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킹 철학 판타지 소설
3. 수도원
답답해서 깼다. 나는 늘 그렇다. 언제나 좁고 위태롭고 추운 방에서 불안한 눈으로 세상을 맞이한다. 맞은편, 둥근 창을 반쯤 가린 커튼이 들락거리는 바람에 춤을 췄다. 하늘은 높고 구름이 산 정상에만 몰린 채 게으르게 움직였다. 천장의 작은 타원형 창으로 반짝이는 햇살이 건너와 실내를 밝히며 아주 천천히 아침을 속삭였다. 신발을 신고 구부정한 자세로 방을 겨우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가파르고 어둠에 갇힌,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한 발짝 한 발짝이 마치 찬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따가웠다.
지상에 다다르자 향긋한 냄새가 났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세상을 살펴보았다. 높은 산은 여전히 장막에 덮였다. 내가 서 있는 발밑으로, 낮은 곳에 펼쳐진 도시는 무정형의 곡선으로 끝 간 데 없이 이어졌다. 나는 허기를 느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내 주머니는 텅 비었고 내 짐은 잡동사니뿐이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세 갈래의 길 중 그나마 쉽고 익숙하다고 느낀 길로 걷기 시작했다. 완만한 산과 낮은 집들이 이어졌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가슴은 고통스럽게 뛰었다.
발의 통증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나는 높고 가파른 언덕에 우뚝 솟은 검은 수도원에 멈추었다. 여기가 <가르니에> 수도원이라는 사실이 편안했다. 나는 고아였다. 부모가 없는 어린이는, 서쪽, 동쪽, 남쪽, 북쪽, 다시 서쪽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인생>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대부분 성인이 될 때까지, 서쪽 정령의 땅에 있는 수녀원에서, 선민의 자격을 받을 수 없는 평민으로 자랐다. 그러므로 늘 의식과 경전, 예절과 예법, 낮은 속삭임과 평화로운 노래 속에서, <평온한 숨>을 쉬는 것이 익숙하였다. 나는 철로 된 문을 톡톡 세 번 두드리고 나지막이 <하마르의 평화송>을 불렀다.
‘수고로움에 지친 이들이여, 너의 앞은 따스함이 깃들고’
‘버려짐이 없는 대지에, 무척 귀한 열매로 맺음이니’
‘경배하고 속삭여라, 사랑으로 들뜬 당신의 고운 목소리’
‘평화를 기원하고 높은 곳으로 눈 돌려 행복을 소원하니’
‘그리운 이들이 낯선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딘가에 놓인, 알알이 맺힌 보랏빛 포도송이에’
‘누군가는….’
작은 얼굴을 한 소녀가 문을 빼꼼히 열고 미소를 보였다.
“저는 정령의 땅, <나스라딘> 수녀원 출신 나그네입니다. 여력이 된다면 잠시 숨을 돌리고 원장님을 알현하고자 합니다. 부디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평화”
“늘 기쁨. 삶을 이는 해방의 기운이, 은자의 세상을 살피신 데, 하물며 미천한 벌레조차 그의 생을 목적하기 위한 도구와 양식은 늘 갖추는 법, 부디 당신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실 여유를 내어 주신다면, 소생은 이 수도원의 허드렛일을 하는 낮고 가벼운 자이지만, 경청하여 듣고 새겨서 보람으로 얼룩진 기록자의 길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운 경외.” 그녀는 두 손바닥을 펼치고 살포시 들어 올리며 지긋한 눈길과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곳은 <글 씀을 이끄는 기록자>의 공간인가요? 낮은 보살핌.”
“네, 그렇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담당하는 수도원입니다. 저는 헬라스입니다. 영원한 아름다움.”
“그렇다면? 헬라스님, 이곳은?”
“네, 추측하신 게 맞습니다. 모두 여자 수녀사들입니다. 이리로 따라오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부족하지만, 아침을 제공하겠습니다. 늘 겸손함.”
그녀는 두건을 벗고 손을 저어 두 번의 기도를 한 뒤, 눈빛을 찰랑거리며 겸손의 미소와 상냥한 발걸음으로 허기진 나그네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홀은 넓고 사람은 적었다. 배식을 담당하는 이는 낯선 이에게 고개를 세 번 저어 존경을 표하였다. 내가 식기와 수저를 가지고 다가가자 짙푸른 색의 알 수 없는 고기와 희멀건 죽을 담아 주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예의를 담은, <생각과 사고의 청결함>을 수행하는 의식을 행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음식 냄새는 좋았으나 그다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한 숟가락의 죽으로 목을 적시고 좌중을 훑어봤다. 식사하는 자들은 누구도 수도복을 입지 않았다. 즉, 이 모든 이들이 방문자들인 셈이다. 그들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씁쓸함이 몸에 번졌다. 하긴, 작금의 세상은 어딜 가나 파괴와 고통뿐이었다.
