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킹 판타지 스릴러
뱀섬
5년 전, 인터넷 버블이 세상을 흔들던 어느 날, 명문대 2학년에 재학 중인 팀장은 모 대기업이 주최한 소프트웨어 개발자 대회에서 대상을 받는다. 그리고 당연히 몇몇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용 꼬리보다 뱀 대가리가 되고 싶었다.
그런 그의 욕망을 알아본 이가 남 이사였다. 그는 모 건설회사에서 회계 관리를 20년 동안 하였는데, 그동안 회사 공금을 교묘하게 빼돌리다 꼬리가 잡혀 구속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간단하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의 변호사 아니 변호인단이 국내에서 알아주는 초호화 집단이었다. 그의 재력으로는 도저히 꾸릴 수 없는 멤버였다. 이때부터 그의 배경에 제3 세력 혹은 조폭이 있다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남 이사가 첨단 IT 기업을 창업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컴맹이었다. 그저 회계 프로그램에 숫자 정도만 입력할 줄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입버릇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앞으로 세상은 생명공학, 미디어, IT가 지배하게 될 거야. 두고 보라고!“
김 팀장으로서는 남 이사 같은 인물과 손잡고 일하는 게 무척 편했다. 왜냐하면 남 이사는 프로그래밍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김 팀장이 요구하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가감없이 들어 주었다. 심지어 사업 아이템도 김 팀장이 정했다.
김 팀장은 학생 시절에 만든 회계 관리 프로그램을 확장하여 ERP 개발에 착수했다. 남 이사는 김 팀장이 요구하는 적당한 규모의 사무실, 적절한 개발 인력, 합당한 규모의 마케팅 예산 편성까지 모두 군말 없이 수용했다. 실질적으로 김 팀장이 사장이었다. 남 이사는 적당한 시간에 출근해서 종이 신문 좀 보다가 당일 매출액 정도만 살펴보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대표이사라는 작자였다. 김 팀장이 대표이사를 처음 본 것은 회사가 본격적으로 수익을 내고 국내 ERP 업계에 꽤 이름이 알려진 뒤였다.
어느 날 현관문을 박차고 어떤 젊은 여인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명품으로 두르고, 짙은 화장품 냄새를 사무실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젊디젊은 수컷 개발자들이 이 공격적인 자극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수상한 여인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남상호 이사님 뵐 수 있을까요?“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어 한 손에 쥐고 도도한 표정으로 가까이에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네. 이사님은 저기 저쪽 방에.“
직원이 가리킨 곳을 그녀는 한번 흠칫 보더니 다시 선글라스를 끼고 그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그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 이사가 잽싸게 뛰쳐나와 그녀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고, 부총재님께서 어인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그야말로 사극에서나 보던 임금과 신하의 모습이었다. 남이사는 연신 고개를 수그리며 그녀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직원이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를 쳐다봤다. 김 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누군데 남이사가 저렇게 쩔쩔매지?‘
잠시 후 방문이 다시 벌컥 열리더니 남이사가 김 팀장을 급히 찾았다.
”이분은 우리 회사 대표이사이신 어…. 신윤정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우리 어…. 김민호 팀장님입니다. 인사들 나누시죠.“
김 팀장이 인사를 하자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 남이사님한테서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무척 유능하신 개발자분이라고.“
”아, 네. 뭐 그냥 밥벌이 정도는 합니다.“
그녀의 손은 무척 말랑했다. 하지만 얼굴은 마치 조각품처럼 딱딱해 보였다.
”이번 달에 저희 제품이 ERP 시장에서 2위로 올라섰습니다. 이대로라면 1위 탈환도 어렵지 않을 전망입니다. 부총재님. 아, 아니, 사장님.“
남이사가 특유의 편안한 인상을 지으며 그녀에게 아첨을 떨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아무튼 우리 총재님 말씀대로 앞으로의 세상은 생명공학, 미디어, IT가 지배하게 될 거니까. 다들 열심히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에 김 팀장은 빵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남이사가 그동안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 결국은 그 총재인가 뭔가가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총재라는 거지? 그리고 이 여자는 뭔데 새파란 나이에 부총재와 대표이사를 겸임하는 거지?‘
김 팀장이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와 남 이사를 번갈아 쳐다보는 사이, 그녀는 제법 큰 명품 가방에 손을 집어넣더니 현금다발 한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김 팀장에게 내밀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직원들끼리 회식이나 하세요. 팀장님.“
모두 10만 원권 자기앞 수표였다. 적게 잡아도 천만 원은 되어 보였다.
