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의 증인
세상과 소통하는 아주 작은 창이 붉게, 푸르게, 그리고 투명해졌다. 시간과 공간이 마치 정지한 듯 흐느적거렸다. 형사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나는 숨을 얕게 쉬었다.
머릿속이 늪에 빠졌다. 삶을 이는 괴팍한 상상이 펼쳐진 대지에 홀로 선 나는, 이미 속단할 수밖에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궤도의 이탈에 순응하였고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고 알 순 없지만, 그저 걸을 수 있는 길들이 여기 이렇게 펼쳐져 있지 않은가? 그나마 사람들이 말하는 그 정상궤도라는 것조차 온갖 탐욕과 사치를 향한 욕구적 행위에 불과한 건가? 음울한 허탈감이 짓누르고 있었다.
“13일 밤 이야기를 합시다.”
“그날은?…”
“그렇죠. 당신이 김진아를 만난 마지막 날이죠. 그렇죠?”
“네. 아마도.”
“아마도 가 아니라 확실합니다. 모든 증거가 다 확보되었어요. 아시겠어요!”
나는 육체적 욕망에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상황을 겪곤 하는데, 그날이 그러했다고 대답했다. 4층의 복도를 지날 때 실제로 나는 온갖 음흉한 생각으로 쾌락의 언덕을 막 건너는 듯한 환상에 잡혔었다.
“그런데 왜 사라졌어요?”
“...”
“한 달에 일주일은 사라지더군.”
“늘 그런 건 아닙니다.”
“뭐, 딱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대충 그렇다는 겁니다. 맞죠?”
“네. 얼추.”
“비즈니스 때문은 아니죠?”
“네, 아닙니다. 개인적인 용무죠.”
“그 용무가 뭡니까?”
“귀농을 준비합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뭐 딱히 정해진 곳은…”
“...”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뚱뚱한 형사는 무서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침묵은 재깍거리는 시계 소리를 확대하였다.
침묵의 시간이 아주 느리게 그리고 길게 흘렀다. 그리고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 짧은 머리가 길어졌고 둥근 턱이 날카로워졌다. 두꺼운 문서는 여전하지만, 그는 가벼운 노트패드와 휴대용 인쇄기를 내 앞에 펼쳤다.
그는 간이 서랍을 벌컥 열었다. 형사는 A4용지 한 묶음을 집어 프린터기에 채워 넣었다. 탕하는 소리와 그르렁거리는 소음이 다시 이어졌다. 잠시 침묵 뒤에 인쇄기는 다시 종이를 토해냈다. 그는 다시 자리를 잡아 앉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귓바퀴가 뭉툭하게 말려 묘하게 생긴 귀가 거슬렸다.
“13층에 사시죠?” 같은 질문이 또 이어진다.
나는 그의 표정이 인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진술을 하라는 것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채 머뭇거렸다.
형사의 목이 껄떡거리며 움직인다. 따가운 시선이 나의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나는 그와 천장과 바닥, 벽을 번갈아 본다. 사방은 하얗고 단순하며, 초점을 맞추지 않은 시선은 구름처럼 몽환다웠다. 두꺼운 마음의 사슬이 진눈깨비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나는 이제 무척 많은 것을 듣고 말해야 한다. 그는 나를 그냥 놔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휘 선택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네.” 옷이 그에게 좀 끼여 보였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움직여 새로 자세를 잡았다.
“언제부터 살았나요?” 나는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주 비가 많은 날에 이사를 왔다는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와 관계한 날짜를 모두 정확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반복 학습의 효과. 그들은 앵무새처럼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마치 그 모든 숫자가 내 삶을 조형하는 무척이나 뜻깊은 의미가 되는 듯 새기고 또 새긴다.
넉 달 전. 4월 13일부터. 그는 무심한 듯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트패드 화면을 돌려 내게 보여준다.
넉 장의 사진. 4명의 인간. 그들은 모두 밝게 웃고 있다.
