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상상 혹은 죄와 벌 #07

제나 (Zena)

by 남킹

그래서, 너의 구체적인 꿈은 뭐야?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눈물과 절망을 전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야. 글로써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음악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퇴폐를 심어주는 그런 예술가가 되고 싶어. 그리고 그 소중한 <의미 없음>을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전 세계에 나눠주고 싶어.

멋진 꿈이야. 네가 작가로서 세계를 향해 전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많은 사람에게 심연을 주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도 강한 유대를 형성해 줄 거야.

마저. 우리 사이에 특별한 연결이 느껴져. 네 속에 담긴 끌림에 대한 열정과 내 안의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비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느껴. 이 밤은 마치 우리가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몽환을 발견하는 순간이야.

그래, 이런 대화는 언제나 특별하지. 만나서 쾌락을 쌓고 고통을 가꾸다 보면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 같아. 이 밤이 끝나더라도 우리는 함께 갈 거야. 어둠 속으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다시 한번 섹스할까?

벌써 발기가 된 거야?

사실, 비아그라를 좀 챙겨왔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콘돔과 비아그라는 현대 남성의 필수품이지.

나도 챙겨온 게 있는데. 깜빡했네. 나 바이브레이터 사용해도 되?

물론이지.

*************

섹스가 다시 끝났다. 그녀는 다시 잠들고 나는 깨어 있다. 조명은 가늘었다. 빈 곳을 채우는 어둠은 연속적으로 타오르는 향이라고 느꼈다. 냄새가 났다. 한풀씩 벗겨지는 커튼으로, 달음질치는 바람에 시선이 흔들렸다. 나는 제나의 연분홍 젖꼭지를 만지며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누른 연 나뭇결이 주름진 끝자락으로 펼쳐진 곳은, 마치 미로의 끝에 솟는 샘물처럼 도드라지기도 하였고 무난하기도 하였다. 빈 곳. 그 외에는 모든 게 텅 비었다. 나는 내 나름의 논리로 이 허전함을 애써 자위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 상황은 불편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제나를 만나기 전 갈등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손쉽게 돈으로 여자를 유혹했다. 그날도 여전히 비가 오고 구름은 무겁고 날은 춥고 사람들은 많이 몰려다녔다. 나는 기차역에 내렸다. 아마 무슨 날인 것처럼 보였다. 공간마다 음식점이 열렸고 오픈된 가게에 줄 서 있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공손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도 그녀의 답은, 퉁명스러움을 넘어서는 고통을 머금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느낀 소박한 감상에 대한 그녀의 처절한 기복과 우려 때문일 수도 있고, 저변을 흐르는 미쳐가는 우리 사이의 냉담일 수도 있다. 구름을 따라 점점 멀어지는 가게. 나는 서서히 물들어가는 내 이면의 강도에 따라 천천히 길을 나서 그녀의 동네로 이끌어 줄 지하철로 갈아탔다. 그때쯤 그녀에게 온 메시지는 꽤 공격적이었다.

너를 반겨줄 여유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는 충분해!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창에 비친 나를 수식 없이 바라봤다. 모든 갈등은 작은 매듭에서 시작했다. 그 과정은 사소한 오해와 반목이, 기대하는 만큼의 단계로 접어들수록 어려워지고 복잡해졌다. 나는 이런 것에 서툴다. 나도 그 녀석처럼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들. 늘 지극히 작은 자존심의 상처를 둘러싼 호들갑스럽고 멍청한 대사들의 향연. 나도 마르셀과 같은 족속이다. 줄곧 다큐멘터리만 볼 뿐이다. 그러니 여자의 기분을 달래주는 것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그녀의 마을은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30km쯤 떨어져 있다. 하지만 대중교통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나는 차를 사지 않은 편리함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늘 한다. 삶의 단순함에 길들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이 간단함이 주는 안락함. 하지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은 꽤 고통스럽다. 나는 기차 시간표와 버스 스케줄을 앱에서 확인하고, 그에 맞춘 시간을 계산하고, 내가 중간에 머물 때를 대비한다. 귀찮기 짝이 없는 이 작업.

젠장, 이럴 땐 한국이 그리워. 값싼 택시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되잖아.

나는 아주 작은 시골 역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무척 작았다. 개찰구도 자판기도 안내 창구도 행인도 없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역. 나는 담배를 물고 그 연기가 사라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색을 담은 옅은 구름. 그리고 그녀를 잠시 떠올렸다. 한동안 그녀에게서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았다. 늘 그랬다. 그녀는 지나치게 감성에 휘둘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행동을 용서하는, 넓은 마음가짐을 익힐 만큼의 욕망은 지니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더 멀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바보같이 그녀와의 연결을 끊지 않고 있다.

*************

왜 온 거야?

휴일이잖아.

뭐 우리가 주말 부부라도 되는 거야?

그냥 갈 곳이 없어.

그럼 여긴 갈 곳 없으면 들르는 정류장이야?

갈 곳 없는 사람은 정류장으로 가지 않아.

그래서 왜 왔는데?

여기서 자려고.

누가 재워 준대?

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변기 물소리가 났다. TV에선 온몸에 문신한 힙합 전사들이 카메라를 줄곧 째려보며 입을 놀렸다. 붉은 커튼으로 가린 작은 창은 슬픈 빗물을 묻혔다. 중간이 푹 꺼진 작은 침대와 허름한 책상이 공간의 한쪽을 채웠다. 벽에는 오래된 책들이 쌓여있고 노란색의 녹슨 등불이 옅은 빛을 뿜었다. 다른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 속에 대가족이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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