’시팔,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가 뭐야?‘
팀장은 뭉칫돈 앞에 감사하다는 마음보다는 뭔가 모를 불길함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며칠 뒤에 이상한 요구사항으로 나타났다.
”연구소 전산 시스템 구축입니다. 팀장님.“
남 이사의 요청에 김 팀장은 당황스러웠다. 치열한 ERP 시장에서 직원이 합심 단결하여 총력을 기울여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게 현실인데, 뜬금없이 연구소 시스템을 구축하라니…. 팀장은 단호하게 거절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남 이사의 간절한 표정을 읽었다.
”팀장님, 제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뭘 요구한 적이 있던가요?“
”물론 없었습니다. 이사님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제 청을 들어 주십시오.“
”네. 그럼 이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하시죠.“
”우선, 저희 대표이사는 어떤 분입니까?“
그의 질문에 남이사는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리고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김 팀장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비밀로 해주신다면 간단하게 우리 사장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비밀로 하겠습니다.“
”음…. 그러니까…. 일종의…. 편하게 비유하자면 종교단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종교 단체라고요?“
”정확히 종교단체는 아닙니다. 그냥 총재와 대의원이 있는 일종의 조직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매우 신중합니다.“
”그럼, 저희 사장이 그 단체의 부총재라는 말씀인가요?“
”네. 맞습니다. 총재님의 자녀 중 한 명입니다.“
”한국에 본사가 있나요?“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 있나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연구소는 한국에 있나요?“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
”전 세계 여러 곳에 있습니다.“
”여러 곳에? 그럼 한 개가 아니군요?“
”네. 여러 개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모두 섬에 있습니다.“
”섬이라고요?“
”네, 예를 들면 남태평양, 인도양, 흑해, 북해 심지어 남극까지….“
”그게 가능한가요?“
”네. 그게 가능할 정도의 재력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세계 경제계의 보이지 않는 손.“
김 팀장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뱀의 대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무척 거대한 용의 꼬랑지였다.
”그럼 무엇을 연구하는 곳입니까?“
”물론 생명공학입니다.“
”모든 연구소가 다 그런가요?“
”네. 모두 다, 생명공학입니다. 총재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총재님의 뜻은…. 생명공학, 미디어, IT 라는 거죠?“
”네. 정확하십니다. 팀장님.“
”그럼, 미디어는 어디?“
”이미 전 세계 굴지의 신문사, 영화사,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사들였습니다.“
”그럼 저는 모든 연구소 범용 통합 관리 시스템을 만드는 건가요?“
”아닙니다. 오직 한 곳입니다.“
”거기가 어딘가요?“
”남태평양에 있는 <랑테스그란데>라는 군도입니다.“
”군도라면?“
”네. 여러 개의 섬이 뭉쳐져 있습니다.“
”랑테스그란데라고요?“
”네. 원주민은 그렇게 부릅니다. 영어로는 스네이크 아일랜드. 즉, 뱀 섬입니다.“
”뱀이 많은가요?“
”딱 한 종. 전 세계 어디에도 살지 않는 맹독을 가진 독사가 삽니다. 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물론 물리면 7초 이내에 사망입니다. 하지만 우리 단체가 개발한 백신과 해독제가 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뱀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지구상에 뱀이 있는 섬은 흔하니까요. “
”그러면 왜 그렇게 이름을?“
”섬의 모양이 뱀처럼 생겼습니다. 여러 개의 섬이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졌습니다.“
”그럼, 저는 개발을 거기 가서 해야 하나요?“
”그건 팀장님이 선택하시면 됩니다. 다만 한 번 이상은 가셔야 할 듯합니다.“
”그래야겠죠. 적어도 한번은….“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나요? 그 연구소 관리 시스템이라는 거?“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