고귀한 왕위 계승과 1,000년간 이어진 평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의를 명목으로 내세운, 하지만 더러운 전쟁이 천년 왕국을 망쳤다. 신의 땅을 제외한, 대부분 도시가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신들과 수도사들의 땅. 세상의 조용한 아침이 살포시 내려오는 햇살에 어우러진, 탐스러운 정신이 지배하는 이 땅이 이제, 마지막 남은 피난처가 되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 헬라스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하루의 일정이 담긴 표식을 주었다. 그곳에는 세계의 붉고 푸르고 노란색이 흐리게 빛을 냈는데, 표식의 상태와 이동의 경로, 방향과 시간을 나타냈다. 나는 첫날이므로 이 중 어떤 것을 선택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아무 일도 안 하고 숙소에서 잠만 잘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원장과의 대담이 마련되어 있는 노란 선을 택하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하기 위하여 우선, 목욕탕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푸석거리는 옷가지를 모두 곱게 개어 세탁실로 향하는 선반에 올리고 잠시 기도의 변을 읊조렸다. 넓은 탕에 수온이 적당함을 알리는 푸른 알람이 울릴 때까지 기다린 나는, 다른 입욕 자들과 함께 바닥의 자갈을 밝으며 들어갔다. 10분씩 이어지는 각 방의 이동은 7번씩 모두 세 차례의 반복으로 끝을 맺었고, 나는 그동안 <자가배의 기도송>을 12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욕을 마친 자들이 모인 회당은, 아치형의 천장에 하늘이 훤히 비치는 옥빛 반구로 되어 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기도를 흥얼거릴 수 있는 배경 음이 흘러, 사방에 반향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가운을 걸치고 나무 침대에 누워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햇살을 감탄으로 쳐다봤다. 왜냐하면 내가 거쳐온 지역과 국경, 그 대지와 지평은 온건한 연기와 흙바람으로, 처절하게 부서진 건물더미를 검은 회색의 하늘 아래 흩뿌려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햇빛을 푸르고 투명하게 그리는 순간은 어느 모로 보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잠을 잘 자지 못했으므로 그 피곤함이, 몸속을 마치 쇳덩이로 짓누르는 아픔에 살았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침대에 닿자마자 잠시의 고민을 내뱉을 새도 없이 그만 잠들고 말았다.
경고음이 손의 진동으로 느꼈을 때 나는 잠에서 깼다. 혼란스러운 꿈이 아직도 나를 누르고 있었다. 늘 이 순간은 답답했다. 나는 작은 액정에 표시된 숫자를 보았다. 12. 원장과의 면담 시간이었다. 나는 서둘러 세탁한 옷을 찾아 입고 깊은숨을 들이쉬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채, 회당 안내자의 길을 따라 좁은 복도를 지나 그녀를 알현했다.
원장은 중년의 모습으로 단아했다. 그녀는 꼿꼿한 자세와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하릴없는 방문자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세상에 남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독은 충분히 푸셨나요? 수행자님. 끝없는 사랑.”
“네, 저는 <세르게이 세브르자>입니다. 흔히 <세자>라고 불립니다. 출생은 정령의 땅 서쪽 끝 <햇살의 검은 언덕>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흔히 노년과 죽음을 관장하지만, 버려진 자들이나 고아들의 삶의 터전이 또한 그곳이므로, 생명의 처음과 끝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묵상”
“반갑습니다. 세자님. 저는 지식과 진리의 기록으로 신성의 다가섬을 수행하는 가르니에 수도원 원장 아난다입니다. 그곳에도 여전히 전쟁 중인가요? 서글픈 탐욕.”
“전쟁의 처음이었으므로, 지금은 끝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고 여전히 파더스 가문의 통치하에 놓여있습니다. 즉, 비극과 고통이 만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참한 탄식.”
“여전히 오늘도 슬픔의 소식이 만연합니다. 불쌍한 세자님. 오늘도 앞선 이들의 사연 모두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행복보다는 고통이 만연한 세상을 제게 던져주고 갔습니다. 우울한 심연.”
