.

플랫폼 내는 드론 비행 금지 구역이므로 그것들은 역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신원확인을 하고 있었다.


라후라는 가까운 화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 뚜껑 위에 배낭을 펼친 뒤, 겉옷을 급하게 벗었다.

그리고 복합인지 위장용 조끼를 배낭에서 꺼내 속에 걸치고 다시 옷을 입었다.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열차 대합실을 빠져 나와 피도르의 특수 렌즈가 장착된 선글라스를 꼈다.

몇 대의 드론이 그를 졸졸 따라 오더니 이내 포기하고 가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마치 관광객인양 두리번거리며 차량을 조사했다.


마침내 윈도우에 마틴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차를 발견했다.

그는 안경을 벗고 운전석에 탑승 한 후 시동을 걸었다.

무척 오래되고 낡은 차였다.

어쩔 수 없었다.


최근 차량은 AI가 기본 탑재되어, 땅속으로 꺼지지 않는 한 모든 추적이 가능하였다.

그는 잠시 어디로 향할지를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포기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그가 속한 연구소에서 멀어지는 방법뿐이었다.


그는 수동 운전으로 전환한 뒤, 가속 페달을 꾸욱 밟았다.

차는 한번 덜컥거리더니 이내 빠르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30분쯤 산길을 달렸을 때, 메시지와 함께 목적지를 받았다.


‘<Memento mori 가르니에 수도원. 릴리안 찾기 바람. 이탈리아. Memento mori>.’

라후라는 차량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이식하였다.

그리고 자동 운전으로 전환하였다.

옵션으로 <오로지 좁은도로로만>을 선택했다.


어느새 그는 꽤 깊은 산중을 달리고 있었다.

더 이상 드론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 시트를 최대한 뒤로 빼고 눕힌 다음, 눈을 감았다.


온통 아난다 걱정 뿐이었다.

그의 신변 보호는 라후라의 몫이었다.

그는 적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답답한 노릇은, 그가 지금 당장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는 긴 한숨과 함께, 앞으로 펼쳐질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몇 시간을 달려 이탈리아 국경을 넘었다.


라후라는 그곳에서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시간 더 달려 그나마 평지가 남아 있는 한적한 시골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골랐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투명한 하늘 아래, 건물은 오래된 듯 낡지 않았고 지저분한 듯 정돈되어 있었다.

우선, 방문객은 눈을 씻고 봐도 띄지 않았다.


좁은 골목은 막힌 듯 구부정하게 경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였고, 돌길이 끝난 자리에는 여지없이 포도밭이 펼쳐졌다.


밭은 언덕 전체를 휘어 감고 그 끝의 경계를 감히 재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해서, 혹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라고 해서, 그곳의 가치를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이 서린 곳일 수도 있고, 숨을 멎게 만드는 비경이 모습을 감춘 채, 우연한 방문자를 놀라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파른 언덕 꼭대기를 온통 덮고 있는, 회색의 수도원이 중앙을 차지한 마을은, 차량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준 곳 치고는, 꽤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풍경이었다.


마을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드물게 눈에 띈, 농부든, 수도사든 그들의 걸음걸이는 아주 느렸다.

마치 달 표면을 걷는 듯하였다.

시간이 지나치게 느리게 가는 곳.

분명 그가 살던 곳과는 달랐다.

그의 도시는, 비정형, 불규칙, 가속, 오락가락, 드러남에 대한 과도한 관심, 확 트인 길과 잡동사니가 쌓인 골목, 작은 혼돈들이 뭉쳐 거대하게 뒹구는 탐닉들이 혼재하여 뿜어져 나오는 도가니 같았다.

그런 곳에 태어나서 30년 넘게 그의 습관이 길들여졌다.


라후라는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제공하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보려고 애썼다.

동시에, 뜻하지 않은 공간에서 맞이하는 생소함에 신선한 자극을 느꼈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한다. 호기심은 보호본능 보다 더 충동적이다.


조금 전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자극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이곳을 좀 더 훑어보기로 작정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호텔을 찾아야 하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특이하게 두꺼운 슬레이트 지붕이 낮게 내려선 곳.

호텔을 표시하는 간판은 눈에 띄지 않게 작았다.

반질거리는 조약돌을 쌓아 놓은 공터를 지나자 입구가 비로소 나타났다.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이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나왔다.

안내대는 허름한 칸막이벽 하나로 구분되었다.


텅 빈 곳. 아무도 없다.

손님도 주인도.

마호가니 서랍장 만이 외로이 남아 있다.

벽지는 모서리마다 얼룩지고 부풀어있다.

벨벳 커튼이 묶인 채, 창을 암울하게 살짝 가렸다.

오랫동안 펼쳐지지 않은 윤곽이 고스란히 회색빛 먼지로 포장되었고 창틀 언저리에는 좀나방이 죽어있다.

그리고 창문 유리에 비친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있다.

호젓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혼자였다.

그는 발길을 돌리려다 멈췄다.


다른 호텔을 근처에서 찾을 가능성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여주인이 나타났을 때, 그는 <릴리안 나리>의 <호모 사피엔스 기록><고대 철학 편>을 읽고 있었다.

한 달째 읽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절반도 못 읽었다.


그는 유난히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나오면 무한 반복 테이프처럼 지칠 때까지 곱씹었다.

특히나 이 책은 참 고통스러웠다.


마치 낱장 한 장 한 장이 한 권의 책처럼 그는 느꼈다.

차라리 멍하니 그냥 기다리는 게 쉽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한 장 반을 더 읽었다.


어느새 어둠이 세상을 덮었다.

수수한 마실꾼 행색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히드로멜리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묻지도 않고 보드에 걸려 있는 방 열쇠 하나를 내어주었다.


“301호에요. 깨면 연락해요. 아침을 준비할 테니.” 이탈리아 억양이 심하게 섞인 영어를 겨우 알아들었다.

“실례지만 방값은?” 라후라는 눈을 끔벅거렸다.

“알아서 줘요. 당신이 유일한 손님이니까.”


주인은 넌지시 해쭉 웃으며 나가버렸다.

그는 술잔을 들이켰다.

시큼한 향이 목을 막으며 퍼졌다.


그는 그 순간, 제냐와 보낸 어젯밤이 무척 그리웠다.


서글픈 나의 사랑 - 2023-12-23T212532.162.jpg
그레고리 흘라디의 묘한 죽음 (1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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