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킹 철학 판타지 소설
2. 신의 땅
그날, 나는 나의 벗, <사리>에게서 긴급한 메시지를 받았다. 사리는 비밀 결사 단체인 <사피엔티아>의 세 번째 형제다. 나는 훗날, <릴리안 나리>의 역사책에서 사리를 언급한 것을 먼저 적어보겠다.
‘사리는 기호학자이고 해커였다. 그가 군사 비밀 협정 유출에 관한 스파이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가우타가 그를 찾았다. 가우타는 낡은 종이 한 장을 그에게 보였다. 그리고 곧 형제가 되었다. 그가 내민 문서의 내용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사리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만 알려졌다. (<릴리안 나리>의 <천년 왕국의 기록> <구원 편> 17장 99절)’
나는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신의 땅> 국경을 넘기 직전이었다.
‘메멘토 모리,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심하세요. 추적이 가능한 곳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세요. 메멘토 모리.’
기차는 실시간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 나는 다음 정거장을 확인했다. <뷔징겐> 역. 3분 이내에 도착 예정이었다. 뒤이어 <환락의 땅> 남쪽 항구도시에 있는, 호텔의 직장 동료에게서도 다급한 메시지가 왔다.
‘수십 명의 <파더스> 경찰대원들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는 모든 연락 가능한 스마트 기기의 전원을 즉시 껐다. 가슴이 옥죄어오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부터는 오직 사피엔티아와만 연락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사리에게 답신을 보냈다.
‘메멘토 모리. 열차에서 곧 하차합니다. 뷔징겐 역. 메멘토 모리.’
곧이어 그룹 전체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멘토 모리. 수보티, 게른타 형제 체포됨. 최대한 빨리 신의 땅으로 피신하기 바람.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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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수 십 대의 추적 드론이 열차 플랫폼 근처를 비행하고 있었다. 그때, 사리의 메시지가 왔다.
‘메멘토 모리. 주차장에서 마틴 찾기 바람. 선글라스. 메멘토 모리.’
플랫폼 내는 비행 금지 구역이므로, 드론은 역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신원확인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화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 뚜껑 위에 배낭을 펼친 뒤, 겉옷을 급하게 벗었다. 그리고 <복합인지 위장용 조끼>를 배낭에서 꺼내 속에 걸치고 다시 옷을 입었다.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열차 대기실을 빠져나와 특수 렌즈가 장착된 선글라스를 꼈다. 몇 대의 드론이 나를 졸졸 따라 오더니 이내 포기하고 가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마치 관광객인 양 두리번거리며 차량을 조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윈도에 <마틴>이라는 글자가 쓰인 차를 발견했다. 나는 안경을 벗고 운전석에 탑승한 후 시동을 걸었다. 무척 오래되고 낡은 차였다. 어쩔 수 없었다. 최근 차량은 AI가 기본 탑재되어, 땅속으로 꺼지지 않는 한 모든 추적이 가능하였다. 나는 잠시 어디로 향할지를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포기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도시에서 멀어지는 방법뿐이었다.
나는 수동 운전으로 전환한 뒤, 가속 페달을 꾹 밟았다. 차는 한번 덜컥거리더니 이내 빠르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쯤 산길을 달렸을 때, 메시지와 함께 목적지를 받았다.
‘메멘토 모리. <가르니에 수도원>. <아난다> 원장 찾기 바람. 메멘토 모리.’