“지난 13년 동안, 당신이 교도소를 들락날락한 8년을 제외하고, 당신이 거주하는 곳 혹은 근처에서 발생한 실종자들입니다.”
그는 내게 확실한 존댓말을 사용한다. 뭔가? 아직 내게 확신이 없는 건가?
“알고 있죠?”
“네.”
“어떻게 알고 있죠?”
“작년에 이미…”
“그때는 용케도 잘 빠져나갔더군요. 용의선상에 맨 처음 올랐는데도 말입니다.”
“…”
“확실한 알리바이와 증인이라…”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간단했다. 그들에게 입막음 돈을 안겼다. 빳빳한 현찰을 보고 있는 행복한 그들의 모습. 진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탐욕이 모든 가치를 덮어버리는 쪽으로.
“대담한 거예요? 아니면 무모한 겁니까?”
“네?”
“김진아, 아니 이순례가 실종되면 모든 화살이 당신을 향할 거라는 것쯤은 알 텐데?”
나는 준비된 것만 지각한다. 애쓰지 않음과 애씀이 그저 살고 죽는 것만큼, 이제 그 차이는 빈약하다.
“김진아 씨가 실종되었나요?” 나의 반문에 형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박칠규씨, 이보다 더 명백한 연결고리가 있을까요? 4명의 증인. 당신 아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들. 아주 공교롭게도 당신이 증인 근처로 이사한 몇 달 사이에 적절하게 맞추어 사라졌더군요.”
살인이 일어났고 아내가 희생되었다. 네 명의 목격자가 있었고 하나의 피의자가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무척 많은 재산과 권력을 소유했고 훌륭한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제 여러분은 여기에서 뭔가를 느낄 것이다.
그렇다. 당연하게도 그는 무제로 풀려났고 증인들은 하나같이 그를 감쌌다.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것만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안경 너머 긴 눈썹을 끔뻑이며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는 나와 관계된 여러 장의 문서를 주섬주섬 꺼내 놓기 시작했다. 나의 행적과 사람들이 나를 평가한 것들이다. 그들은 지식의 단편들을 모아 그다지 습관적이지 못한 비정형의 인간을 규정해놓았다.
“복수했군요. 그것도 아주 치밀한 계획에 따라서.” 바싹 메마른 향내가 기관지의 까슬한 목구멍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사회는 위법자들을 요구한다. 독소를 이용하여 자신의 항체를 키운다. 나는 결국 바이러스의 운명을 타고난 거다. 멋진 세상.
“네, 그런 셈이죠.” 나는 덤덤하게 자백하였다. 형사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밝아졌다.
가끔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발적으로 할 때도 있다. 피곤한데 깨어 있는 다던지, 조용히 있고 싶은데 음악을 높인다든지, 걷기 싫은 데 등산을 하곤 한다. 고통의 수용. 그러다 보면 가끔 고통이 반가울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중독이 되기도 한다. 고통의 기쁨.
“하지만 치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여기 있지도 않았겠죠.” 형사는 크게 한바탕 웃고는 비쩍 마른 손을 탁하고 책상에 놓았다.
나는 실패가 베푸는 위안에 파묻혀있다.
“그건 모르죠. 이것 또한 당신 계획의 일부분일 수 있으니까.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영악하니까.”
“자, 이제 당신의 그 멋진 살인 계획을 이야기해 볼까요?”
“네. 하지만 살인은 아닙니다.”
“그럼?”
“납치죠” 이따금 행복감을 만끽하던 어떤 순간들의 조용한 속삭임을 느낀다.
“그럼?”
“네. 아직은….”
“그럼?” 파멸이나 파국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죽게 될 겁니다.”
“어떻게?” 실룩거리는 입술. 나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나는 그저 찰나처럼 지나가는 몸짓, 행동, 형상, 분위기, 착시 등에 더 관심이 다가왔다.
“제가 갇혀있는 동안에…. 굶어서….” 어수선한 낯선 공기가 흘러내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