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무채색의 공간. 더러운 하늘이 낮게 드리웠다. 저 멀리, 시선의 끝에 폭풍의 형상이 도사린다. 에리스는 길게 한숨을 쉰다. 지금은 그 무엇이든 삶을 어렵게 한다. 대기, 바람, 구름, 정적, 외로움, 바짝 마른 이파리. 모든 것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사물과 형상, 기억은 아픔과 슬픔으로 만 맺어진다. 종말의 시대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원래 만들어진 대로 파괴로 이어진다.
시야는 가려지고 두 손은 묶였지만, 끝없이 내려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난다를 급습한 이들은 다소 거칠지만, 배려가 느껴질 정도의 강압을 행사했다. 꽤 지루한 시간 후, 엘리베이터는 쿵 하며 멈췄다.
그는 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최대한 바깥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서늘한 기운. 웅 하는 기계음. 알 수 없는 중국어. 규칙적인 발소리. 가끔 들려오는, 덜컥거리는 마찰음. 마침내 그는 어떤 장소에서, 결박과 안대가 풀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두 명의 아시아인이 앉아 있었다. 방은 좁고 형광등은 눈부셨다. 깔끔한 제복을 한 이가 중국어로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머리가 벗어진 이가 한국어로 통역을 하였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여기에 당분간 가두어 두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불편하겠지만, 우리의 지시대로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의 지시대로 하지 않는다면 무척 불행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그들은 말을 끝내자마자 서둘러 나가 버렸다.
텅 빈 곳. 책상과 의자 그리고 냉장고가 보였다. 사방은 모두 흰색이었다. 창문은 없고 문이 두 개 있었다. 한쪽 문은 잠겨있고 다른 쪽은 이곳보다 절반 크기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간이침대와 침구류, 변기와 TV만 있었다. 어디선가 약하게 환풍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뿐이었다.
냉장고에는 다양한 음식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햄버거류와 같은 인스턴스 음식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TV 시청뿐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방송이었다.
그나마 한류 드라마가 방영되었지만, 드라마를 혐오하는 터라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채널을 CNN으로만 줄곧 고정해 버렸다.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뉴스 진행자가 내뱉는 첫마디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뿐이었다.
“굿모닝”, “굿이브닝”
아난다를 방문하는 이는 딱 한 사람이었다. 냉장고의 음식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이면, 신기하게 그는 나타났다. 그리고 서둘러 음식을 채우고는 나가버렸다. 아난다는 그에게 중국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언어로 인사를 해 보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예지수의 짐작으로, 30일 정도가 흐른 뒤, 그는 TV로 세상이 망해가는 영상을 접하고 있었다. 앵커와 기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암울하고 거칠어져 갔다. 하늘은 점점 검어졌고 도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거리는 시체로 채워졌고, 차는 불탄 채 뒹굴고 있었다.
어린이는 절규하고 어른은 망연자실한 채 비틀거렸다. 그리고 엿새쯤 지난 뒤, TV가 먹통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빈 화면뿐이었다.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이 끊어진 것이다.
그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방문자를 기다릴 수밖에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암흑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방의 모든 전기가 나갔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
냉장고는 텅 비었고, 공간은 빛 한 톨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었다. 공포가 단숨에 그를 덮쳤다. 그는 후들거리는 발과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이제, 필사적으로 이곳을 탈출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발견했다. 잠겨있던 그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바보같이, 첫날, 아난다는 그 문이 잠겨있는 것을 확인한 후, 더는 확인을 하지 않은 거였다. 그는 흥분한 채, 방을 빠져나와 필사적으로 도움을 외치며 미로 같은 공간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의 지하였다. 희미하게 비추는 비상등 속으로 그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무척 많은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밖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고 숲이었으며, 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있었다. 입으로 굴러 들어오는 달콤한 빗물을 흡입하며, 흐린 시야에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으로 힘들게 발을 내디뎠다. 예지수는 이곳이 어디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중국의 어느 한 지역인 것만은 확실하였다. 한자로 된 팻말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제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걸어 아스팔트 길로 나왔다. 길은 넓었지만, 여전히 혼자였다. 인적이 사라진 곳. 부서진 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듯이 포장된 세상 속에, 용도를 알 수 없는 흉물스러운 것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불에 탄 흔적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외로움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배고픔이 마구 뒤섞여 내딛는 걸음을 무겁게 눌렀다. 사람이 그리웠다. 누구던, 아무나 그냥 마주치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커멓게 반쯤 그을린 집터를 찾기까지, 그는 사람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있었다. 대문을 힘겹게 열어젖힌 곳. 각자의 표정과 몸짓으로, 그들은 뒤엉켜있었다. 아난다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며, 그들 하나하나를 살펴봤다. 정적과 침묵이 갇힌 곳. 고약하고 역겨운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
그들 얼굴이 어떤 형태를 띄웠든지 간에, 하나 같이 공포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고야>의 그림,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의 표정이었다. 그는 그때 깨달았다. 지금 그는 지옥의 변방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난다는 절망과 공포 속에 집을 뛰쳐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어느새 늘 그를 채우던 기우가 그의 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창조와 파괴. 인간은 알면 알수록, 경이로움과 기괴함의 양면을 지닌 묘한 존재였다. IT의 놀라운 발전은, 그에게, 정복해야 할 높은 벽의 시스템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벽의 뒷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진실도 선사했다.
모임의 목표는, 파고들수록 점점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건 세상에 드러난 수많은 테러 집단 혹은 테러 지원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조각의 작은 한 면이었다. 그들은 국지적이고 피상적이며 순진하기까지 하였다.
모든 악의 몸통.
그 뿌리는, 당신이 매일 접하는 해맑게 웃음 짓는 이웃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혹은 당신의 손으로 뽑은, 당신을 대표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친절하고 상냥한 의원일 수도 있었다. 점점 더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그는 느꼈다.
점점 더 그들을 팔수록, 점점 더 노출되었고, 점점 더 우리는, 우리가 획득한 지식에 의하여, 놀라움과 불안 속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즈음, <8의 형제>에게서 오는 메시지는, 당연하게도 다급하고 내용도 무척 무거웠다.
아난다는 도시로 점점 발걸음을 재촉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공포가 그의 지친 몸을 휘어잡았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비가 다시 내렸다.
흐린 시야 속으로 도시가 점점 다가왔다. 점점 더 많은 인간이 눈에 띄었다. 파괴된 차와 찢어진 건물 더미. 그 사이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껏 살아 있는 자는 그뿐이었다. 그는 마침내 건물 더미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울비는 더욱 세졌다. 추위가 몸 전체를 흔들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는 라후라가, 통신이 끊기기 전, 다급하게 보낸 <메시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삶의 여정을 추론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속에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습 속에 그가 해야 할 유일한 길임을.
‘<Memento mori>. 아난다. 나의 형제여. 예상대로 세상은 이제 우리를 가두기 시작했소. 불행한 시대지만 애정은 언제나 간직하길 바라오. 내 삶은 애초에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부디, 살아 있기를 바라오. 대양 한가운데, 배들의 무덤으로 가시오. 누군가 인도할 것이오. 명심하시오. 우리가 얻은 게 어쩌면 마지막 구원일 수도 있음을. <Memento 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