나는 차량 내비게이션에 목적지 주소를 이식하였다. 그리고 자동 운전으로 전환하였다. 옵션으로 <오로지 좁은 도로로만>을 선택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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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는 꽤 깊은 산중을 달리고 있었다. 더 이상 드론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동차 시트를 최대한 뒤로 빼고 눕힌 다음, 지그시 누워 눈을 감았다. 온통 나탈리아 걱정뿐이었다. 그녀와 연락이 끊어진 게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저 <생체 인식 동기화 표시>에 <생존>을 알리는 녹색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으로만 위로했다. 사실 <사피엔티아> 두 번째 형제인, 나탈리아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다만, <사피엔티아> 설립자이자 첫 번째 형제인, <가우타 로터스>와 함께 비밀 지령을 수행하고 있다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저 답답한 노릇은, 지금 당장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나로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다. 나는 긴 한숨과 함께, 앞으로 펼쳐질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적들은 기대보다 무척 빨리 우리 곁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몇 시간을 달려, 마침내 신의 땅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곳 경계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사리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모든 장치나 기기를 차에 두고 내렸다. 이곳에서는 어떤 교통수단이나 통신 수단을 쓸 수 없으며, 모든 장식품이나 사치품조차도 지닐 수 없다. 그저 사는 데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것만 허용되었다.
이것은, 이 땅의 시조이신 <프라이스 다즈>님이, <호모 사피엔스>의 대멸종 이후, 하늘 즉, 인공위성과 다른 행성 그리고 그것의 위성 식민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신을 경외하는 선한 이들을 이끌고 지구로 귀환하여, 천신만고 끝에 맞이한 신선하고 푸른 땅을, 정확히 동서남북으로 등분하여 마련한 터전에서 비롯하였다. 중앙을 차지하는 크고 넓은 사막은 <텅 빈 땅>, 동쪽은 <신의 땅>, 서쪽은 <정령의 땅>, 남쪽은 <환락의 땅>, 북쪽은 <문명의 땅>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통치와 경제, 과학, 사회 발전은 문명의 땅에서 하되, 절대 불가침으로 규정한 신의 땅에서는 철학과 신학, 인문 지식을, 환락의 땅은 예술, 문화, 관광, 인간 쾌락의 누림을 보장하고, 정령의 땅은 죽음과 감옥, 귀양살이 및 고아들을 관장하는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인간을 두 부류로 분류하였다. <평민>과 <선민>. 사람을 계급의 높낮이 혹은 등급으로 규정하는 것은, 얼핏 보면 미개 시대 혹은 절대 권력의 소수 집단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나 있을 법한 사상이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대멸종 이전, 인간이 역사적으로 마련한 가장 공정한 제도라도 일컫는 의회 민주주의조차 무능력하거나 탐욕에 가득한 정치 지도자를 양산하였고, 피지배자의 삶은 순탄치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그 대안으로 나온 불가피한 조치였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은, 이 땅 어디에서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소수의 선민은 달랐다. 이 땅에 탄생한, 선민의 부모가 낳은 새 생명은, 서쪽에서 유년의 10년을 보낸 뒤, 동쪽에서 청년이 될 때까지 신학과 지식을 쌓고 남쪽에서 환락의 젊음을 보낸 후, 그 유혹을 이겨낸 자들만 중년이 되면 북쪽으로 건너가, 안정적이고 편안한 가정을 꾸미고 삶을 즐긴 뒤, 노년에 다시 서쪽으로 가서 죽음을 맞도록 하였다.
선민의 삶은 오로지 평민을 위한 것. 그러므로 모든 삶의 궤적이 공개되고 평가되었으며, 자칫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있으면 그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선민은 정치, 경제, 경찰, 국방, 과학, 문화, 예술 등 모든 중요한 보직의 책임자로 살아야 하지만, 사유 재산은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선민 중에 가장 존경받는 이를 왕으로 옹립했다.