“죄송합니다. 서글픈 원장님. 저 또한, 마음과 정신, 육체와 관계가 모두 망가진 상태로 신의 땅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깃든 곳이지만, 언제까지나 전쟁의 화마에서 온당하게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저 드릴 수 있는 작은 정성이라고는, 세상의 평화가 다시 퍼지는 날까지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리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나는 알고 있다. 기록자의 회당에서는, 무엇이든 뱉는 말은 어딘가에 기록이 남고 수습이 불가하며, 무거운 책임을 수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겁쟁이로, 비천한 몸 하나 겨우 건사하며 버텨왔으니, 몸이 움찔하고 가슴이 졸아들었다.
“하지만? 세자님. 이곳은 무슨 말이든 포용하고 용서하고 따스함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거나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편안히 속을 털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지속적인 희망.” 그녀는 이미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관용의 미소가 나를 다시 편안함으로 이끌었다.
“네, 그럼, 저는 이제 제 이야기를 감히, 한 올의 거짓됨이 없이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18세가 되던 그해의 봄은, 1,000년 왕조의 평화와 기쁨이 온 누리를 살찌우던 때였습니다. 현제(玄帝)의 왕, 세푸르님은, 어느 날 한 농부의 딸인 나탈리아가 쓴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예언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왕조의 멸망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백성이 죽어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왕과 대신은 대노(大怒)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의 여부를 따지기도 전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 모두를 불러 문초를 하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제가 그녀를 만난 건 바로 그때입니다. 저는 15세부터 죄수와 범죄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귀양 촌에서 갖가지 일을 하며 제 용돈을 벌곤 하였습니다.”
“그럼, 결국 그 예언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거군요? 불안한 미래.”
“네, 그렇습니다. 아난다 원장님. 비록 불분명한 어휘와 묘사, 암시가 덮여 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꽤 뚫는 데는 큰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놓고 보면 분명 그때, 그 예언을 좀 더 살펴보고 숙고하지 않은 게 가장 큰 불찰이라고 느껴집니다. 아쉬운 후회.”
“당신은 나탈리아와 친구가 되었군요? 거룩한 우정.”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저처럼, 가족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며, 유일하게 글을 배우고 지식을 탐닉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외톨이였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봤습니다. 끌림이 한동안 이어졌고, 결국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황홀한 기쁨.”
“그럼, 나탈리아는 예언가인가요? 무한한 지식.” 원장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조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예언자는 나탈리아의 아버지 니콜라스입니다. 그녀는 그저 기록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기록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나탈리아는 글쓰기를 좋아했고 저는 글 읽기를 즐겼습니다. 그녀의 일기에 아버지의 예언이 종종 실리곤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3년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곧 나탈리아의 가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녀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에게 가끔, 발신자 불명의 편지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듬해, 어느 외딴 섬에 있는 연구소에 취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쉐임 박사>의 AI 초기 개발팀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정령의 땅에서 <왕자 시혜 사건>이 발생하면서, 흔히 우리가 일컫는, <파더스의 난>이 발발했습니다. 모두 편지에 적힌 예언 그대로였습니다. 시혜 사건이 난 지역은, 제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분쟁은 참혹함을 뛰어넘어 저주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도저히 어제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파괴되고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여인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책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사랑보다 더 소중한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언의 해석과 실천, 종국에는 이 비극을 마무리할 책무 말입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다시 만났지만, 곧 그녀는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서글픈 그리움.”
“무척 안됐습니다. 세자님. 당신이 의당 누려야 할 사랑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지극한 정성.”
“감사합니다. 원장님.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고, 미천한 인간의 육신을 고귀한 정신으로 깨닫게 한, 신의 가호가 만물에 미치기를 소원합니다. 간절한 기도.”
“당신의 뜻대로…. 주관을 살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부디 가엾게 여기소서….” 원장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속세의 간청>을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기도가 끝나기를 살피며 고른 숨을 쉬었다.
“세자님, 예언가로 알려진 나탈리아의 아버지 니콜라스에 대하여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가요? 궁금한 진실.” 살포시 눈을 뜬 원장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응시하며, 슬픈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네, 저는 제가 듣고 읽고 본 대로 제 기억을 장식한 이야기를 원장님께 기꺼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스에 앞서 저는 <파더스 가문>과 <로터스 가문>의 관계를 우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이번 전쟁의 원흉이자 여전히 세상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는 파더스 가문과 이를 막고자 <사피엔티아>라는 비밀 조직을 결사하여 격렬하게 저항하는 로터스 가문이 실은 같은 뿌리이며, <가우타 로터스>로 알려진 저항 세력의 지도자와 제 연인 나탈리아의 만남이, 예언대로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반증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