이렇게 왕국은, 설립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대체로 평화로운 천년을 보냈다. 적어도 북쪽 문명의 땅에서 경제와 첨단 기업 및 태양계 식민지 상당수를 장악한 <파더스 가문>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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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시간 더 걸었다. 그리고 그나마 평지가 남아 있는, 한적한 시골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골랐다. 목적한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투명한 하늘 아래, 건물은 오래된 듯 낡지 않았고 지저분한 듯 정돈되어 있었다. 우선, 방문객은 눈을 씻고 봐도 띄지 않았다. 좁은 골목은 막힌 듯 구부정하게 경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였고, 돌길이 끝난 자리에는 여지없이 포도밭이 펼쳐졌다. 밭은 언덕 전체를 휘어 감고 그 끝의 경계를 감히 재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해서, 혹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라고 해서, 그곳의 가치를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이 서린 곳일 수도 있고, 숨을 멎게 만드는 비경이 모습을 감춘 채, 우연한 방문자에게 놀라움을 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파른 언덕 꼭대기를 온통 덮고 있는, 검은 회색의 수도원이 중앙을 차지한 마을은, 차량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준 곳치고는, 꽤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풍경이었다.
마을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드물게 눈에 띈, 농부든, 수도사든 그들의 걸음걸이는 아주 느렸다. 마치 달 표면을 걷는 듯하였다. 시간이 지나치게 느리게 가는 곳. 분명 내가 한동안 머물렀던, 환락의 땅과는 달랐다. 그곳은, 비정형, 불규칙, 가속, 오락가락, 드러남에 대한 과도한 관심, 확 트인 길과 잡동사니가 쌓인 골목, 작은 혼돈들이 뭉쳐 거대하게 뒹구는 탐닉들이 혼재하여 뿜어져 나오는 도가니 같았다.
나는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제공하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보려고 애썼다. 동시에, 뜻하지 않은 공간에서 맞이하는 생소함에 신선한 자극을 느꼈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한다. 호기심은 보호본능보다 더 충동적이다. 조금 전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자극처럼 튀어나왔다. 나는 이곳을 좀 더 훑어보기로 작정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숙소를 찾아야 하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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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두꺼운 슬레이트 지붕이 낮게 내려선 곳. 호텔을 표시하는 간판은 눈에 띄지 않게 작았다. 반질거리는 조약돌을 쌓아 놓은 공터를 지나자 입구가 비로소 나타났다.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이,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나왔다. 안내대는 허름한 칸막이벽 하나로 구분되었다.
텅 빈 곳. 아무도 없었다. 손님도 주인도. 마호가니 서랍장만이 외로이 남아 있다. 벽지는 모서리마다 얼룩지고 부풀어있었다. 벨벳 커튼이 묶인 채, 창을 암울하게 살짝 가렸다. 오랫동안 펼쳐지지 않은 윤곽이 고스란히 회색빛 먼지로 포장되었고, 창틀 언저리에는 좀나방이 죽어있었다. 그리고 창문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은 흐리게 일그러져있었다. 호젓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혼자였다. 나는 발길을 돌리려다 멈췄다. 다른 호텔을 근처에서 찾을 가능성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여주인이 나타났을 때, 나는 <릴리안 나리>의 <호모 사피엔스 기록> <고대 철학 편>을 읽고 있었다. 한 달째 읽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절반도 못 읽었다. 나는 유난히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나오면 무한 반복 테이프처럼 지칠 때까지 곱씹었다. 특히나 이 책은 참 고통스러웠다. 마치 낱장 한 장 한 장이 한 권의 책처럼 느꼈다. 차라리 멍하니 그냥 기다리는 게 쉽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한 장 반을 더 읽었다.
어느새 어둠이 세상을 덮었다. 수수한 마실꾼 행색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에게 <하이드로멜리>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신의 땅에서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술이다. 그리고 묻지도 않고 보드에 걸려 있는 방 열쇠 하나를 내어 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
“301호에요. 3층 복도 끝 방입니다.” 동부 억양이 심하게 섞인 공용어를 겨우 알아들었다.
“실례지만 방값은?”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알아서 줘요. 당신이 유일한 손님이니까.” 주인은 넌지시 해쭉 웃으며 나가버렸다. 나는 술잔을 들이켰다. 시큼한 향이 목을 막으며 퍼졌다. 그 순간, 아내와 보낸 마지막 밤이 무척 그리웠다. 나는 주머니에 담긴 몇 안 되는 동전을 모두 털어 안내대에 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